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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1월 19일 토요일[(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2년 11월 19일 토요일[(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예레 29,11.12.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4(143),1.2.9-10(◎ 1ㄱ)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
○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
○ 하느님, 당신께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구하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오롯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3(72),28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오늘의 묵상

1. 2022년 11월 19일 토요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 논쟁 장면을 소개합니다.

등장인물은 사두가이 몇 사람율법 학자 몇 사람예수님이며구성은 액자형 구조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안에 다른 이야기들이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라는

모세의 율법 일부를 근거로 일곱 형제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였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예시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시려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사두가이들이 모세의 율법 일부를 근거로 논쟁을 시작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떨기나무 발현 이야기를 끌어오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이름까지 알려 주신 구약 성경의 가장 탁월한 계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여러 성조의 하느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시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부활을 받아들였던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동조하는 것으로 전체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복음 내용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해 봅니다.

나의 옳음과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다 사용하는 사두가이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경쟁 상대를 끌어내리려고

그분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 가운데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퀸즈에 있는 신부님의 모친께서 선종하였습니다. 신부님과는 지난 3년간 형제와 같이 지냈습니다. 당연히 모친을 위한 연도에 함께 했습니다. 연도는 부제님이 말씀의 전례를 주례하였고, 고인의 큰 따님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인을 위하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제단 앞에 모신 고인과 유족들에게 인사하면서 마쳤습니다. 오늘은 유족께서 고인을 추모하며 함께 나눈 일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인은 103살 이었습니다. 1919년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는 불교를 믿다가 성당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당시 미국에는 사찰이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큰 딸의 권유로 성당으로 왔습니다. 할머니가 성당으로 오면서 자녀들도 모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성당에 와서도 제단 앞으로 와서 불교식으로 엎드려서 큰 절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하니 딸이 엄마에게 그렇게 하지 말하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절하면 안 받아 주신다니? 성경에 보니 엎드려 절하나이다.’라는 말도 있던데?” 그러자 딸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 말을 못하였다고 합니다. 신자들도 제단 앞에 와서 엎드려 큰 절을 하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언제든지 성당에 오면 제단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하고 자기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엄마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혼하지 마세요. 마음 바꾸지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마음 바꾸지 마세요. 계속 한 길을 가세요.”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신학생인 저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어머니는 신학을 배우지 않았고,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신앙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지식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집니다. 백인대장은 신앙이 없었지만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하를 사랑하는 백인대장을 향해서 일찍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이 여인의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강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 세리의 기도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습니다. 부유함과 지식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척도는 아닙니다. 갈망과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 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알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하늘을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알과 병아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이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더 이상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벌레와 나비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실에서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부활은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갈 수 있다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다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강론

 

221118.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전을 당신과 만나고 대면하는 ‘기도의 집’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행실이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시고,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영혼이 언제나 당신이 머무는 당신의 집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전 정화

-날마다,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성사의 수행으로-

 

 

제 주변에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성인처럼 사는 아름다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저는 주저함 없이 성인이, 성녀가 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어제는 이렇게 성녀처럼 사시는 분이 부탁대로 제 졸저 두 종류의 책을 수도원 피정집에 비치할 수 있도록 충분히 제본해다 주었고, 또 한 권의 책도 제본을 부탁했습니다.

 

모두가 사제생활 초창기 90년대 전후에 썼던 강론집에서 좋은 부분을 발췌하여 좋은 분들이 협력하여 내 준 책들로 수도원 피정집 방마다 비치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새삼 진리는 변함이 없이 늘 반짝이는 빛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30년전 강론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된 책들인데 지금도 끊임없이 찾기에 제본을 실행한 것입니다. 

 

기존의 책보다 책도, 글자도 커서 돋보기 없어도 볼 수 있어 너무 흡족한 마음에 어제는 하루 내내 행복했습니다. 책 세 권의 제목이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같아 잊혀지지 않습니다

 

1.“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둥근 마음, 둥근 삶”

3.“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바로 다시 피정집에 비치할 책 제목들인데, 참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이 ‘둥근 마음, 둥근 삶’에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지막 한 권의 책을 출판한다면 제목은 무조건 제 좌우명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하고 싶습니다.

 

정말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만 34년 하루하루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을 것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삶을 단순히 집중하여 오늘 지금 여기를 살 때 환상이나 거품은 걷히고 본질적 깊이의 삶입니다. 모두가 하루하루의 삶에 공감을 표하며 동의하곤 합니다. 예수님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음을 봅니다. 루가 복음의 예수님 삶에 자주 나오는 말마디가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주십사’라는 주님의 기도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마디를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도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희 두고 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 좋아하는 기도문중, ‘날마다’와 ‘하루하루’ 두 말마디가 들어 있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강론에도 얼마나 많이 인용했는지, 그러나 인용할 때 마다 새롭고 좋고 감동적입니다. 사실 고백성사후 보속으로 이 두 기도문을 소리내어 읽게 하면 많은 분들이 읽는 도중 목이 메어 읽지를 못하는 경우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순수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하는 것이 구원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예루살렘을 보시며 그 타락상에 우시던 예수님은 나약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음이 오늘 삶의 현장에서 입증됩니다. 강렬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성전정화의 행동에 돌입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천둥같은,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세상의 중심이자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해야 할 하느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말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이 속화되는 것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구체적 성전정화를 실행하십니다. 본연의 말씀 가르치심에 전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이보다 더 좋은 성전정화의 수행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배움에 더하여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를 바치고 성사를 거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성전정화도 없을 것입니다. 

 

보이는 성전만이 성전이 아니라 건물 성전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몸 공동체의 성전, 그리고 하나하나 각자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기도 하니 말그대로 성전의 삼중적 차원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말씀수행, 기도수행, 성사수행이 한결같이 동시에 이 세 차원의 성전을 정화하고 성화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정화와 성화는 물론 우리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같은 존재가 됨으로 저절로 존재론적 복음 선포가 되어 세상을 날로 정화하고 성화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성전정화의 최선, 최상의 길은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성사 수행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수행과 더불어 저절로 기도의 생활화, 회개의 생활화도 이뤄질 것이니 성전은 늘 깨끗하고 거룩할 것입니다. 이래서 성전에서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수행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적대적인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반응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십니다. 빛과 어둠처럼, 인생에는 이런 어둠만이 있는게 아니라 빛도 늘 우선함을 깨닫습니다. 민심은 천심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보호하는 빛처럼 온 백성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으니 적대자들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 인생은 빛과 어둠, 단맛과 쓴맛이 함께 합니다. 이런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평범한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바로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묵시록의 요한의 신비로운 영적체험이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작은 두루마리가 상징하는 바, 바로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씀의 두루마리를 천사에게 선물로 받을 때 천사의 말입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요한이 천사의 손에서 작은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니, 그것이 입에는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다 합니다. 이어 요한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명령입니다. 바로 단맛과 쓴맛,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생이요 세상이요 이런 인생을,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말씀맛, 하느님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시편의 화답송 고백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달콤한 꿀맛같은 말씀맛이, 말씀의 힘이 인생 쓴맛을 상쇄하며 우리 모두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며 살게 합니다. 말씀을 모시고 말씀과 하나되어 산다해도, 어둠과 쓴맛의 세상은 여전할 것이나 우리는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이들을 돌파해 갈 것입니다. 결코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살게 할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세상의 중심이자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