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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0년 8월 7일 금요일[(녹) 연중 제18주간 금요일]/니콜라 프로망의 모세에게 나타난 성모 마리아 성화 및 해설 1점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451번 주께 나아가리다 영성체 성가  501번 받으소서 우리 마음
예물준비 성가  220번 생활한 제물 영성체 성가  178번 성체 앞에
예물준비 성가  215번 영원하신 성부 영성체 성가  163번 생명의 성체여
파견 성가  209번 사랑하올 예수 성심이여

입당송

시편 70(69),2.6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 나훔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3; 3,1-3.6-7
1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3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3,1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2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3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
6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7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 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신명 32,35ㄷㄹ과 36ㄷㄹ.39ㄱㄴㄷㄹ.41(◎ 39ㄷ)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 그들에게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재난이 삽시간에 닥친다. 주님은 당신 백성의 권리를 감싸 주시며, 당신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리라. ◎
○ 이제 너희는 보아라! 나다. 내가 바로 그다.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나는 치기도 하고 고치기도 한다. ◎
○ 번뜩이는 칼을 갈아 날을 세우고, 내 손으로 재판을 주관할 때,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원수들에게 되갚으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5,10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적인 제물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의 온 삶이 주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지혜 16,20 참조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

<또는>

요한 6,3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양식으로 새로운 힘을 주시니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나훔’ 예언자의 이름의 의미는 ‘위로받은 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역할은 이름의 뜻과 달리 ‘위로를 주는 이’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어두운 시대에, 강자의 희생자가 되어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주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 아시리아의 패망, 유다를 향한 위로, 그리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멸망에 대한 묘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지만, 불경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보복하시는 분”(나훔 1,2)이심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미래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안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화답송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처럼 하느님께서는 희생당하는 당신 백성을 대신하여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원수들에게 되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서 볼 수 있듯 ‘의로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주시는’(마태 5,10 참조) 위로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됨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신에 대한 배척, 수난 그리고 죽음을 앞두시고 적대자들에 대한 보복은 하느님께 맡기시고,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께서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이의 본보기가 되십니다.

따라서 불경한 자들에게는 보복을, 의로운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히 드러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셈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니콜라 프로망 <모세에게 나타난 성모 마리아>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8.7.“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 속에는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면” 이라는 말 속에 있는 ‘누군가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제자 됨을 말해줍니다. 앞서 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가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따라 당신이 걸어야 하는 수난의 길을 따를 자를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합니다.

 

오늘은 강론을 대신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에 따른 기도를 드려봅니다.

 

주님!

제게는 오늘도 걸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는 세 가지 길입니다.

 곧 그 길은 제 자신을 버려야만 갈 수 있는 길이요,

제 십자가를 지고서야만 갈 수 있는 길이요,

스승을 따라가야만 갈 수 있고 형제들과 함께 가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단지 제 욕심을 비우거나 제 뜻을 버리거나 제 자신을 포기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일이요,

 제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 자신을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니까요.

 

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원하지 않는 고통을 지거나 범한 죄를 지거나 저 자신을 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죄와 허약함을 품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께 대한 희망을 지는 일일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 말입니다.

저를 짊어지신 당신을 희망하는 일, 그것 말입니다.

 바로 당신이 저를 희망하니까요.

저는 당신의 소중한 자녀이니까요.

 

또한, ‘스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당신 없이는 갈 수 없는 길, 사랑이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당신과 함께가 아니라면, 아예 가지 못할 길이요,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제 몸에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는 길, 그것은 애시 당초 당신으로 하여 가는 길이니까요.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이니까요.

 

주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거나 회피 하지도 말게 하소서!

제거하거나 없애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해결하거나 해소하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극복하고 견뎌 내거나 참아내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초월하고 뛰어넘으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적당히 타협하고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이 가슴에 끌어안게 하소서!

사랑으로 끌어안게 하소서! 그 속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은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으니까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시니까요.

 

주님! 이제 감히 고백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저도 원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당신을 따르게 하소서아멘. 

 

 

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구원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화두같은 말마디는 누구나의 관심 주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바로 좋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제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벌써 출간된지 13년이 지났습니다. 우선 제목을 보고 읽는 책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바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잘 살 때 참으로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바로 오늘 복음의 소제목이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막연한 질문이 더 구체화됩니다.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참으로 생명에 이르는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은 결코 ‘나를 사랑하라’, ‘나를 믿으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가 복음(9,23) 말씀대로 ‘날마다’를 집어 넣었습니다. 몇날이 아니라 평생 죽을 때까지 날마다 십자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저 또한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십자가의 길을 가듯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강론을 씁니다. ‘혼자alone’가 아닌 ‘더불어together’ 걷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 주님을 따르지만 양상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환경도, 자기 버림도, 십자가도 다 다릅니다. 똑같은 인생, 똑같은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우열이나 호오의 비교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고유의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는 다 다릅니다.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끝까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제 페이스대로 평생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이런 십자가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회개의 여정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십자가의 여정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 이 십자가의 여정에 항구할 때 날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여정은 바로 예닮의 여정, 구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날로 쉬워져가는, 가벼워져가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날로 힘들어지고 무거워지는 십자가의 길, 바로 이것이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심신心身의 노쇠老衰와 더불어 병마病魔와의 싸움 때문입니다. 하여 하루하루 깨어 겸손히 기도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가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참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십자가의 삶은 선물이 아니라 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여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여러분 대신에 반드시 형제자매들의 세례명을 써 줍니다. 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갈 때 십자가의 짐은 선물로 변합니다. 참으로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자발적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방향을 잃어 방황이요 표류요 ‘일상의 늪’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은 앞서 가시는 예수님 ‘방향’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헛것들인 우상이나 이념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공부, 하느님 공부는 우리의 평생공부에 속합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결같이 '넘어지면 다시 곧장 일어나' 주님을 따를 때 영적탄력도 유지되며 죄악의 유혹이나 헛된 환상에 빠지지 않고 내적평화와 안정 중에 살 수 있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도 십자가의 여정뿐입니다. 참 기쁨과 행복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오늘 나훔서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나훔이란 이름의 어원도 반갑고 고맙습니다.

 

나훔은 ‘위로받은 이’를 뜻합니다. 위로를 받았기에 다른 이들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훔과 어근이 같은 유명한 이름으로는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를 뜻하는 느헤미야가 있습니다. 참으로 나훔은 예수님처럼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힘으로 지탱해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위안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 준 예언자였습니다. 오늘 나훔서의 서두 말씀은 그대로 이 미사중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러 오시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나훔2,1)

 

이어 마지막까지는 죄악이 만연했던 니네베의 멸망에 관한 처절한 내용입니다. 이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십자가의 길에 항구하고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십자가의 여정은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함께 하는 도반들과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은 힘겹게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웃 형제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위로하면서 함께 가도록 하십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갈 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등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끝까지 완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십니다.

 

사실 고백성사를 주며 상담을 하다보면 형제자매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귀기울여 잘 듣는 것과 격려와 위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기에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시길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1,3-4)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어 함께 하는 도반들과 위로와 격려를 나누며 우리 모두 ‘더불어together’ 십자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마음을 넓힌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좀 극단적인 것 같아서, ‘더 온화한 표현은 없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서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나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을 비워 자아를 죽이다시피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아가 우리를 ‘모기’, 혹은 요즘 유행하는 ‘좀비’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살리려는 마음을 자아내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종교적 세계관을 잘 나타낸 영화가 ‘웜 바디스’(2012)입니다. 좀비 영화이지만 인간을 세 종류로 표현하였습니다. 좀비이지만 아직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이 남아있는 존재들, 그러나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을 잃고 영원히 피만 찾아 돌아다니는 ‘보니’가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은 좀비로 태어난 아이들을 보니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남을 이겨야만 살게 만드는 체계로 그 사람의 인생을 모기의 삶, 좀비의 삶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교육을 통해 생겨난 대표적 인물이 히틀러입니다. 그래서 독일은 그런 교육을 버렸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수많은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아이들을 좀비에서 보니로 만들어갑니다.

 

아무튼, 이런 세계에 인간들이 연구하기 위해 들어오고, ‘알’(R)이라고 하는 한 좀비가 그녀 남자친구의 뇌를 먹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뇌를 먹으면 그 사람의 기억까지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를 보니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생명을 포기합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며 인간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타자의 생명을 먹어야만 합니다. 생존은 타자의 생명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 욕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이다시피 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좀비였던 ‘알’이 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녀를 살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됨으로써 더 높은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김상운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을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이유는 우리를 품기 위해서였습니다. 팔을 벌려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다시 말해 모든 시간과 공간 안의 인간들을 품으십니다. 원하면 누구나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자아를 죽임은 곧 타인을 받아들임과 일치합니다.

 

저희 영성관 앞에도 작은 야산이 있습니다. 그 속엔 많은 뱀이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성관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가면서 거의 뱀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뱀과 그만큼 떨어져 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곳에 사는 뱀은 더더욱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넓어지면 자아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그 뱀과 나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도 하시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한 자매님이 아직 아기인 딸과 어떤 강좌를 듣기 위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딸이 너무 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업고 화장실로 갔습니다. 딸의 울음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혈관에 흐르는 맥박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습니다. 자기 안에서 밖으로 조금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뻐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넓혀 아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살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를 넓혀 마치 노아가 좋은 동물, 나쁜 동물 가릴 것 없이 자신의 방주에 태우는 것처럼 내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도 들어오십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넓힌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비의 가장 중요한 면일 것입니다.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후배 신부님의 은경축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처럼 교구 사제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9시간 30분을 차로 달려오신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저도 5시간 운전해서 갔습니다. 축하미사를 조촐하게 함께하였고, 신학교 교가를 불렀습니다. 비록 몸은 멀리 타국에 있지만 우리는 같은 못자리(신학교)에서 함께 지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거리가 멀다고 가지 않았을 텐데, 여기서는 거리가 멀어도 기꺼이 달려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니 신학교 기숙사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신학생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사제상을 만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군에 입대하면 주특기가 주어집니다. 운전, 헌병, 정보, 행정, 의무, 포병, 공병, 보병과 같은 주특기입니다. 같이 입대했지만 저마다의 소질과 부대의 필요에 의해서 주특기가 정해집니다. 신부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만의 주특기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음향기기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걷기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매일 3만보를 걸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함께 걷는 친구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습니다. 레고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신기한 것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회전목마도, 에펠탑도, 쥐라기 공원도 만들었습니다. 하나하나 레고를 맞추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텐데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악기를 다루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시간을 내서 학교에 다니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텃밭을 가꾸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저도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겁니다. 95년부터니까 어느덧 25년이 지났습니다. 이번 모임에도 새벽에 일어났고, 같이 일어난 신부님과 함께 산책을 했습니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사제들에게 가장 적합한 주특기는 무엇일까? 첫째는 잘 들어주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전하는 것이 사제의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기쁨은 함께 기뻐하고, 슬픔은 함께 슬퍼하고, 아픔은 함께 아파하는 것이 사제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겸손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잘 듣고, 겸손한 사제는 화려하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잘 듣고, 겸손한 신자 역시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원하는 일만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원하지 않았던 일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열쇠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충실하게 지고 가야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주특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7일 금요일[(녹)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