[주경철의 히스토리아] [48] 가이젠(改善)
조선일보/오피니언/주경철 서울대교수 서양근대사
입력 : 2010.03.05 22:28 / 수정 : 2010.03.05 23:15
- ▲ 16세기 중엽 일본의 조총.
'가이젠(改善)'은 생활의 모든 면을 계속 고쳐나간다는 일본의 생활철학에서 유래한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일본의 제조업에서 끊임없이 결점을 고쳐나가고 낭비
요소를 없애서 생산성을 높이는 활동을 가리킨다. 일본의 가이젠이 오래전부터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는 조총(鳥銃)의 개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1543년에 포르투갈의 모험 상인인 페르낭 멘데스 핀투라는 사람이 일본의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라는 섬에 표착해서 그곳
영주에게 화승총을 선물한 것이 일본 최초의 서양식 총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이 총을 열심히 연구하여 똑같이 복제하는 데에 성공했고,
순식간에 일본 전체에 보급되어서 16세기 중엽이면 일본 전역에 30만 정의 총이 있다고 알려졌다.
일본인들은 이 총의 작은 부분까지
계속 개선해 나갔다. 예컨대 비가 오는 날에도 심지에 불을 붙여서 총을 쏠 수 있도록 해당 부분을 나무 상자로 씌워놓은 것은 작은 요소이지만
일본처럼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는 때로 이런 것들이 아주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후 이런 가이젠의 누적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나가시노(長篠) 전투(1575)에서 1만명의 소총수들이 23렬로 정렬하여 20초마다 1000발을 발사한 것으로 알려진 오다 노부나가의 부대는
당시 세계 최강의 화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2차대전 이후 일본 기업의 약진을 설명할 때에도 가이젠은 빠짐없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최고위 CEO로부터 조립현장의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가이젠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온 것으로 유명한 도요타가 과도한 원가 절약의 아이디어에 매달리다가 최악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역사상 언제나 올바른 것은
없는 모양이다.
1543년에 포르투갈의 모험 상인인 페르낭 멘데스 핀투라는 사람이 일본의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라는 섬에 표착해서 그곳 영주에게 화승총을 선물한 것이 일본 최초의 서양식 총으로 알려져 있다....일본인들은 이 총을 열심히 연구하여 똑같이 복제하는 데에 성공했고, 순식간에 일본 전체에 보급되어서 16세기 중엽이면 일본 전역에 30만 정의 총이 있다고 알려졌다.
'가이젠(改善)'...일본 조총(鳥銃)의 개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그러나 도요타가 과도한 원가 절약의 아이디어에 매달리다가 최악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역사상 언제나 올바른 것은 없는 모양이다.
- 2013년 1월14일 월요일 수산나 -
1543년 포르투갈 상인에게 화승촌을 선물받은 그 시기에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건립.
1544년 4월, 사량진왜란(蛇梁鎭倭亂)....................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부산포(釜山浦) 등의 삼포를 폐지하였으나, 왜인의 간청으로 1512년에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왜인의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였다. 그러나 왜인의 행패가 여전히 계속되던 중, 1544년 왜선 20여 척이 경상남도 통영시 원량면(遠梁面) 진리(鎭里)에 있던
사량진에 침입하여 사람과 말[馬]을 약탈해 갔다. 조정에서는 거듭되는 왜인의 조약위반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가 사량진의 왜변을 계기로 임신조약을
폐기하고 왜인의 조선 왕래를 엄금하였다. [출처]두산세계대백과
1545년 조광조 복관(復官)되고, 현량과 다시 실시. 왕대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섭정.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 4대사화에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가 있다............당시 사림파는 왕위계승 문제에서 대체로 인종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을사사화에서 큰 화를 당했다. 을사사화는 척신인 윤원형이 권신인 이기와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에게 타격을 가한 정치보복이었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 등은 명종의 보위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신책록을 서둘러 28명을 일단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했다. 따라서 명종 초년에는 이들 공신집단이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을사사화의 경우 싸움은 외척간에 벌어졌으나 사림파도 다수 제거되었다. 사화는 대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지는 지배계급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부분적으로 정치론에서 차이가 나거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엇갈려 일어난 사건이었다. 비록 사림파가 화를 당한 것이나 을사사화는 외척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정치적 갈등이었다.[출처]다음백과
영주 소수서원(옛 백운동 서원) 경(敬)자 바위
영주 소수서원(옛 백운동 서원) 취한대
영주 소수서원(옛 백운동 서원) 취한대
영주 소수서원(옛 백운동 서원) 경(敬)자 바위와 취한대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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