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
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보리 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
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남(南)으로 울산,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최 부잣집안채
교동법주의 담장길........ 최 부자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주(家酒)를 빚는 교동법주가 있다.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 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 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
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
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교동법주 안채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은 호(號)가 문파(汶坡)다.호(號)는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한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이
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지금의 최 부잣집 자손들은 옛날 만큼의 부(富)를 가지고 있지않다.최 부잣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걸려있는 한정식집 '요석궁' 의 플랭카드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을 갖게한다
한정식집 " 요석궁 "우측 길 끝 너머가
경주월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