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13일 화요일[(홍)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입당송
<또는>
복된 동정녀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져, 동정녀들의 신랑이며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주님을 본받았네.
본기도
저희 안에 믿음의 불이 타오르게 하시어
오늘 그의 천상 탄일을 지내는 저희가 영원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2.9-1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2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9 그때에 나는 민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기게 하리라.
10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나의 숭배자들, 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나에게 오리라.
11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때에는 내가 네 가운데에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
그러면 네가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
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
복음 환호송
○ 오소서, 주님. 지체하지 마소서. 당신 백성의 죄를 용서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2코린 10,17―11,2)와 복음(마태 25,1-13)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일찍이 박해와 싸워 이긴 복된 루치아의 생명을
제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듯이
그를 기리며 드리는 이 예물도 어여삐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성인 감사송 1 : 성인들의 영광>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
또 성인들의 삶을 저희에게 모범으로 주시고
저희가 성인들과 하나 되게 하시며 그 기도의 도움을 받게 하시나이다.
저희는 이 위대한 증인에게서 힘을 얻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나아갈 길을 끝까지 달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을 생명의 샘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인들 가운데 복된 루치아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으니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모든 악을 용감히 이겨 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32)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순종 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느님 뜻을 그냥 따르면 되지 굳이 요한을 만나서 그가 알려주는 방법을 믿고 따라야만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는 하느님 뜻을 따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이 무엇일까요?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발라져야 하고 살이 먹혀야 하는 운명입니다. 곧 이스라엘 집과 살과 피로 하나가 되는 운명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묵상합시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서는 율법, 곧 하느님 뜻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힘으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느님 뜻이 실천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행위를 중요시하는 유다인들은 요한을 믿지 않았지만, 오히려 죄인들이 요한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스윙 댄스의 대표 주자인 김잔디 씨 이야기입니다. 스윙 댄스는 재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악이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뜻을 내 몸으로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작정 배우면 될까요? 김잔디 씨는 처음에 남성들과 경쟁하는 업체에서 상도 많이 받고 잘나가는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여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친구는 몸치, 박치였던 잔디 씨를 믿어주며 “얘는 챔피언이 될 애예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거의 남성 혐오증에 시달리던 잔디 씨는 남성들과 땀을 흘리며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 하는 스윙 댄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믿음, 또 자신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3년 동안 댄스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챔피언이라는 증명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어 한 마디도 못 하며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윙 댄스 대회에 참가합니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복장도 있어야 하고 준비된 음악과 남성 파트너, 그리고 잘 짜여진 안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자신과 파트너가 되어주겠다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납니다. 그 미국인은 김잔디 씨가 어떤 복장의 옷을 입었는지, 그가 어떤 박자를 원하는지 딱 두 개만 묻습니다. 그리고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음에도 자신도 청바지를 입고 키 작은 김잔디 씨를 자기 코트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무작정 무대로 던져버립니다. 얼떨결에 무대로 튀어나온 김잔디 씨는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춥니다. 그리고 첫 국제 대회에서 1위를 수상합니다.
재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려면 먼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체력장 5급 받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그랬고 처음 자신에게 용기 있게 춤을 춰 달라고 해도 믿어주고 함께 맞춰주었던 키다리 아저씨도 그러했습니다. 10년 차 때 돈이 안 되는 이 춤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90세가 넘은 스윙 댄스의 전설인 노마 밀러라는 키 작은 흑인 댄서의 말도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며 따를 수 없는 이유는 자기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믿음을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없으면 무아지경, 곧 나를 버리고 노마 밀러가 되어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교회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2017)에서는 토르는 헬라라는 엄청난 힘을 지닌 여왕과 싸웁니다. 헬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토르를 압도합니다. 토르는 망치의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라가 망치를 부수어버립니다. 토르는 망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망치 없이는 이길 수 없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자기 망치에 의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헬라는 말합니다.
“나는 죽음의 신이다. 너도 무슨 신이긴 했었지?”
그런데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망치의 신이었냐?”
토르는 사실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망치는 그저 그 힘을 제어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분명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내 안에 계신 바로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총으로 나와 하나가 되시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것을 각성하게 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를 찾기보다는 내가 가능한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은총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말씀이 되어야 하느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채로, 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신 채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다면 엘리사벳에게 어떤 도움이 되셨을까요? 인간적인 도움을 되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도움, 곧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드시는 그런 도움을 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둘째 아들이 노력으로 하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사실을 그저 자기 암시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곱은 레베카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감당할 능력이 있음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따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통해 일하게 할 때 내가 그 말씀에 순종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먼저 되어야만 하느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습니다.
2. 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어제 복음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논쟁은 오늘 복음에서도 이어집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 21장 25절에서 언급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쟁점이
31ㄴ-32절에서 반대자들을 꾸짖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어제와 오늘 복음을 나누어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였는데,
그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과 그를 파견하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과 하신 논쟁에서 비유 하나를 소개하십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한 부류는 특권적 지위에서 그에 따르는 권리를 누리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그런 지위와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소외 집단 가운데 대표적으로 세리와 창녀가 후자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를 전자에 속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하면서 그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소개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리와 창녀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각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우리는 ‘맏아들’에게서 신앙의 모범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시각과 청각 장애를 겪으면서 살아야 했던 헬렌 켈러는 만년을 술회하기를 “나의 인생은 아름다웠노라.”고 했습니다. 반면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던 나폴레옹은 말년을 술회하기를 “내 일생을 통해 행복했었던 날은 엿새밖에 없었노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능력으로 얻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뇌종양에 걸린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수술로 혹을 제거할 수 있지만 시력은 상실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신부님을 찾아가서 아이에게 그런 사실을 이야기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숨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찾아갔고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머리에 있는 혹은 없어질 거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너에게 시력(sight)을 가져가실 거란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통찰력(insight)을 주실 거란다.” 수술이 잘 끝났고, 아이의 부모님은 신부님께 다시 한 번 부탁하였습니다. 아직 붕대를 풀지 않고 검은 안경을 쓰고 있던 아이를 부르자 아이는 신부님께 달려오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제게 시력을 가져가시고 통찰력을 주셨어요.” 아이는 신부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헬렌 켈러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불가능이 없다고 자신했던 나폴레옹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너희는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2022년을 보내면서 제게도 몇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물을 마시면 이가 시렸고, 음식을 먹기가 불편했습니다. 치과에 가보니 어금니 하나가 금이 갔다고 합니다. 60년을 함께 했으니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은 임플란트와 크라운 중에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했던 어금니가 고맙기도 했고, 가능하면 살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신경치료와 함께 크라운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면역력이 약해졌는지 몸의 몇 군데에 포진이 생겼습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서 연고를 바르고 쉬니까 좋아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제게 잠시 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산보가 유일한 운동인데 조금 지나쳤는지 발목이 저렸습니다. 매일 일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걸었더니 몸에 무리가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급한 저의 성격을 아셨는지 적당히 산보하라고 신호를 주셨습니다. 주변에서 신부님들이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끼고 다니던 묵주반지를 포진 때문에 잠시 빼 놓았습니다. 다시 반지를 찾으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놓았던 책상에도 없었고, 침대 옆 테이블에도 없었고, 혹시나 해서 침대 아래를 보아도 없었습니다. 신문사에는 없었습니다. 매주 가는 부르클린 성당의 사제관엘 가보았습니다. 그곳 세면대 옆 테이블에서 묵주반지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되찾은 묵주반지를 통해서 묵상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축일입니다. 루치아는 ‘빛,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통찰력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통찰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면 우리는 루치아 성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듯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눈을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루치아(시라쿠사)(St. Lucy of Syracuse) 동정,순교자 성녀 루치아는 지금의 이탈리아 남쪽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태어난 부유한 귀족의 딸이었다. 아기였을 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았던 성녀는 어릴 때부터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랐고,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스스로 동정을 서원하였다. 어머니는 이를 모르고 귀족 집안의 자제와 혼인을 약속하였다. 당시 어머니는 원인 모를 병을 앓고 있었는데, 모녀는 순교자 아가타 성녀의 무덤에 가서 기도하였고, 루치아에게 성녀 아가타가 나타나 어머니의 치유와 루치아의 순교를 예언했다. 병이 깨끗이 나은 어머니에게 루치아는 자초지종과 함께 자신의 동정 서원 사실을 고백하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결국 어머니는 딸에게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모녀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약혼자가 분노하여 성녀를 집정관에게 고발하였고, 성녀는 재판정에서 당당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재판관은 성녀를 매음굴에 보내도록 하였으나 신기하게도 성녀의 몸이 돌처럼 무거워졌다.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도, 소에 묶어 끌어내려 해도 성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화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역시 되지 않자, 목에 칼을 찔러 성녀를 살해했다. 성녀 루치아의 이름은 '빛(luce,lux)'에서 유래하는데, 사람들에게 밝게 빛나는 모범이 된 성녀의 생애에 비추어 볼 때, 절묘하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성녀를 그린 그림에는 손에 등불이나 불꽃, 성작이나 전통적으로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고, 쟁반에 눈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성녀는 아가타, 체칠리아 등과 함께 대표적 동정 순교자로 공경받으며 이탈리아, 특히 남부지역 사람들에게는 "산타 루치아"라는 노래만큼이나 친근한 성녀이다. - 출처: 성바오로딸수도회 성인찾기(https://fsp.pauline.or.kr/?c=saint&m=find) 중에서 - |
4.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21212. 대림 제3주일 월요일.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 나게 됩니다. 결국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사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과 위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
-분별력의 지혜-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4-5ㄱㄴ)
한밤중 일어나 조심조심 하루를 시작하면서 문득 떠오른 말마디 둘입니다.
하나는 ‘조고각하(照顧脚下)’,
“자신의 다리 아래를 살펴보라”는 뜻으로, 지금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잘 돌아다 보고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수행의 과정이나 신자의 길도 어두운 길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 수행자로 참답게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또 하나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뜻으로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 진리의 자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역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니,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오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 싶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에게 선사되는 모든 덕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온갖 지식과 정보가 범람하는 시절에 분별력의 지혜는 갈수록 중요해집니다. 특히 공동체를 섬기는 자들에게 분별력의 지혜는 필수입니다. 베네딕도 역시 특히 아빠스는 분별력을 지녀야 함을 특히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 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어제 깊이 묵상한 한자 둘, “원圓”과 “덕德”자입니다. 성철 스님은 자신은 모나게 살았지만 제자들은 둥글게 살라고 법명에 둥글 “원圓”자를 넣었다는데, 수행에 남달리 날카롭고 엄격했던 법정 스님은 제자들은 덕스럽게 살라고 법명에 “덕德”자를 넣어 주었다는 일화입니다. 둥글고 덕스런 “원圓과 덕德의 삶”, 역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발라암이나 복음의 예수님은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받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간절히 청할 천상적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자 신탁을 선포하는 발라암입니다. 야곱의 천막이, 이스라엘의 거처가 그대로 먼 훗날 실현될 교회의 모습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지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다.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흡사 풍요롭고 충만한 은총 가득한 교회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어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내다보는 발라암의 천상 지혜입니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별이, 왕홀이 상징하는 바, 미구에 탄생하실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현자, 발라암을 통해 계시되는 천상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도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수석사제들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지?” 묻는 불순한 질문 자체가 그대로 덫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던 덫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으로 대답하며 역공逆攻합니다. 복음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이들의 결정적인 덫에서 벗어난 물음, 예수님의 천상적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이젠 공수가 바뀌어 예수님의 역공의 질문으로 궁지에 몰린 적대자들입니다. 이들의 의논의 결론이 이미 답을 말해주지만 차마 말은 못합니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두려우니 이래저래 참 진퇴양난입니다.
결국 “모르겠소” 대답함으로 자기들의 덫에 자기들이 걸린 꼴입니다. 예수님의 분별력의 천상 지혜가 요약된 다음 말씀이 결정적 한방이 되어 적대자들을 침묵케 했음을 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너희가 스스로 헤아려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이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부여된 과제입니다. 답은 나와있지만 완고함에 눈먼 이들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발라암처럼 열린 눈을 지닌 겸손한 이들에게 위로부터 분별력의 지혜가 선사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하십니다.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106,4-5). 아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발라져야 하고 살이 먹혀야 하는 운명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전삼용 신부)
2.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리와 창녀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정진만 신부)
3. 오늘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축일입니다. 루치아는 ‘빛,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통찰력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통찰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면 우리는 루치아 성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듯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4.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 나게 됩니다....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이영근 신부)
5.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106,4-5). 아멘.(이수철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99일(99/100) 기도]
주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축일!
신앙의 ‘빛, 광명’이라는 뜻의 루치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빛, 광명을 보게 하소서. 아멘.
-2022년 12월13일(화) 성녀 루치아축일...9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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