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일. 2019년 12월 1일.
마태 24, 37-44; 이사 2, 1-5.
오늘 복음은 시작하면서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상기시켰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상에 골몰하다가 다가오는 불행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하면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은 초기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빌며 삽니다.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며,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자비롭고 선한 실천을 하는 사람은 그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원천(源泉)과 원동력(原動力)으로 영입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준수 여하에 따라 상도 주고 벌도 주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을 영입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우리가 퇴치해야 하는 고통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고통이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은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그대들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 13).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이사야서]는 하느님은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서,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의 길을 걷는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은 자기 한 사람 먹고 마시는 일상(日常)에 묻혀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아 그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자녀의 삶이 발생합니다. 그 삶에서는 나와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였던 내 이웃이 내가 돌보아주고 사랑해야 하는 형제자매로 보입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새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가꾸고, 내가 획득한 자격증을 과시하면서, 내가 가진 재물에 의존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이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또 “준비하고 있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게 살라 는 말입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기심(利己心)과 허세(虛勢)에서 한발 물러서면, 하느님의 진리가 보입니다. 그 진리는 나와 내 주변을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으로 보게 해줍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살라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여 은혜로움이 주변으로 흐르게 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깨어서 준비하고 실천해야 진리입니다.
우리의 시야(視野)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시야 안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우리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우리 자신이 유리할 것만 찾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소중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것을 절대시합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우리의 편안함을 위협하는 것을 우리는 단호히 거부하고 배격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만 보고 사는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듯이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주님의 시야 안에서 주변을 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웃 앞에서 우리의 몸짓도 선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는 ‘먹고 마시는’ 일이 보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영입하고, 그분의 시야 안에서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 시야 안에 우리의 생명을 위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시야에서 진리를 배우고 실천한 사람과 자기 한 사람 먹고 마시는 일에 골몰한 사람의 운명이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서” 하느님의 생명이 열어주는 새로움을 찾아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높이, 멀리 계시고, 우리가 정성을 바쳐 섬겨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은혜로움 안에 그 원천으로 살아계십니다. 은혜로움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람이 그분의 진리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 32). 성령은 그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도록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삶이라고 구약성서 [욥기](14, 2)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쉴 때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우리 일상의 세상살이가 그 덧없음을 넘어 하느님의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도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시야(視野) 안에서 은혜로움을 찾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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