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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6월 22일 수요일[(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전삼용-조재형-이영근-이수철 신부 강론

[매묵]2022년 6월 22일 수요일[(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전삼용-조재형-이영근-이수철 신부 강론

 

오늘 전례

[백]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또는
[홍]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입당송

시편 28(27),8-9 참조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요시야 임금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말씀을 백성에게 읽어 주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알아볼 수 있다(복음).

제1독서

<임금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말씀을 백성에게 읽어 주고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2,8-13; 23,1-3
그 무렵 8 힐키야 대사제가 사판 서기관에게,
“내가 주님의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였소.” 하고 말하면서,
그 책을 사판에게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서,
9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나아갔다. 그는 임금에게 먼저 이렇게 보고하였다.
“임금님의 신하들이 주님의 집에 있는 돈을 쏟아 내어,
주님의 집 공사 책임자들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10 그러고 나서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그런데 힐키야 사제가 저에게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하면서,
임금 앞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11 그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임금은 자기 옷을 찢었다.
12 임금은 힐키야 사제, 사판의 아들 아히캄, 미카야의 아들 악보르,
사판 서기관, 그리고 임금의 시종인 아사야에게 명령하였다.
13 “가서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의 말씀을 두고,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주님께 문의하여 주시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23,1 임금은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원로를 소집하였다.
2 임금은 모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
사제들과 예언자들, 낮은 자에서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데리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큰 소리로 읽어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3 그런 다음에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33.34.35.36.37.40(◎ 33ㄱ)
◎ 주님, 당신 법령의 길을 가르치소서.
○ 주님, 당신 법령의 길을 가르치소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
○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
○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
○ 탐욕이 아니라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
○ 헛된 것을 보지 않게 제 눈을 돌려 주시고, 당신 길을 걷게 하시어 저를 살려 주소서. ◎
○ 보소서, 당신 규정을 애타게 그리오니, 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살려 주소서. ◎

복음 환호송

요한 15,4.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화해와 찬미의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해져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45(144),15 참조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10,11.1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성사로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결과다.

 

 사람이 뒤통수를 맞거나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사람을 막 대하는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 일은 없습니다. 어차피 안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뒤통수 치는 사람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입니다. 
    영화 ‘겟 아웃’(2017)은 뒤통수를 제대로 맞는 영화입니다. 한 예쁜 대학생이 흑인 운동선수를 꾀어서 자기 부모에게 인사시키러 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집안은 현대 의학 기술로 몸이 좋은 사람들을 데려와 자신들의 뇌를 넣어서 영생을 추구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이들은 사람을 과정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지금 좋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미래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지를 생각 못하게 합니다. 사탄과 그 예언자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과정이 더 중요한지 결과가 더 중요한지, 혹은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은지 아니면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은지에 대한 논쟁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 결론을 내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굳이 사람을 판단하려거든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고 합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
 
    사람을 판단할 때는 과정보다는 결과입니다. 세상은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을 중시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정을 중시하기를 원하는 이들은 내 뒤통수를 치려는 이들입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좋을 수밖에 없지만, 과정이 좋다고 항상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과정입니다. 여기서 열심히 산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미 그 결과를 예상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세상에서 열심히 과정을 살도록 하며, 시간이 없어 결국에는 성당에 한 번도 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떤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는 일을 하다가 좋아하는 일로 옮겨가면 삶이 ‘노동’에서 ‘놀이’가 됩니다.”
지금 놀이하면 좋을까요? 목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행복한 게 중요할까요? 하지만 목적이 없으면 지금 행복한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재테크 강사 김관용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하는 일로 생계유지하려고 하면 좋아하는 일이 재미없어져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JYP 대표 박진영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하는 게 음악이고, 잘하는 게 회개라면 JYP 회계팀에 들어오세요.”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결과입니다. 과정은 항상 고통스럽습니다. 그 과정을 이겨내게 만들어 결국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가 지금을 참아낼 수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열매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을 즐기려는 사람은 앞으로도 즐길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맙니다. 

 

    얼마 전 노숙인에게 20유로(약 2만6천 원)를 주었던 한 유튜버가 약 3천만 원의 벌금과 함께 징역 15개월을 선고받은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돈만 준 것이 아니라 ‘치약 넣은 오레오’ 쿠키도 함께 주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다며 치약 오레오를 먹은 노숙인은 바로 이를 토해냈습니다. 
    유튜버는 노숙자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20유로라는 돈을 기부하는 선행을 했다고 여겼고, 오랜 시간 양치하지 않은 그에게 치약은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15개월 징역과 2천 5백만 원의 벌금과 그가 좋아하는 유튜브를 5년 동안 하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지금 즐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도록 누군가 지도했어야 합니다. 
 
    김연아 선수나 손흥민 선수는 왜 그리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고통스러운 과정을 참아낼 수 있게 만들어준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즐길 수 있습니다. 은퇴하고도 즐길 수 있습니다. 잘하지 못하면 결국 즐기지 못합니다. 
 
    가리옷 유다만큼 좋은 과정을 거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삶도 거기서 끝났습니다. 열매가 중요합니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꿈쟁이었습니다. 그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꿈 해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잘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역경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했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 해몽으로 감옥에서 풀려나고 이집트의 재상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배신한 형제들을 살려주는 은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면 분명 목적이 있습니다. 그냥 목적이 아니라 완전히 잘 될 무언가를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역경을 이겨내고 무언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읍시다. 그것으로 주님을 영광스럽게 합시다. 과정이 중요하고, 지금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하며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의도를 묻어두지 맙시다. 그러면 나중에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게으른 종처럼 혼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즐기던 과정도 더는 즐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항상 무슨 열매가 맺힐 것인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최고가 될 것을 선택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무엇이 되게 만드셨다면 분명 최고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오늘은 미주가톨릭평화신문 6 5일자 기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는 김평만 신부님이 연재하는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이고 다른 하나는 이영우 신부님의 고시원 이야기입니다. 김평만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약성경 곳곳에서 하느님을 고아와 과부, 당시 사회적인 약자들의 보호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주신다. 힘없는 이,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께서는 고아에게 친히 보호자가 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당시 고대사회의 보편적인 신관에서 벗어난 매우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당시 신은 그 사회의 지배층, 즉 왕과 귀족, 사제 등 힘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사회적 약자 보호 정신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이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섯 부류의 사회적 약자, 즉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굶주린 사람, 집 없이 떠도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언급하십니다. 구약의 정신과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의 특별한 연대를 추구했던 전통에 따라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중단 없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구약 성경이나 예수님께서는 왜 이토록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 각자가 실천해야 할 그리고 우리 사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우선적인 사명으로 강조할까요? 그 이유는 약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느님의 일(Opus Dei)', 즉 하느님께서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동창 신부 중에 고시원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내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고시원에서 가난한 이들과 사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빈민사목 원칙 중 하나도 현장에서 사는 겁니다. 제가 여기 살아야죠. 공동사제관에서 출퇴근하면 저도 여기 오는 게 일이 되잖아요. 여기 살아야 제가 이분들을 알 수 있어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살았던 것처럼 동창 신부님도 편안한 곳을 떠나서 힘들고 어려운 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교정사목을 할 때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출소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출소자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빛의 사람들이라는 집을 지어서 출소자들이 사회에 적응 할 때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출소자들을 위한 은행을 만들어서 저렴한 이자로 대출해 주기도 했습니다. 동창신부님은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저희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사는 아닙니다. 같이 살면서 함께 한다는 것이 교회가 함께 있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작은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제가 잊고 있던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잊고 있던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외롭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화려한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국과 맺은 동맹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경청할 수 있다면 그래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하나 될 수 있다면 교회는 그 행위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입니다. 

 


3.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강론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어제 복음인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마태 7,15)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 중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그가 말하는 표징이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 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따르고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신명 13,2-6)

 

사실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들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했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앞에 바로 서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예보나 윤리 생활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렸고, 진리에 대한 설명이나 지식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였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양’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마태 7,15)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진리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

(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사람이 좋아야 열매인 글도 말도 행동도 좋다

-기도, 회개, 훈련, 습관-

 

 

우리 삶의 궁극 목표는 ‘참나眞我’의 좋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 나무가 좋아야 열매도 좋듯 사람이 좋아야 열매인 글도 말도 행동도 좋습니다. 그러니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이듯 좋은 사람에 좋은 열매들입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나무를 좋아해 많은 시들을 남겼습니다. 11년전 제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에, 이해인 수녀의 추천사중 ‘한그루 나무를 닮은 수사님께’ 부제에 이은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온종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가슴에 쌓이고

비와 함께 다정히 사는 나무---”

 

제가 좋아하는 조이스 킬머의 시구를 외워보며 수사님의 이름을 부르노라니 제 마음에도 나무 향기가 절로 나네요.-

 

기도하는 나무들 같은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김용택 시인의 나무에 관한 글도 의미심장합니다.

 

“나무는 정면이 없다. 바라보는 쪽이 정면이다. 나무는 경계가 없다. 모든 것이 넘나든다. 나무는 볼 때마다 완성되어 있고, 볼 때마다 다르다.”

 

과연 나무를 닮은 사람들입니다. 나무야 말로, 좋은 열매를 내는 좋은 나무야 말로 우리의 영원한 스승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두어 들이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 들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나무처럼 고정불변이 아니라 믿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과 더불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회개, 훈련과 습관으로 누구든 좋은 사람으로 변화됨을 믿습니다. 타고난 선인도 타고난 악인도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부단不斷한, 절박切迫한 분투奮鬪 노력의 수행이 좋은 사람, 좋은 행동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얼마전 세계적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 손정웅씨의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라는 자전적 이야기 책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임을 깨닫습니다. ‘보고 배우는 일’이 삶의 꼴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많은 대목이 감동을 줬지만 그 중 일부만 인용합니다.

 

“가정은 최초의 학교요 최고의 학교다.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말에 앞서서 부모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먼저 보고 배운다. 아무리 좋고 옳은 말로 가르치고 훈육한다 해도 부모가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들보가 휘면 기둥이 휜다. 부모가 올바른데 자식이 휘겠는가.”

 

저에게는 여기 수도가정공동체가 평생 학교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가정공동체라는 고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공동체 형제들을 보고 배우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나는 초심初心, 초심을 강조한다. 자만하지 마라. 백리를 가는 사람은 구십리를 반으로 삼는다. ‘행백리자 반어구십行百里者 半於九十’이라는 시경 구절처럼, 우리 삶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삶에 완성이란 없다.”

 

“축구의 화려한 기술을 익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훌륭한 인성을 갖추고 인생을 겸손과 감사. 성실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네델란드 출신의 불세출의 축구 영웅인 요한 크라워프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내가 만난 월드클라스 선주 중에 인성人性이 나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가의 경지에 이른 분들의 특징은 좋은 사람, 즉 인성이 좋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월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비슷해 지다가 죽으면 다 똑같아집니다. 다 사라지고 남는 것은 ‘좋은 사람’이었는가. ‘향기로운 사람’이었는가 하나만 남습니다.

 

요즘 밤꽃에 이어 자귀나무꽃이 한창입니다. 아카시아 꽃처럼 으레 향기를 맡고 주위를 돌아보다 찾는 꽃입니다. 사람으로 하면 흡사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같습니다. 좋은 사람은 떠나도 은은하고 그윽한 좋은 향기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남습니다. 이런분들을 생각하면 마음도 따뜻해지고 향기로워지는 느낌입니다. 

 

이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회개, 겸손과 감사의 훈련과 습관의 수행이 절대적입니다. 이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항구히 노력할 때 하느님 은총이 작용하면서 점차 좋은 사람으로, 향기로운 삶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마음을 다해 바치는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는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겠는지요! 좋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보고 배웁니다. 스승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지금 여기서 선택하여 배울 스승은 무궁무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시며 도반이신 주님으로부터 보고 배우는 미사시간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은 요시아 임금의 등장과 종교개혁, 그리고 주님의 율법서를 발견과 요시야가 계약 책을 봉독하고 계약을 맺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한 사람, 요시야 임금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결정적 역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지도자 하나가 얼마나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작금의 나라 현실에서도 실감할 것입니다. 요시아 임금의 마지막 장면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런 다음에 요시야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입니다. 요시야는 이집트 임금 파라오 느코에 죽음을 당하고 더불어 개혁은 좌초되었으며 또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의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참으로 한 두 번의 개혁이 아니라 끊임없는 개혁의 회개, 끊임없는 영적혁명의 회개로, 늘 초심의 자세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말그대로 영원한 현역의 영적 훈련병으로, 영원한 초보자의 겸손한 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아름드린 좋은 나무같은 삶에 신망애信望愛의 열매 또한 풍성할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 맺는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