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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교황강론

[교황님 미사 강론]파스카 성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2020. 4.11. 토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0.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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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20411일 토요일[파스카 성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창세기 1,1―2,2

화답송 : 시편 104(103),1-2.5-6.10 12.13-14.24 35(◎ 30 참조)

2독서 : 창세기 22,1-18

화답송 : 시편 16(15),5 8.9-10.11(◎ 1)

3독서 : 탈출기 14,15―15,1

화답송 : 탈출 15,1ㄷㄹㅁ-2.3-4.5-6.17-18(◎ 1ㄷㄹ)

4독서 : 이사야서 54,5-14

화답송 : 시편 30(29),2 4.5-6.11-12ㄱ과 13(◎ 2ㄱㄴ 참조)

5독서 : 이사야서 55,1-11

화답송 : 이사 12,2-3.4ㄴㄷㄹ.5-6(◎ 3)

6독서 : 바룩서 3,9-15.32―4,4

화답송 : 시편 19(18),8.9.10.11(◎ 요한 6,68)

7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36,16-17.18-28

화답송 : 시편 42(41),3.5ㄱㄴㄷㄹ; 43(42),3.4(◎ 4241,2)

서간 : 로마 6,3-11

화답송 : 시편 118(117),1-2.16-17.22-23

복음 : 마태오 복음 28,1-10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1675&gomonth=2020-04-11&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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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성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당

2020 4 11일 성토요일

 

 

안식일이 지나고”(마태오 복음 28,1), 여자들은 무덤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이 성야의 복음이 시작되었던 모습입니다. 안식일과 함께. 그날이 우리가 금요일의 십자가에서 부활 주일의 알렐루야로 지나가기를 열렬히 기다리는 동안 소홀히 하기 쉬운 파스카 성삼일 중 하루입니다. 그러나 올해 우리는 성토요일의 위대한 침묵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 여자들의 자리에 있는 우리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눈 앞에 고통의 드라마,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예상치 못한 비극의 드라마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보았고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고통은 두려움과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스승님과 같은 운명으로 고통을 받을까요? 그렇게 또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다시 세워져야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 갑자기 끝나버린 희망. 그들에게 우리에게 그것은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 여자들은 자신들이 무력해 지도록 놓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후회의 암울함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으로 갇혀있거나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박하지만 특별한 어떤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유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 마음의 어둠 속에서 그들은 자비의 불꽃을 밝힙니다. 우리의 성모님께서 그 토요일을, 기도와 희망 안에서 성모님께 봉헌될 그 날을 지내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께 신뢰를 두고 슬픔에 응답하셨습니다. 이 여자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안식일의 밤에 그 주의 첫 날 새벽, 역사를 바꿀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속에 묻힌 씨앗처럼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막 꽃피우시려고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기도와 사랑으로 그 희망을 꽃피우도록 돕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슬픈 날들 동안 그 여자들이 했던 일,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해 왔고 여전히 하고 있습니까! 보살핌의 작은 몸짓들로, 애정과 기도로.

 

새벽에 여자들이 무덤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천사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오 복음 28, 5-6). 그들은 무덤 앞에 서 있을 때조차도 생명의 말씀을 듣습니다그리고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 모든 희망을 주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메시지를 확인시켜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 복음 28, 10).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에 굴복하지 마라. 즉 이것이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야기되어집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바로 오늘 밤에 우리에게 다시 반복해서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획득합니다. , 희망하는 권리.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새롭고 살아 있는 희망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등을 토닥거려주는 위로나 공허한 미소로 이야기 되는 공허한 격려의 말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몇 주 동안 우리는 우리 인정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면서 우리 마음 안에서 격려의 말들이 일어 나도록 하면서 계속해서 모든 것이 잘 될거야라고 되풀이하며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두려움이 커질수록 가장 대범한 희망조차도 흩어져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망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덤에서조차 생명을 가져오시므로 모든 것을 선으로 작용하게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심으십니다.

 

무덤은 들어가는 그 누구도 결코 떠나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나오셨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가져다 주시려고 돌이 놓여져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시려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무덤의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 치우셨고 또한 우리 마음의 돌도 치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념에 굴복하지 맙시다. 즉 희망 앞에 돌을 놓지 맙시다. 우리는 희망할 수 있고 희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성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찾아 오셨고 그리고 우리의 고통과 고뇌와 죽음의 상황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의 빛은 무덤의 어둠을 쫓아 버리셨습니다. 오늘 그분께서 저 빛이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도 꿰뚫어 관통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당신이 당신의 마음 속에 희망을 매장시켜 버렸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더 위대하십니다. 어둠과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강해지십시오. 하느님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기. 이것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단어입니다. 오로지 꼭 한번 다른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그 단어를 말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코 복음 10,49). 우리를 우리의 궁핍함에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은 부활하신 한 분, 그분이십니다. 만약 당신의 여정에서 당신이 약하고 부서지기 쉽다고 느끼거나 넘어진다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도우심의 손을 뻗어 잡으시며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당신은 (만초니의 소설 속에 나오는) 돈 압본디오가 말했던 것처럼 말할지도 모릅니다. “용기는 네가 너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I Promessi Sposi, XXV). 사실입니다, 당신은 용기를 당신 자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해야 하는 모든 일은 당신의 마음을 기도 안에서 여는 것이고 예수님의 빛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당신 마음의 입구에 놓여져 있는 저 돌을 옆으로 굴려 놓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로지 이렇게 그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저에게 오소서. 그리고 저에게도 이렇게 말씀해 주소서. 용기를 내어라!” 당신과 함께라면 주님, 우리는 시험 받겠지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슬픔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희망 안에서 강해질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들의 밤의 어둠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당신과 함께라면 십자가가 부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불확실성 가운데에 확실하게 계시고 우리의 침묵 안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이시고 그 무엇도 당신이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절 메시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두 번째 부분, 파견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오 복음 28,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마태오 복음 28,7.) 천사가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십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가십니다. 삶에서 그리고 죽음에서 그분께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 가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그분께서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즉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일상 생활, 가족 그리고 일에 대한 생각들을 불러 일으키는 장소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곳에, 우리의 일상 생활에 희망을 전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는 또한 기억의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그들이 처음 부름 받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 받았고 부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갈릴래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갈릴래아에서 우리가 태어났고 그곳에서 사랑으로부터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초대 덕분에 새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기억하게 하면서 우리는 그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그들이 있었던 곳에서 가장 먼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단지 지리적으로만이 아닙니다. 갈릴래아는 또한 거룩한 도성의 신성함에서 가장 멀리 있는 장소였습니다. 갈릴래아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오 복음 4,15)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곳에 보내시고 그들에게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청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희망의 메시지는 우리의 신성한 곳들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이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심시켜 주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생명의 말씀”(요한의 첫째 서간 1,1.)을 접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위로를 주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짐을 지고 그리고 용기를 주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즉 죽음의 때에 생명의 메신저가 된다는 것! 모든 갈릴래아에서, 우리 모두가 속해 있고 우리의 일부분인 인류 가족의 모든 지역에서 우리 모두가 형제 자매이므로 우리가 생명의 노래를 전하게 하소서! 죽음의 울부짖음을 멈춥시다, 더 이상 전쟁은 안됩니다! 우리가 무기의 생산과 거래를 멈추게 하소서, 우리는 총이 아니라 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낙태와 무고한 생명들을 죽이는 것을 그만둡시다.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주 기본적인 필수품들도 갖지 못한 빈 손들을 채우는데 열리도록 하여 주소서.

 

그 여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습니다(마태오 복음 28,9.).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무덤에 들어가시고 나오시기까지 그토록 멀리 다니시던 발, 그 여자들은 죽음을 짓밟으신 그 발을 붙잡고 희망의 길을 열었습니다. 오늘 희망을 찾는 순례자로서 저희는 부활하신 예수님 당신께 매달립니다. 저희는 죽음에 우리 등을 돌리고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 엽니다. 당신께서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최종 번역 날짜와 시간 2020. 4. 16.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