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54] 카틴 숲 학살 사건
조선일보/오피니언/주경철 서울대교수 서양근대사
입력 : 2010.04.16 23:12 / 수정 : 2010.04.23 22:21
1940년 봄에 이들 가운데 2만명이 넘는 사람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제일 큰 규모로 학살이 자행된 곳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이라는 숲이었기 때문에 '카틴 숲 학살사건'이 주로 거론되지만, 사실은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학살이 이루어졌다. 당시 카틴 숲에서 살해된 사람만 해도 해군제독 1명, 장군 2명, 대령 24명, 중령 79명, 소령 258명을 비롯해서 폴란드군의 장교 절반이 넘었고 대학교수 20명, 의사 300명, 그리고 100명이 넘는 작가와 저널리스트, 수백 명의 변호사, 엔지니어, 교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 나라의 군의 핵심 멤버들과 지식인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려 한 것이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인 1943년 4월에 한 독일 병사가 거대한 시체 구덩이를 발견하고 나서야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나치 독일의 선전상 괴벨스는 소련을 비난하는 좋은 소재로 카틴 숲 학살 사건을 이용했다. 그러나 소련은 역으로 나치 독일이 학살을 자행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명명백백하게 진실이 밝혀진 것은 1989년에 소련의 역사가들이 스탈린이 학살을 지시하고 직접 서명한 문건을 찾아내서 공개한 이후이다. 드디어 1990년에 소련은 내무인민위원회가 학살을 주도했고 그동안 소련 당국이 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카틴 숲 학살 사건 70주년 추모행사에 참가하러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대통령 내외와 국가안보국장, 참모총장, 육·해·공군 사령관, 중앙은행 총재,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사망했다. 폴란드의 비극은 언제 끝날 것인가.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9월 17일에 소련은 폴란드 영토를 침공했다.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진격해 들어간 적군(赤軍)은 수십만명의 폴란드 군인과 경찰을 포로로 잡았다... 1940년 봄에 이들 가운데 2만명이 넘는 사람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 제일 큰 규모로 학살이 자행된 곳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이라는 숲이었기 때문에 '카틴 숲 학살사건'이 주로 거론된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인 1943년 4월에 한 독일 병사가 거대한 시체 구덩이를 발견하고 나서야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명명백백하게 진실이 밝혀진 것은 1989년에 소련의 역사가들이 스탈린이 학살을 지시하고 직접 서명한 문건을 찾아내서 공개한 이후이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ㅠㅠ...^-^
- 2013년 1월20일 일요일...수산나 -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카틴 숲 학살사건' 즈음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1940년-창씨개명 실시
1940년-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
1942년-조선어학회사건.......................................................
1943년-카이로회담, 한국의 독립 약속
1944년-얄타회담, 한반도문제 언급
조선어학회사건 [朝鮮語學會事件]일제강점기 역사 브리태니커
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들에게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해 검거·투옥한 사건
창립 초기부터 우리말인 한글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려 하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해 〈큰사전〉의 편찬을 시도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 108명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들을 강제해산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회원들은 사전출판을 서둘러 1942년 4월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제는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함흥학생사건을 꾸몄다.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태극기를 그리며 '우리나라 국기'라고 속삭이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취조받게 되었는데, 취조 결과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이 관련되었음을 알았다. 같은 해 9월 5일 정태진이 검거되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짓자백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 1일 이중화·장지영·최현배·이극로·한징·이윤재·이희승·정인승·김윤경·권승욱·이석린 등 핵심인물 11명이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된 뒤,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고문을 당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33명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했다. 이들 중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유예되었으며 기소자는 예심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윤재가 1943년 12월 8일에, 1944년 2월 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이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는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각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 등의 판결을 내렸다. 실형을 받은 이들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풀려났으며,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글학회
창씨개명 사실을 드러내는 호적부...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 광복군 배지와 신분증...배지는 잘~ 안 보이네요...ㅎㅎ...^-^
'조선[주경철 히스토리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56] 화산 폭발/계유정난-이징옥의 난-이시애의 난/북촌 3장 (0) | 2013.01.22 |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55] 카이사르와 해적/낙랑공주와 호동왕자/수원 화성 창룡문 6장 (0) | 2013.01.21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53] '몇 어찌'/지름틀 바위 3장 (0) | 2013.01.19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52] 중국의 운하/탄천 사진 5장 (0) | 2013.01.18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51] 로마의 공중목욕탕/남한산성 유원지 계곡 4장 (0) | 2013.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