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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6월 23일 목요일[(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이수철-전삼용-조재형-이영근 신부 강론

[매묵]2022년 6월 23일 목요일[(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이수철-전삼용-조재형-이영근 신부 강론

 

오늘 전례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그는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다.

▦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신 요한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며 뒤에 오실 구원자 예수님을 알립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을 기리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입당송

요한 1,6-7; 루카 1,17 참조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복된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영신의 기쁨을 주시고
모든 신자의 마음을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주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그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다고 말한다(제2독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열린 할례식에서 아기 아버지 즈카르야가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 부르겠다고 한다. 그 순간,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한다(복음).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39(138),1-3.13-14ㄱㄴ.14ㄷ-15(◎ 14ㄱ)
◎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
○ 당신은 제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
○ 제 영혼이 잘 아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속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뼛속까지 당신께 드러났나이다. ◎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22-26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루카 1,76
◎ 알렐루야.
○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 알렐루야.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예물기도

주님,
복된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께서 오시리라 예고하고
이미 와 계심을 증언하였으니
저희가 그의 탄생을 기뻐하며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감사송

<선구자의 사명>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1,78
우리 하느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셨네.

영성체 후 묵상

▦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유다 산악 지방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는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어린양의 잔치로 기운을 되찾고 비오니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복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는 저희가
세례의 제정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요한 세례자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아름다운 인생 숲길을 걸읍시다

-사명, 우정, 떠남-

 

“Life is beautiful(인생은 아름다워라)”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당시 강론에 인용했던 이 영어 말마디입니다. 세수를 하려 플라스틱 대야를 보던 순간 투명한 물을 통해 바닥에 씌어져 있던 이 영어 말마디를 봤을 때 참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그날까지 힘차게, 하루하루, 행복하게,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건 믿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요 책임이요 권리입니다. 수도원 입구에서 수도원 주자창까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나무 울창한 ‘하늘길’을 걸을 때마다 아름다운 인생의 숲길을 걷듯 그렇게 걷습니다.

 

어떻게 아름다운 인생의 숲길을 걷듯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사명, 아름다운 우정, 아름다운 떠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예수님을 빼놓고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아마 성 요한 세례자 한 분 뿐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절친切親 성 요한 세례자에 대한 너무 당연한 예우禮遇이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주님과의 관계에서 사명을 다한 삶이, 주님과의 영적우정이, 또 자기 사명을 다했을 때 겸손히 사라지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이점을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 사도행전 마지막 절에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참 멋진 사나이, 아름다운 사나이, 행복한 사나이, 겸손한 사나이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자기의 신원을, 자기의 사명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너무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이제 사명을 다하자 그 자리에서 물러나 조용히 퇴장하는 참 아름다운 떠남의 사람,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떠오르는 태양에 소리없이 사라지는 달같습니다. 떠날 때 잘 떠나는 것보다 아름다운 모습도 없습니다. 

 

사실 사명을 다하고 직위에서 떠나는 모습도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특히 마지막 아름다운 죽음의 떠남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성인들이 그 좋은 모범이요 제 주변에도 길이 그윽한 향기를 남기고 떠난, 지금도 제 마음속에 살아 있는 아름다운 분들도 많습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참으로 살고 싶은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성 요한 세례자가 좋은 가르침을, 깨우침을 줍니다. 우선 우리의 사명에 대한 자각이요 이를 날로 깊이하는 것이며,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도반인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 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 랍비 신비주의자 여호수아 헷쉘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언명합니다만, 여호수아 헷쉘은 달랐습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무명의 존재감 없는 삶에서 주님께 불림받아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참나의 삶을 살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내가 주님께 불림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무지와 허무속에서 존재감 없는 무명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인을 물론이요 우리 믿는 이들에게서 주님을 빼면 완전 제로, 무의미와 허무의 존재로 드러날 것입니다. 정말 ‘신의 한 수’와 같은 우리 성소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다음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예수님은 물론 요한 세례자,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이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늘 새롭게 자각하고 확인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신원이요 사명임을 믿고 새롭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우리 각자는 우연적 존재가 아닌 불림받은 섭리의 존재임을 깊이 각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보라,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바로 이 은혜로운 말씀이 예수님과 성 요한 세례자는 물론 우리의 신원과 사명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이런면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예수님이요 또 하나의 성 요한 세례자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이야기에서도 참으로 불림받은 그의 모습이 작명作名과정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많은 이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르려하지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며 완곡하게 반대했고, 이어 즈카르야도 글 쓰는 판을 달라하여 “그이 이름은 요한”이라고 화답하여 쓰니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바로 하느님 친히 작명하신 ‘주님의 은혜’라는 뜻의 요한 이름입니다. 여기서 즈카르야가 부른 찬미가는 우리가 날마다 아침성무일도 끝무렵에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이어지는 그 지방 사람들의 반응과 성장과정을 보면 정말 불림받은 ‘신의 한 수’ 같은 성 요한 세례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위의 묘사에서 보다시피 새삼 요한 세례자는 결코 우연한 인물이 아니라 섭리의 인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또한 요한 세례자처럼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불림받은 존재임을 마음 깊이 각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충일한 사명감과 주님과의 깊은 우정이란 성소의 관점에서 보면 어제 복음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가 어제 복음 독서를 하고 강론을 하면서 잊고 언급해지 못했던 아차했던 첫 구절입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듯 행동을 보면 사람을 압니다. 참으로 주님께 부름받은 제 신원을, 제 사명을 모를 때, 잊었을 때 무수한 가면들이요, 거짓 위장의 옷차림입니다. 사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보호본능상, 방어본능상 가면을 쓰고 속과 겉이 다르게 위선적 삶을 살아갑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제 신원과 사명에 대한 자각입니다. 제 신원을, 제 사명을 깨달아 살아갈 때 마음은 저절로 통합되고(intergrity) 투명하고(transparency) 순수해져 가면은 저절로 사라져 어디서나 본모습, 본얼굴로 자연스럽게, 자유스럽게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매력을 발산하여 많은 사람들이 끌어드려 주님께 인도하니 바로 성인들이 그러합니다. 어제 읽은 영어 주석을 잊지 못합니다.

 

“속을 돌보라, 그러면 겉은 스스로 돌볼 것이다(Take care of the inside and the outside will take of itself)”

 

안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 질 것이니 가면이나 위장을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존재자체로부터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이, 향기가 속과 안을 같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부의 관리보다는 마음 관리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속은 그대로 놔두고 아무리 화장하고 성형하고 가면쓰고 위장해도 속은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아름다운 사명, 아름다운 우정, 아름다운 떠남에 충실함이 제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 요한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주신 사명에, 당신과의 우정에 충실하므로, 아름다운 인생 숲길을 산책하듯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은 이름을 지어준 분의 이름을 들어 높일 때 성장한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하느님은 즈카르야가 이름을 지어주도록 허락하시지 않고 당신이 주신 이름을 받도록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세례자 요한을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쓰시기 위한 계획이 드러납니다. 

 

    저는 이름을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사실 놀림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제 이름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저를 당신과 같게 여기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상대를 나와 동일시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려견이 죽었을 때의 고통은 자녀가 죽었을 때의 고통에 비견될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반려견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어주고 불러주던 이름이 없는 동물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그 동물을 나처럼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름을 지어주시며 당신처럼 대해주시는 부모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수준처럼 성장하여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손흥민 선수나 김연아 선수를 봅시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에게 이름을 준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이름을 준 분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피땀을 흘렸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모만큼 성장합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이는 부모처럼 성장할 수 없고 그래서 사회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이름만이 아니라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세례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즈카르야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와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 인입니다. 세례명을 가진 우리도 이에 감사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도록” 살아갑니다. 내가 주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리며 사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 나라에 얼마나 합당하게 성장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왜 인간처럼 될 수 없을까요? 어느 정도는 그 이름에 맞게 성장하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이름을 지어준 대상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를 발음하지 않으려고 다른 모음을 붙여두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정도로 발음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절대 부르지 않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러면 뭐 하러 당신 이름을 알려주셨을까요? 우리가 합당하게 부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의 이름을 불러주는 감동적인 동영상이 여럿 있습니다. 처음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부모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할 때는 다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를 위해 당신들 이름 없이 그저 엄마와 아빠로 살아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자의 이름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자녀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 엄마로 살아온 김경희님의 인생은 힘들지 않았나요?”

대부분 부모님은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부모로 살 수 있게 해 준 자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엄마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부모들은 한결 같이 대답합니다. 

    “내 인생의 전부!”

 

    이름을 준다는 말은 내 전부를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부모의 이름을 불러줄 때 나도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고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보니 어떠셨나요?”

    자녀들은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그냥 엄마는 엄마인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거 같아요.”

 

    이제 나도 성장했다면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줄 수도 있어야겠습니다. 그분들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당신 이름을 잃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대등하게 여겨주신다면 나도 그분 뜻에 따라 성장했음을 그분 이름을 부르며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아, 이 아이가 이만큼 컸구나!’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장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분명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찬양!’이 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 됩니다. 

    저도 신자분들이 “삼용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기분이 나빠서 “앞으로 당신을 신부님이라 부르지 않겠소. 당신을 전삼용 씨라고 부르겠소”라고 하면 그것은 사제로서의 저를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모처럼 성장한 것은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런 의미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히려 그분께 찬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 감사와 사랑을 담아 야훼라고 불러봅시다. 그분은 분명 기뻐하실 것입니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어릴 때 읽은 시골 쥐와 서울 쥐라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서울 쥐가 시골 쥐의 집으로 놀러갔습니다. 시골 쥐가 내놓은 음식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식어 빠진 감자와 옥수수 몇 알이었습니다. 서울 쥐는 음식을 보며 눈을 찌푸렸습니다. 그리고 시골 쥐를 서울에 초대했습니다. 서울 쥐의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는 순간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서울 쥐는 시골 쥐와 함께 쥐구멍으로 숨었습니다. 사람 눈에 뛰면 죽기 때문입니다. 다시 나와서 음식을 먹으려는데 이번에는 고양이 소리가 들렸습니다. 서울 쥐와 시골 쥐는 다시 쥐구멍으로 숨었습니다. 고양이에게 잡히면 죽기 때문입니다. 시골 쥐는 서울 쥐와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지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골 쥐는 다시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비록 먹을 것이 부족하지만 아무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시골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의 초청을 받아서 큰 성당으로 신문 홍보를 갔습니다. 성당의 시설과 사제관은 부러웠습니다. 널찍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학교와 교육관이 있었고, 주차장도 충분했습니다. 성당의 좌석도 넓었고, 공간도 아름다웠습니다. 사제관은 손님방도 큼지막했습니다. 부러운 마음에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골 쥐가 생각났습니다. 매일 영어미사와 한국어 미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일에는 한국어 미사 2번 그리고 영어 미사를 2번 한다고 합니다. 마침 그 때는 보좌신부님이 한국으로 휴가 갔다고 합니다. 영어 모임, 한국어 모임도 있고, 참석해야 할 회의도 많다고 합니다. 교구의 모임도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 제가 하는 일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문 홍보를 다니니 마치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즐거웠습니다. 신문사 운영에 재정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지난 3년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과 신문을 만드는 일이 훨씬 마음이 편하였습니다. 신문 홍보를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문사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 비슷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늘 불평이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가벼운 십자가를 청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평이 많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 동산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음에 드는 십자가를 고르라고 하였습니다. 불평이 많았던 사람은 신나서 십자가를 고르려고 동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결국 고르고 골랐던 십자가를 들고 오는데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지고 가던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는 만큼의 십자가를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가볍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십자가만 무겁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힘차게 지고 살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질 수 없는 십자가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겸손함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질 수 있는 십자가와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고 합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 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4. 이 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강론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또한,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자,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결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요 가치를 부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당싱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