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 2019년 6월 2일.
루가 24, 46-53, 사도 1, 1-11.
부활 대축일이 지나고 40일이 지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昇天)을 기념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곧 승천이기도 합니다.「마르코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고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16,19)고만 말합니다.「마태오복음서」는「마르코복음서」를 옮겨 적으면서도 이 부분을 삭제하고 승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루가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고 베타니아 근처로 그들을 데리고 나가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을 들었습니다.「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더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자주 나타나셔서 사도들을 격려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루가복음서」와「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이 집필하였습니다. 그 저자는「루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사도행전」에서는 그분의 뒤를 이어 나타난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두 문서가 모두 같은 저자의 기록인데도 승천에 대한 이야기는 각각 달리 기록되었습니다. 「루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부활 당일 승천하셨고, 그 장소는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성전에서 날마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러나「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고 40일이 지난 다음에 승천하십니다. 그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에 싸여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사실에 대해 다른 복음서들이 보도하지 않는 것은 부활과 승천이 서로 구별되는 별 개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을 굳이 분리하여, 두 개의 사건으로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부활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 죽음의 나라, 이렇게 세 층(層)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돌아온 것이고, 승천은 땅에서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로 다시 올라간 것입니다.「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의 기간(期間)을 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복음 선포에 나서기까지는 상당한 시일(時日)이 걸렸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루가복음서」와「사도행전」을 같은 저자(著者)가 집필(執筆)하였는데 두 문서에 승천을 서로 달리 기록한 것은 승천에 대한 사실(事實) 보도(報道)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으시고, 당신의 초능력으로 제자들의 활동을 돕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떠나가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당신에 대한 기억이고, 성령이 곧 오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이 경이(驚異)로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대해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성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배워 그분의 제자로 살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예수님의 초능력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경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초능력을 과시하며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능력을 과시하면, 사람들은 그 초능력에 매료되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초능력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자유로운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마르 8,11)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믿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신 나머지 악의(惡意)에 찬 유대인들의 자유 행사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자유를 무시하며 그를 압도하여 자기의 뜻을 관철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의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호응하여 사랑할 것을 호소하며 기다립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처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떠나가셨다는 오늘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에는 어느 누구도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위(權威)나 권한(權限)을 주장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떠나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당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남기고 당신은 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이 일하셔서 나타나는 제자들의 실천 되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제자들의 섬김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정체성(正體性)은 입니다. 성령이 살아계시면, 신앙인 안에 섬김의 실천이 보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하늘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보이는 곳, 어디에나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과시(誇示)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자기의 실수와 실패의 아픔, 곧 죽음을 넘어 하늘을 우러러는 마음으로 새 출발하는 사람들의 삶 안에 승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기억 안에만, 혹은 전례가 거행되는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넓은 세상 어디에나 그분이 가르치신 섬김을 실천하고, 그 섬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계십니다. 억울함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이웃을 섬기는 데에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 안에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 갈릴레아 혹은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 아래 어디에나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 희생적인 섬김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으로 살아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어농성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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