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2019년 5월 26일.
요한 14, 23-29.
그리스도신앙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달으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시대 유대교 실세(實勢)로부터 단죄(斷罪)되고 십자가에 처형(處刑)되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교회가 출현(出現)한 사실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죽은 예수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이 그들 설교의 중심이었고, 교회출현의 핵심(核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믿음 때문에 유대교 회당(會堂)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로마정권은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신앙인의 관계에 대해서 명상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초기신앙인들이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으며 기록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말씀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이 보여주신 삶을 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을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기를”(마르 14,36)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이렇게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는 하느님 아버지도 살아 계십니다. “내가 떠나갔다가 너희에게 다시 온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모셨던 예수님이 돌아와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성령은...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초기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回想)하고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며 하는 말입니다. 신앙인들 안에 일어난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초기신앙공동체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움이 시작하는 곳에 성령을 봅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성령이 하신 일이었고, 예수님이 공생활(公生活)을 시작하실 때도 영(靈)의 인도를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발족한 것도 성령강림과 더불어 된 일로 초기그리스도공동체는 말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삶이라는 새로움이 그리스도인 안에 발생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반신불수(半身不隨) 환자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새로움이었습니다. 인류역사는 약자(弱者)를 소외시키고 죄인을 벌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죄인들과 세리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그것은 새로움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난은 가난한 자 스스로가 참아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죄인과 세리는 하느님이 버린 사람들이라 경건한 사람은 그들과 어울리지 말아야한다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안식일 계명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는 않았다.”(마르 2,27)고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새로움이었습니다. 통치자의 법(法)을 지키고 그의 땅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통치자의 법이 있듯이 하느님의 법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율법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이 실천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실천을 그 시대 방식으로 요약하여 표현한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 그것은 새로움이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유대교 회당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나를 사람들 가운데 세워 놓고,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마르 3,4). 유대교 율법은 안식일에 모든 노동을 금했습니다. 병고치는 일도 노동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본시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라, 인간이 먹고사는 일에서 물러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회당(會堂)에 모인 이들이 잠자코 있자, 예수님은 “노기를 띠고 둘러보신 다음 그들 마음이 완고함을 슬퍼하시며”,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새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의 관례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람이 중요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과 전통과 제사의례 등 사람이 만든 것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 병든 이들을 위해서는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빙자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을 못하게 하고, 간음한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사칩니다. 그들에게는 람이 만든 법과 그 법을 만든 이들의 권위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 들은 그것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켰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희생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하는 실천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바로 그 새로움이었습니다. 그 새로움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믿는 초기그리스도신앙공동체입니다. 사람이 소중하게 보이는 새로움입니다. 전통(傳統)도 제도(制度)도, 그 새로움에 비추어 비판되고 개혁(改革)되어야 한다고 초기그리스도인들은 믿었습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전통도 제도도 새롭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전통과 제도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살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졌는데도 같은 전통과 제도를 문자대로 고집하면, 전통과 제도는 삶의 숨결을 잃고, 사람을 짓누르고, 죽이는 우상(偶像)이 되고 맙니다. 새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은 과거 사람들이 살던 대로 살자는 말입니다. 새로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역사 안에 살아 계시면서 새로움을 만드시는 하느님의 영(靈)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과거의 제도를 빙자하여 사람이 높아지고, 사람이 대우받는 길이 아닙니다. 성령은 안수(按手)도 아니고, 이상한 언어도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새로움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그 시대 방식으로 표현하고 실천하게 하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그 숨결은 사람을 살리는 노력들 안에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람을 살리는 섬김의 모습들 안에 살아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천진암 성령 강림 대 피정 1
천진암 성령 강림 대 피정 2...십자가의 길 제14처
천진암 성령 강림 대 피정 3
천진암 성령 강림 대 피정 4...성모상
천진암 성령 강림 대 피정 5
천진암 성령 강림 대 피정 6
천진암 성령 강림 대 피정 7
천진암 성령 강림 대 피정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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