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일. 2019년 3월 3일.
루가 6, 39-45.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초기 그리스도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초기교회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교회공동체 안에 살아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들을 회상하면서,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들도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회상하면서,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소경”,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 악한 사람” 등은 그 시대 그리스도신앙인들을 박해하던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는 이스라엘 안에 바리사이파 뿐 아니라, 엣쎄네파와 혁명당원이라 불리던 다른 파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원 후 66년, 혁명당원들이 로마 정권에 항거하는 무력 봉기를 하자, 엣쎄네파도 그 전투에 가담해서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이 두 파벌은 로마제국 군인들에 의하여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기원 후 70년부터는 바리사이파가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였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신앙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사도행전」이 전하는 바를 보면, 바울로 사도도 그리스도신앙으로 전향하기 전, 바리사이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열성적이었습니다(사도 8,1-3 참조).
바리사이는 율법 준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그 활동 초기부터 단죄하고 나선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마르 복음서」(3,1-6)에 따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유대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병자 하나를 고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바리사이들의 반응을「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도당들과 함께 모의하여 예수를 없애버리기로 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바리사이는 사람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체험이 있으면서 발생한 이스라엘의 율법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고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행동 방식을 요약한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율법조항에만 필사적으로 매달린 소경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바리사이들은 또한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를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지만, 자기 자신은 율법을 준수하는 데에 소홀하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을 위선자라 부릅니다. 그것은 그들의 악의(惡意)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 생활은 법조항(法條項)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법으로 규제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법규정이 있어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인간 상황(狀況)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과 같이 인간의 은밀한 마음과 관계가 있는 분야에서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자기 자신은 그것을 다 지키지 않는 모순을 범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와 ‘티’의 비유로써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는 변명을 쉽게 발견하고 타인을 위해 인색한 바리사이들의 실천을 나무랍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바리사이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이며,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율법에만 집착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려서 자비로우신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인간의 무자비함과 인색함이라는 나쁜 열매만 맺습니다. 오늘 복음은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고 말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도 선한 행위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닌 것에 집착하면, 무자비하고 인색하고 악한 사람이 됩니다. 재물(財物)에 집착하면, 인간이 무자비하고 인색하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매일 체험하는 일입니다.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면, 인간이 무자비하고 인색하게 된다는 사실도 우리는 정치판을 보면서 흔히 실감하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는 종교를 동기로 무자비하고 인색한 사람이 된 경우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또 인색하게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입으로는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의 무자비함과 인색함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인간은 자비로워지고 용서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자비도 용서도 인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지 않습니다. 자비와 용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인간이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자비와 용서의 실천을 예수님 안에서 배웁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도 스승만큼밖에는 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자비와 용서의 실천이 충만히 있었고, 신앙인은 그 실천을 배워서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넘어서 다른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의 실천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자비와 용서를 배우는 대신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무자비함과 인색함의 독기(毒氣)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기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 같이 위협하는 거리의 선교, 하느님의 이름으로 강요된 각종 순종, 하느님의 부르심을 빙자한 인력 착취 현상,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재혼(再婚)한 이들에 대해 어떤 제약을 가하는 교회법조항 등, 현재 교회의 바리사이적 실천은 있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입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는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여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일반위성지... 성모칠고 안내문
스타밧 마떼르로 대표되는 고통의 성모신심은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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