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굿뉴스 강론

[교황님 미사 강론]범 아마존 지역을 위한 시노드 폐막 미사[2019.10.27.주일] /남양주 물의정원 사진반 출사 5장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

[교황님 강론 날짜]20191027일 주일[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집회서 35,15-17.20-22

화답송 : 시편 34(33),2-3.17-18.19 23(◎ 7)

2독서 : 티모테오 2 4,6-8.16-18

복음 : 루카 복음 18,9-14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1219&gomonth=2019-10-27&missatype=DA

-------------------------------------------------



범 아마존 지역을 위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시노드 폐막 미사

 

PAPAL CHAPEL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바티칸 대성전

연중 제30주일 2019 10 27

 

오늘 하느님의 말씀이 세 명의 인물을 통해 우리가 기도하도록 도와 줍니다. 예수님의 비유 안에서 바리사이와 세리, 한편 제1독서는 가난한 이의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1. 바리사이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훌륭한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기도는 감사의 기도, 찬미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우리는 그가 감사 드리는 이유를 봅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도 같지 않으니”(루카 복음 18,11). 그는 또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당시에 1년에 한번 의무인데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합니다. 십일조의 징수가 가장 중요한 소출에 관해서만 규정하고 있지만 그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신명기 14,22 참조). 요컨대 그는 자신이 가능한 최고의 등급으로 특별한 계명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장 큰 계명을 잊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22, 36-40 참조). 계명을 지키는 자기 자신의 능력과 자기 자신의 장점과 덕목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비극은 그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가장 위대한 것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토 1 13 참조). 사랑이 없으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그는 결국 기도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찬미합니다. 사실 그는 하느님께 아무것도 간청하지 않습니다. 그가 가난하고 느끼지 않고 또는 빚졌다고 느끼지 않고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무언가를 빚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성전에 서 있지만 그러나 그는 다른 신을 경배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많은 명성 있는단체들,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이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그의 이웃을 같이 잊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는 이웃을 멸시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에게 그의 이웃은 가치 없고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이 더 낫다고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는 문자 그대로 그 밖의 사람들, 남은 사람들”(loipoi, 루카 복음 18:11)이라고 부릅니다. , 그들은 찌꺼기들입니다, 그들은 거리를 두어야 하는 나머지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이 인생과 역사에서 계속 다시 일어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봅니까! 세리를 대하는 바리사이처럼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거부 당한다고 느끼게 만들면서 거리를 더 두도록 벽을 올립니까. 또는 그들을 뒷전으로 여기거나 덜 가치있다고 여기면서 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경멸하고 그들의 역사를 지우고 그들의 땅을 점령하고 그들의 소유물을 빼앗습니다. 얼마나 자주 억압과 착취로 변하는 단정적인 거만함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지요! 우리는 창조물에 대한 착취와 사람들과 아마존 거주민들에 대한 착취와, 인신 매매와 인간의 거래라는 착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시노드 동안에도 이것을 느꼈습니다. 과거의 잘못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약탈과 우리 형제 자매들 우리 자매인 지구에게 상처 주는 것을 막기에 충분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마존 지역의 상처입은 얼굴에서 그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 의식과 기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경배가 위선적으로 계속 이루어 집니다. – 많은 이들이 가톨릭 신자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고 인간이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언제나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되는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경배를 잊으면서. 기도하고 주일에 미사에 가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아라는 이 종교에 굴복합니다. 우리 자신을 수련합시다. 우리도 혹시 그저 말이라도 누군가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 치워둘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 봅시다. 우리 자신을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는 은총을, 우리가 훌륭하다고 믿지 않는 은총을, 냉소적이거나 경멸하게 되지 않는 은총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예수님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험담하거나 불평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업신여기는 나를 고쳐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이러한 일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미사에서 하느님의 섭리로 아마존 원주민들 뿐만 아니라 우리 선진 사회의 가장 가난한 이들 라쉐(L’Arche)[1]의 장애가 있는 형제 자매들도 우리를 동행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앞줄에 있습니다.

 

2. 다른 하나의 기도를 살펴 봅시다. 세리의 기도는 장점에서 시작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점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부유함에서 시작하지 않고 자신의 가난함에서 시작합니다. 그의 가난함은 경제적인 가난함이 아닙니다 - 세리들은 부유했고 그들 국민들의 희생으로 부당하게 돈을 벌고는 했습니다 - 그러나 그는 인생의 가난함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착취했던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가난함을 인정했고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 단지 일곱 마디의 말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함의 표현을 들으셨습니다. 사실 바리사이가 꼿꼿이 서있는 동안(루카 복음 18,11)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작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느님께서 정말로 위대하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슴을 칩니다.(루카 복음 18, 13) 왜냐하면 그 가슴은 그의 마음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는 마음에서 곧바로 나옵니다. 그 마음은 투명합니다. 그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하느님 앞에 둡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눈앞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를 바라보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환상 없이, 정당화의 구실 없이. 종종 자기 정당화로 가득 찬 우리의 후회는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있습니다. 후회라기 보다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악으로부터 어둠과 거짓말-이것들이 우리의 자기 정당화입니다- 이 나오고 하느님으로부터 빛과 진리, 투명한 내 마음이 나옵니다. 그것은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랑하는 시노드의 일원들에게 매우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몇 주일 동안 진심으로 진실하고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고 우리의 노력과 희망을 하느님과 우리 형제 자매들 앞에 둘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세리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재발견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는 구원이 필요하다는 확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경배의 첫 걸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궁핍함을 아는 사람들에게 자비하신 분입니다. 반면 모든 영적인 오류의 뿌리는 옛 수도자들이 가르쳐준 대로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유일하게 의로우신 한 분, 하느님을 냉대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자세가 너무나 중요해서 예수님께서 비유 안에서 그 시대의 가장 경건하고 독실한 인물인 바리사이와 전형적인 공공의 죄인인 세리를 나란히 놓아 보여 주시면서 흔치 않은 비교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심판은 반대입니다. 훌륭하지만 잘난체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완전한 실패자이지만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에 의해 높아집니다. 우리가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 안에 세리와 바리사이 둘 다를 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조금은 세리이고 우리는 잘난체하고 우리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고 자기 정당화 예술의 달인들이기 때문에 조금은 바리사이입니다. 이것이 종종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일할지 모릅니다. 이 속임수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지 않습니다. 내면적으로 가난하여 자비가 필요한 우리 자신을 체험하는 은총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좋고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고 하느님의 구원은 오로지 내면적인 가난함의 환경 속에서만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3. 우리는 이제 제1독서에 나오는 겸손한 이의 기도로 갑니다. 집회서에서 말하기를 이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35,21) 올라 갑니다. 자신들이 의롭다고 잘난체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에고이즘이라는 중력의 힘에 부수어져서 땅에 남아 있는데 겸손한 이의 기도는 하느님께 곧장 올라갑니다.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은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의 문지기들을 봅니다. 그 신앙 감각이 바리사이의 말 안에서 실종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열기도 하고 열지 않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삶에서 지배자들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 앞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유함을 하느님께만 둡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적 예언의 살아 있는 상징들입니다.

 

이번 시노드에서 우리는 포식 동물 같은 발전 모델로 위협 받는 가난한 이들 삶의 위태로움에 대해 묵상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물로서 팔을 벌려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리고 착취의 자원으로서가 아니라 지켜야 하는 집으로서 창조된 세상을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다룬다면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지혜서에서 다시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집회서 35,16). 교회 안에서조차 얼마나 자주 가난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왔고 그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어쩌면 놀림 받거나 묵살되어 왔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은총을 위해 기도합시다. 이것이 교회의 희망의 외침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은 교회의 희망의 외침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외침을 우리 자신의 외침으로 만들 때 우리는 확신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갈 것입니다 




남양주 물의정원 사진반 출사 1


남양주 물의정원 사진반 출사 2


남양주 물의정원 사진반 출사 3


남양주 물의정원 사진반 출사 4


남양주 물의정원 사진반 출사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