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12일 월요일[(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오늘 전례
입당송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땅끝까지 전하여라. 보라,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
본기도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어주시고
저희를 찾아오시는 성자의 은총으로
저희 마음의 어둠을 비추어 주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24,2-7.15-17
그 무렵 2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4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5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6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7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15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에게 온갖 선물을 베풀어 주셨으니
그 가운데에서 저희가 모아 바치는 이 제물을 받아들이시고
현세에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어
후세에서 영원한 구원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거꾸로 읽은 세계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계사는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그래서 왕조를 중심으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종교가 들어온 년도, 전쟁이 일어난 년도를 배우기도 합니다. 세계사는 승자들의 관점에서 기록되곤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봅니다. 가난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사건들의 진실을 전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 신대륙의 발견을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던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은 텔레비전을 거꾸로 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막을 읽기도 어렵고,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거꾸로 보는 것이 익숙하다고 합니다. 바지를 입을 때도 오른쪽 다리부터 넣지 않고 왼쪽 다리부터 넣는다고 합니다. 대학의 조직표도 거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총장이 맨 아래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총장은 맨 아래에서 마치 장작에 불을 붙이듯이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서 불쏘시개가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 10월 11일 )는 교회를 거꾸로 바라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교회는 피라미드와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는 피라미드처럼 맨 아래에 평신도가 있었고, 중간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있었고, 맨 위에 주교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주교를 통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해서 평신도에게 전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00년 동안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라틴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고, 세상의 것들이 교회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단죄하였고, 다른 종교와 화합하거나 일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도록 하였습니다. 교회는 위계제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는 조직이기 전에 성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전례의 언어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로 바꾸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권한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과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한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권한이 없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은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권한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세례자 요한의 권한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권한이 사람에게서 왔다면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한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권한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섬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겸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권한은 어떤 권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2.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21211. 대림 제3주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해가 뜨기 전 먼동이 터오듯, 참 빛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에 희망의 동이 터옵니다. 이토록 보랏빛 동녘 하늘 타오르는, 오늘은 기쁨주일입니다. 이 기쁨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기쁨을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이사 35,1-2)
오늘 우리는 이 기쁨주일에 핑크빛 옷을 입고서 설레이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으로 벅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를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이라는 광야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광야는 목을 내밀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기다림만으로 온전히 꽉 찬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불의를 징벌하고 정의를 세우는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요한이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에, ‘나는 메시아다’라고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통하여, 신앙고백에 이르러야 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 모습이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동시에,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아니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이르시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이사야 인용하여 표현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인간 삶의 길과 하느님 생명의 길은 사뭇 다릅니다. 인간 삶의 길은 먼저 살고 나중에 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생명의 길은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항상 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힘을 다 탕진하고,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으면 죽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살려고 옥신각신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잃은 사람은 살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생명의 길을 따라 자신을 버리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고 다음에 살아간다면, 진정 하느님의 생명, 참된 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선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주님!
먼저 죽고 나중에 사는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먼저 떨어져 죽고, 나중에 열매 맺게 하소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으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살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죽지 않고,
죽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살게 하소서. 아멘.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기다려라, 만나라-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주여, 오소서. 오사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 오실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대림 촛불 셋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며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일명 ‘라우다테Laudate’ ‘기뻐하여라’ 주일이자 기쁨의 장미 색깔 제의를 입기에 장미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제39차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신앙 실천 행위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실천하며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참으로 언제나 영원히 기다릴 대상인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참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살아갈수록 기다릴 것도 사라지고 이제 믿는 이들에게는 기다릴 대상은 주님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광야인생, 기다릴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겠는지요! 이런 주님을 기다림이 없이 무슨 희망으로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산다면 정말 순수하고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주님을 참으로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필립비서 말씀이 반갑게 떠오릅니다. 그대로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에 맞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4,4)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서두 말씀도 온통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사막이 상징하는 바 우리들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주님의 영화와 영광이 빛나는 기쁨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이런 기쁨의 빛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라에 이어지는 두 번째 권고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기쁨은 힘이자 빛입니다. 기쁨의 빛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다음에 “기다려라”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고맙게도 잘 맞습니다. 재림이란 말마디를 적당히 바꿔 전문을 읽어봅니다. 아마도 기다림의 달인은 충실한 농부일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기쁨의 기다림 앞에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원망, 절망, 실망이 사라진 희망과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인내의 기다림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에 이어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라”입니다.
대림시기 주님 성탄에 앞서 우리는 날마다 이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만남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가톨릭 교회 전례도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가 정화은총이고 성화은총입니다. 영육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 좋은 기쁨과 평화, 희망과 행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억지로 뺏어 올 수 있는 기쁨이, 평화가, 희망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때,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참으로 믿는 이들은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한 두 번 만남이 아니라 결정적인 성탄의 만남에 앞서 대림시기 날마다 앞당겨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참 고마운 것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가 힐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전하라 이르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서 말씀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 온전한 치유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의 치유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이런저런 것들에 매여 참 자유로움도 행복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성탄에 앞서 이 은총의 대림시기,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앞당겨 만나 새롭게 거듭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1.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2.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주님을 기다리십시오.
4.주님을 만나십시오.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해야할 구체적 과제입니다. 아멘.
[ 12/12(월) 대림 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권한은 어떤 권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우리는 살려고 옥신각신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잃은 사람은 살릴 것이다.”(이영근 신부)
3.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일명 ‘라우다테Laudate’ ‘기뻐하여라’ 주일이자 기쁨의 장미 색깔 제의를 입기에 장미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제39차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신앙 실천 행위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실천하며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98일(98/100) 기도]
주님!
먼저 죽고 다음에 사는...주님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2월12일(월) 6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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