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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성경퀴즈·성경역사

[단상] <제1차 유다전쟁(66~73)과 제2차 유다전쟁(AD132~135)>(2018.5.7.월)/마츄피츄 6장

[단상]<제1차 유다전쟁(66~73)과 제2차 유다전쟁(AD132~135)>

 

유튜브에서 sostv 기독교방송의 <제5부, 이스라엘, 예루살렘, 유대인은 왜 멸망했나>를 들었다.

요즘 내가 그룹성서 마르코반 공부를 하고 있는데...수녀원에서 들었던 입문강의와 비슷한 내용이 있어 솔깃해진다.

요세푸스 역사가에 의하여 기록된 중간사(구약에서 신약까지의 중간)가 흥미로와서 듣기 시작했다.

들은 내용을 적어 보는데, 확실하지 않은 것은 인터넷 검색을 하여 기록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스라엘) 신명기 6:4-9...유대인들의 가훈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 구절

타나크=토라(오경)+선지서+성문서....타나크를 기독교와 유대교가 공유하고 있다.

 

셀로우코스 왕조의 에피파네스 4세가 돼지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등 성전을 모독하므로, 유다 독립군 마카비 전쟁이 일어나서 하스몬 왕조가 성립이 된다. 하스몬 왕조의 미리암 공주와 재혼한 이두매 출신 헤로데 1세가 왕이 되어 성전을 재건한다.(헤로데 1세는 예수님이 탄생하던 해에 베들레헴 주변의 모든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왕이다.) 수루빠벨이 지은 제2성전을 부수지 않고 보존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제3성전을 건축한다. 약 2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전(BC.20~AD.26)은 46년만에 완공된다.

 

'벨릭스(AD48~52)'에 이어 '베스도(AD52~55)' 유대총독이 통치를 하다가 '알비누스'(AD55~57)가 통치를 했다. 그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강도를 풀어주며 보석금을 받았다. 이리하여 강도들은 조폭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후 게시우스 폴로루스(AD57~60) 총독은 전임자보다 더욱 악랄하여 주민들을 알거지로 만들고, 성전 자금을 약탈하여 유다인의 인내심에 한계를 보이게 했다.  

 

 제1차 유다전쟁(66~73)이 발발하였다. 요세푸스의 전쟁기록사에 의하면 베스파시안 장군이 전쟁 중에 네로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가 황제로 등극한다.  AD70년 그의 아들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4개 군단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다. 성전에 불이 붙고 성전은 모두 무너진다. 시카르파의 지도자 엘아자르는 1천명의 저항군과 가족들을 데리고 마사다 요새로 들어가 최후의 항전을 한다. 마사다 요새는 헤로데 1세가 지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AD73년 마사대 요새에 누벽을 만들어 로마군이 공격을 한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로마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확실한 멸망을 인정한 엘리아자르는 "노예가 되느니 자결을 택합시다."고 연설을 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은 아들과 아내, 가족들을 죽이고 최후의 10인을 뽑아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10인은 1인을 뽑아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 1인이 자결하는 순서대로 모두 죽었다고 한다...ㅠㅠ...5명의 아이들과 지하에 숨었던 2명의 여인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ㅠㅠ...(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7권 8:320-388 참조)

 

요세푸스는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역사학자이다. 구약의 말라기에서 신약의 마태복음까지의 약 400년의 중간사를 기록한 학자이다.

저서는 <유다전쟁사 2권/유다고대사 20권/아피온 반박문>이다.

 

제2차 유다전쟁(AD132~135)이 발발했다. 제2차 유대 전쟁 - A.D.132-135년 시몬 바르 코크바가 로마를 상대로 일으킨 유대 독립전쟁. 당시 유대의 최고 랍비였던 아키바는 그를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메시야로 선언했다('바르 코크바'는 '별의 아들'이란 뜻으로 메시야를 의미한다). 그러나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했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선동한 죄로 체포되어 처형당함으로써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대의 이름은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나중에 팔레스타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시한번 철저히 파괴 되었고 그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완전히 바뀌어 철저하게 로마식으로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이 항상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의 진원지가 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유대인예루살렘에서 추방했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더욱더 확산되었고,이후로 거의 2,000년 동안 유대지역은 유대인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될 수 없었다. 

- 2018년 5월7일 월요일...수산나 -

 

바르 코크바의 반란(132년135년)은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인의 저항운동 중의 하나로 제2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배경

70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트라야누스 황제때에는 두 번째 키토스 전쟁이 일어나 로마와 유대인은 대립했다. 로마 제국은 이와 같은 반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2개의 로마군 군단을 이 지역에 상주시켰다. 130년 유대지방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는 두가지의 정책을 실시함으로 유대인의 분노를 샀는데 그 하나는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도시를 예루살렘 바로 북쪽에 건설하여 그의 10군단을 상주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에게 할례를 금지한 것이다. 또한 70년 예루살렘 함락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자리에 로마의 신 유피테르 신전이 지어졌는데 이와 같은 조치들은 유대인들의 반(反)-로마 감정을 고조시켰다.


유대전쟁의 역사적의미


[답변] 유대의 패배로 유대인이 국가를 잃어 버리고 로마제국 각처로 뿔뿔히 훝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가 로마를 상대로 벌인 두 차례의 전쟁.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A.D.66-73년경에,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은 A.D.132-135년경에 일어났다. 두 전쟁 모두 '유대 독립전쟁'으로도 불린다.


1. 제1차 유대 전쟁 - 헤롯 대왕 사후 유대는 친 로마 성향을 가진 헤롯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리아에 파견된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는 유대에서 많은 세금을 수탈하고, 제사장 가문이 아닌 자들을 임명하여 대제사장을 세우며, 성전에 황제 신상을 세우는 등 정치적·종교적으로 유대를 압박하였다.


그러던 중 A.D.66년 가이사랴 회당 앞에서 그리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종교적 분쟁이 발생하여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주둔 로마 부대를 급습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주둔군이 강경 진압하자 폭동은 걷잡을 수 없이 과격해졌고,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를 제압하고 항복하는 자들까지 무참하게 학살하며 유대의 서부와 남부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로마 총독 갈루스가 안디옥에 주둔하던 로마 군과 유대 왕 아그립바 2세의 지원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였다. 또 67년 5월 갈루스의 후임으로 임명된 베스파시아누스가 3개 군단 6만 명의 군사를 투입하여 유대 북쪽 해안가에서부터 남쪽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여 47일간의 공방 끝에 7월 20일 갈릴리 지역을 접수하였다. 그리하여 68년까지 유대 북부 지방이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전쟁은 1년 반 이상 지연되었고, 이 기간 동안 유대는 착실하게 시설을 보강하며 식량을 비축하여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 후 전장에 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네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추대되자 그의 아들 티투스(디도, Titus)가 전선 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아 계속 전투를 수행하였다.


69년 7월 다시 로마의 공격이 재개되어 70년 8월 10일 난공불락의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9월 20일에는 예루살렘 시가지가 모두 로마 군의 손에 장악되었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때 110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전한다. 비록 예루살렘 남서쪽 30㎞ 지점의 헤로디온, 사해 동쪽 마카이로스, 서쪽의 마사다 세 요새에서는 열심당원들이 끝까지 항전했으나 대세를 반전시키지는 못하고 73년 마사다가 함락되면서 1차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다.


2. 제2차 유대 전쟁 - A.D.132-135년 시몬 바르 코크바가 로마를 상대로 일으킨 유대 독립전쟁. 당시 유대의 최고 랍비였던 아키바는 그를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메시야로 선언했다('바르 코크바'는 '별의 아들'이란 뜻으로 메시야를 의미한다). 그러나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했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선동한 죄로 체포되어 처형당함으로써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경과

항쟁의 시작

132년 당시에 유다인으로부터 존경받던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반란이 임박함을 선동하고 시몬 바르 코크바를 대장으로 한,로마제국에 대항한 항쟁이 일어났다. 바르 코크바는 아람어로 "별의 아들"을 뜻하는데 이는 유대교 경전인 구약 민수기 24:17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중에서 별이 나올 것이며...라는 구절과 맞물려서 대다수 유대인에게는 코크바가 진정한 메시아라고 여겨졌고 랍비 아키바 벤 요셉는 이를 확인해 주었다.

코크바의 항쟁은 급속하게 유다 전역으로 퍼졌으며 급기야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하고 코크바는 이스라엘의 "나시"ㅡ왕이나 통치자 라는 뜻의 '나시'ㅡ를 참칭하면서 "이스라엘 해방 제1년"이라고 새겨진 동전을 발행했고 아키바 벤 요셉은 유대교 부흥에 나섰다.

진압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브리타니아에 있는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지휘관으로하여 다뉴브 근처의 군단을 돌려 진압군으로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다. 세베루스는 유다북부에서부터 차례차례로 공격에 성공하고 134년 대대적인 공세를 펴서 유대인들의 항쟁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바르 코크바는 베르타에서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자결하고 136년 그 잔당은 전멸했다.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연구자들[출처 필요]은 하드리아누스가 원로원에 의례적인 승전보고만 하고 로마제국의 권위를 과시하는 개선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3년에 걸친 전쟁으로 로마군의 손실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결과 및 영향

무자비한 보복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의 거점 요새 50개가 함락되었고 985여개의 마을이 폐허가 되었으며 사망자는 약 58만 명이라고 한다. 또한 수많은 유대인이 노예로 팔리고 강제로 다른 이역으로 이주해야했다.

추방

이 전쟁의 결과로 유대의 이름은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나중에 팔레스타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시한번 철저히 파괴 되었고 그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완전히 바뀌어 철저하게 로마식으로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이 항상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의 진원지가 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유대인예루살렘에서 추방했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더욱더 확산되었고,이후로 거의 2,000년 동안 유대지역은 유대인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될 수 없었다. 

 

 

마츄피츄 1

 

마츄피츄 2

 

마츄피츄 3

 

마츄피츄 4

 

마츄피츄 5

 

마츄피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