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1월 21일 월요일[(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본기도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를 영광스럽게 기념하며 공경하오니
저희가 그분의 전구로
주님께 풍성한 은총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는 복되시다!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
○ 그분은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
○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그분은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네. ◎
○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네.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
○ 당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돌보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그분의 자비 영원하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백성의 기도와 희생 제물을 받으시고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는 이는 모두 은총을 받고
청원하는 이는 모두 응답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또는>
주님,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성자께서
어머니의 순결을 손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거룩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성자의 인성으로 도움을 받고 죄에서 벗어나
주님 마음에 드는 제물을 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하고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 ( ) 축일에
아버지를 찬송하고 찬양하고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외아들을 잉태하시고
동정의 영광을 간직한 채
영원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이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고
주품천사들이 흠숭하며 권품천사들이 두려워하고
하늘 위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복된 세라핌이
다 함께 예배하며 환호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소리를 모아 삼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영성체송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의 모태는 복되시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성사를 받고 간절히 비오니
동정 마리아를 기리는 저희가 그분을 본받아
주님을 충실히 섬기며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2년 11월 21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어떤 빈곤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켜보십니다.
물론 부자들이 넣는 돈과 비교해서 보잘것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칭찬을 단순한 금액의 비율로 평가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빈곤한 과부가 놓인 현실을 외면해 온 공동체의 책임에 대한 비판이 숨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고아나 떠돌이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대표로 과부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부름 받은 모든 이의
어느 지체도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와 주권을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라졌고,
세속적 욕망이 이웃 사랑에 대한 원칙을 넘어서면서
경제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빈곤한 이들에 대한 연대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이유는
자신이 얻은 수익이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하느님의 돌보심과
이웃의 희생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는 순수한 종교적 행위입니다.
물론 그 헌금이 성전을 관리하고 교회의 사제들의 삶을 위하여 쓰인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원칙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는 어쩌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약자 보호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유다 사회에 대한 강한 질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오늘날 돈과 권력이 갖는 속성을 꿰뚫어 보시고
제자들에게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새로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2. 조재형 신부 강론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법이 하나하나 별개의 구슬같이 아름다운 소질을 갖고 있으면서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코 그 하나는 다른 것들과 떨어져 전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 모두와 저 구슬들처럼 그 빛을 주고받으며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기적 세계관, 연기법의 진리를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드라망의 비유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두가 보석같이 참으로 귀한 존재이며 그 각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구조 속에서 더불어 존재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서양의 인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순환으로 보는 동양의 인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이 미국의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애틀은 땅을 팔라고 하는 미국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반짝이는 개울물과 강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와도 같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는 우리 조상의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 형제이며 우리 목을 축여 준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 자매이고, 사슴과 말과 큰 독수리는 우리 형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나?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결국 미국의 대통령은 땅을 샀지만 원주민 추장의 숭고한 뜻을 받아들여서 도시의 이름을 ‘시애틀’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도 있지만 시애틀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인드라망처럼 우리의 만남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곤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은 미국에 와서 서로 만났고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랑과 신부의 부친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할아버지들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의 우정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한인 성당으로 지난봄에 사순특강을 갔습니다. 신부님은 6월에 제가 있는 뉴욕으로 잠시 여행을 왔습니다. 이렇게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 본당의 사목위원이 저와 함께 일하는 주방 자매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부님이 뉴욕으로 오면 주방 자매님은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제가 노스캐롤라이나엘 가면 주방 자매님의 아들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맞습니다. “착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지 말라.”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인드라망의 세계를 알고 계셨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시애틀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인드라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전쟁, 폭력, 증오, 분노, 원망, 불평, 불만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들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겸손, 나눔, 친절, 온유, 절제, 사랑, 희망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철학, 문학, 종교, 신앙은 바로 우리를 인드라망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의 마음처럼 살라는 것은 아닐까요?
3. 이영근 신부 강론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기리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언제나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감사송>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단지 유다민족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참조),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제2독서>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시도록 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화해시키셨음을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신 이야기, 곧 당신이 ‘왕’이기에 조롱당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은 조롱받고 모독당하시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라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요 왕으로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여 도저히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 곧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다스림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일까?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회개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도가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봉사직무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와 용서와 섬김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면서 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 나 자신을 내어주고 죽어야만 이루는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그리스도왕 중심의 삶
-찬미의 삶, 평화의 삶, 섬김의 삶-
오늘은 연중 제34주일, 마지막 주일이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또 제37차 세계 젊은이의 날이자 제38차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루카1,39참조)라는 제하에 “어려운 이들 향해 성모님처럼 나아가자”라며 담화문을 발표했고,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신호철 주교는 ‘말씀의 시편’이라는 시편119장중 “새벽부터 일어나 도움을 청하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시편119,147)라는 제하에 “직접적 만남과 소통으로 말씀을 선포해야한다.”는 시의적절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참 풍부하게 느껴집니다. 예나 이제나 힘들고 혼란스런 세상입니다. 대축일의 유래가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당시 세계에서 날로 확산되어 가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온 세상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성대히 기리는 축일을 제정하였고, 이어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으로 새로 명명하면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대림 제1주일 전주일로 옮겨 기념하게 합니다.
까닭인즉 그리스도는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구분없이 모두를 다스리는 왕이며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한 것이며, 축일도 최고 등급인 대축일로 지정합니다. 아침 성무일도의 하느님 찬미는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웠는지요!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이며,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반영입니다. 성가연습시 흥겹게 불렀던 아름다운 찬미들이 새삼 감동이었습니다.
1.“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2.“예수님 놀라우신 임금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온 승리자시여
말로다 표현못할 감미이시여, 온전히 갈망할수 있는님이여”-찬미가 1절
3.“보라, 떠오르는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분을, 그는 옥좌에 앉아 다스리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리라.”-아침기도 후렴1.
4.“그분은 땅 극변까지 찬양을 받으시고 평화를 이룩하시리라.”-아침기도 후렴2.
5.“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께 영광과 주권이 있으소서.”-아침기도 후렴3.
우리 믿는 이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왕을 모시고 그리스도 왕국에서 내적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를, 방향을, 중심을, 의미를, 길을 잃고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혼란중에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다릅니다. 궁극의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이신,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신, 삶의 길이신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늘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왕 중심의 삶을 새롭게 합시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합니다. 얼마전 2013년 교황님으로 등극한후 10년째, 다음과 같이 당신의 소감을 피력합니다.
“나의 성소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놓으시고 보내주신 곳에서 나는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나는 어떤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어느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교회가 나에게 그것을 요구했습니다. 성 이냐시오의 날마다의 양심 성찰이 나에겐 참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좋고 나쁜 일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사람들의 말을, 특히 작은 이들: 어린이들, 노인들, 가난한 이들의 말을 경청하게 합니다. 12월중 86회 생일이 가까워지는 지금 나는 고요함과 큰평화, 진정한 기쁨, 온전한 신심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중에, 미사거행중에, 만나는 모든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교황인지요! 어떻게 살아야 우리도 교황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날로 잘 닮아갈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한결같이 다음처럼 살면 됩니다.
첫째, ‘찬미의 삶’입니다.
한결같이 찬미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찬미를 통해, 아버지를, 아드님을 닮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숨쉬듯이 아버지를 찬미하고 아드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콜로새서의 그리스도의 찬가는 얼마나 우주적이고 웅대하고 장엄하며 아름다운지요! 우리는 행복하게도 평생 매주간 수요일 저녁성무일도때마다 오늘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미가(콜로1,12-20)를 통째로 부릅니다. 어디서 이런 끝없는 신비와 깊이를 지닌 찬미가를 만날 수 있겠는지요!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어지는 그리스도왕께 대한 찬미에서 가슴 떨리는 감동을 선사하며 찬미의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왕의 정체가 환히 계시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왕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왕께 속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왕이기에 교회를 통해 서서히 확장되는 그리스도왕국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아드님을 찬미하는 삶에 늘 한결같은 열정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평화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제1독서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영도자가 된 다윗은 평화의 왕,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그리스도왕을 통한 화해, 평화, 충만함임을 깨닫습니다. 콜로새서 그리스도 찬미가 후반 내용이 참 반갑고 고무적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
평화의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평화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찬미와 더불어 평화의 삶입니다. 미사은총이 바로 우리를 주님을 닮은 평화의 사람, 화해의 사람이 되게 하고 또 충만한 삶으로 이끕니다. 오늘 감사송에서 주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안으로 수렴됨을 봅니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이런 그리스도왕께서 선사하시는 평화가 우리 모두 평화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참으로 평화가 절박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인터뷰에서 전쟁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며, “한 세기에 무려 3개의 세계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배우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개탄했습니다. 주님이 간절히 바라는 바, 평화의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셋째, ‘섬김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왕은 섬김의 왕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의 사랑은 섬김의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섬김의 왕으로서 주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지도자들도, 군사들도, 죄수 하나도 무지에 눈이 가려 그리스도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조롱합니다만, 예수님은 의연하고 담담하고 침착합니다.
다만 눈밝은 죄수 하나만이 예수님을 알아 보며, 자신을 기억해 주십사 청하며 섬김의 왕, 그리스도께서 흔쾌히 이를 약속하십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늘 우리를 섬길 태세가 되어 있는 섬김의 왕, 그리스도왕입니다. 마침 금주 가톨릭평화신문 1면 기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섬김의 삶 모범 ‘영등포의 슈바이처’기리다. 서울대교구, ‘기억하다. 빛과 소금이 된 이들’ 두 번째 선우경식 원장 기림 미사 봉헌”이란 제목입니다. 그리스도왕을 닮는 길은 오직 하나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닮고 싶습니까?
1,늘 찬미의 삶을 사십시오.
2.늘 평화의 삶을 사십시오.
3.늘 섬김의 삶을 사십시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찬미의 삶, 평화의 삶,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상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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