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월 15일 주일[(녹) 연중 제2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9,3.5-6
주님께서 3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주님께 바라고 또 바랐더니 나를 굽어보셨네. 새로운 노래,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내 입에 담아 주셨네. ◎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시작입니다.1,1-3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그리스도인 일치 주간을 준비하는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고, 주님을 한마음으로 섬기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2. 경제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경제인들을 보살펴 주시어, 세상의 참주인은 주님이심을 기억하고, 재화를 올바로 사용하며 공정하게 분배하여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을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
3. 냉담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총의 주님,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은 교회를 멀리한 채 살아가는 이들을 이끌어 주시어,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루빨리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4. 본당 사도직 단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본당 사도직 단체들을 굽어살피시어,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을 향한 신심을 키우며,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예물기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이는 파스카의 신비로 이루어진 주님의 위대한 업적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15일 일요일
[연중 제2주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전합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서문인 로고스 찬가에서부터 언급됩니다(1,1-3).
선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그 전부터 예수님께서 이미 계셨다고 증언합니다.
이와 함께 세례자 요한은 ‘알지 못했다’와 ‘보았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물론 증언에 필요한 표현들이지만
요한복음에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단순하게 알고 보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나타내고 그분을 믿게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모든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표현되는 예수님의 전형적인 호칭입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사용된 이 표현은
임금(2사무 7,14 참조)이나 백성 전체(호세 11,1 참조)를 나타내기도 하고,
의인(지혜 2,18 참조)에게 적용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제 복음서는 이 낱말을 예수님께 사용합니다.
요한복음은 더 나아가 예수님을 “아버지의 외 아드님”(1,14)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또는 외 아드님(獨生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이런 예수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시고 이제 그분을 믿는 이들도 그 관계 안에 참여하게 됩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전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터를 닦으시고’라며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그냥은 외우기 힘든 것도 곡조를 붙이면 외우기가 수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학생 때 조선의 왕 이름도 그렇게 외웠고, 어려운 원소기호도 그렇게 외웠습니다. 100명의 위인 중에는 왕이 많았고, 장군도 많았습니다. 학자와 선비도 있었고, 스님도 있었습니다. 예술가도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애국, 이완용은 매국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었습니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도 있었습니다. 제게 가장 인상적인 이름은 ‘순교 김대건’입니다. 노래 가사를 만든 사람이 천주교 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사가에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대한민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한류의 바람을 타고 최근에는 예술 분야에서 한국을 빛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BTS는 춤과 노래로 감동의 무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빛낸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최초의 천주교인이 되었던 이승훈 베드로가 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습니다. 머나먼 땅에서 사목을 하다가 순교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한국인 첫 사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이 있습니다.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던 정하상 바오로, 여성 전교회장 강완숙 골롬바가 있습니다. 어린 아기와 생이별을 하며 관노로 제주도에서 살았던 정난주 마리아가 있습니다. 얻어먹을 것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며 ‘꽃동네’를 일구어 가난한 이, 병든 이들의 쉼터를 만들었던 오웅진 요한 신부님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참된 사제의 길을 보여주었던 이태석 요한 신부이 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아름다운 참 신앙인들이 있기에 교회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들의 빛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렸고, 앗시라아로,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갔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참담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희망의 눈으로 보았고, 언젠가 이루어질 하느님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바리사이파 사람, 율법학자들은 결코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권력, 명예, 재물,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권력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면 경쟁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욕망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면 예수님의 허물과 단점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분의 신분, 학력, 직책이 먼저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령과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가 많았습니다. 성공, 성장, 물질, 자본주의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절망 속에서 피는 희망의 꽃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편견과 아집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곤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명예, 권력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하느님나라’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는 위험한 집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잡아 가두어야했고,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고,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오로 사도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매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지친 삶의 일상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신앙이 언젠가 교회를 빛낸 위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30114.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이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과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과 방식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곧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제자의 길
-갈망, 따름, 배움-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이 시편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문득 떠오른 성규 머리말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만일 네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거든, 네 혀는 악을 삼가고 네 입술은 간교한 말을 하지 말라. 사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 가라”(성규,머리17)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제자의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이어 토마스 머튼의 사제서품 상본시 성구가 생각납니다. 구약에서 승천한 인물 셋은 에녹, 모세, 엘리야가 있는데, 에녹의 삶에 대한 영어 묘사로 제가 참 좋아하는 성구(창세5,2)입니다.
“Then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longer here, for God took him”(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주목되는바 직역하면 하느님과 함께 ‘걷다’인데 의역하여 하느님과 함께 ‘살다’입니다. 새삼 ‘걷는 것’은 ‘사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2014년도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걷는 것이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매일 1시간 4km 정도, 적게는 하루 20km, 많이는 32km 거리를 33일 정도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걸어야 삽니다. 걷지 못하면 죽습니다. 저는 하루 6시간 정도의 택시 운전이 끝나면 오후 매일 3시간 정도 걷습니다. 장단지와 종아리의 근육도 탄탄합니다.”
어제 잠시 병원에 택시로 가다가 들은 기사의 힘찬 설명입니다. 올때는 40분 정도 걸어서 귀원했습니다. 그러니 에녹처럼 주님과 함께 걷는다 생각하고 평생 도반인 주님과 함께 매일 일정시간 걸으시기 바랍니다. 걷는 것이 사는 것이자 기도하는 것이며 걷는 운동보다 더 좋은 운동도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가 아닌 평생 도반 주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걸어야 삽니다. 저도 평생 매일 강론 쓰기가 끝나면 4:00-4:30분까지 주님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수도원 경내를 묵주기도하며 걷는 것이 완전히 습관화되었습니다.
오늘은 ‘제자의 길’에 대한 묵상입니다.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시는 복음 장면이 제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잘 보여줍니다. 제자의 길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세요소입니다.
첫째, 갈망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선행하는 레위의 갈망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가시다 세관에 앉아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먼저 부르십니다. 예수님께는 일체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마음 깊이 갈망하며 기다렸던 레위요 누구보다 우리의 속마음을 잘아시는 주님은 레위의 갈망을 알아챘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수도승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어디 수도승뿐이겠는지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우선적 자질이 주님을 찾는 갈망이자 열정이자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열정과 더불어 함께 가는 순수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주님을 찾는 갈망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둘째, 따름입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따라나선 레위입니다.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계속됩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만나 주님을 따라 나선 ‘따름의 여정’중인 우리 제자들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레위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무의미한 일상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우리 역시 주님께 부름받지 않았다면? 새삼 은총의 부르심이 우리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사건인지 깨닫습니다.
무엇인가 찾고 따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궁극의 찾고 따라야 할 우리 주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이런 삶의 궁극의 목표와 방향, 중심과 의미를 잃고, 말그대로 길을 잃고 두려움과 불안중에 뿌리없이 표류,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시어 당신의 제자공동체에 합류시키시고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은 당신을 찾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구원의 문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가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 대한 소개도 참 은혜롭고 힘이 되어 전문을 인용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며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하느님곁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초월과 내재의 대사제 예수님 친히 당신 사제를 통해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흡사 은총의 어좌에서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는 미사전례처럼 생각됩니다.
셋째, 배움입니다.
우리가 평생 따라야 할 분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은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주님께 평생 배움뿐입니다. 배워야 삽니다. 공부해야 삽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평생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께 배워야 하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제자이자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평생제자이자 평생학인의 기본적 덕목이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은 호학好學을 주장한 공자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참으로 평생 스승이신 주님께 배워야 할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빛이자 희망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한결같이 온유와 겸손, 섬김으로 일관된 삶을 사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의 학교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다음 복음의 주님 말씀도 우리가 깊이 새겨할 가르침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세상에 병자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의 명의이신 주님께 치유받아야 할 우리들이요 부단한 회개를 통해 용서받아야 할 회개한 죄인들,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는 바로 말씀 공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니 사람의 본질은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 공부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사람, 진리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이 참으로 통쾌하고 명쾌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힘은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지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이요, 이런 말씀 수행이 늘 주님 앞에서 살게 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온통 말씀 예찬입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십니다’의 화답송 후렴에 이어지는 다음 시편 고백도 참 좋습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19,8-9)
제자의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주님 제자의 길은 평생입니다. 평생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인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께 대한 갈망을, 배움에 대한 사랑을 북돋아 주시고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 아멘.
[1/15(일) 연중 제2주일, 되새김 구절]
1.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전합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허규 신부)
2. 세례자 요한은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령과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지친 삶의 일상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3.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이영근 신부)
4. 제자의 길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세요소입니다.
첫째, 갈망입니다
둘째, 따름입니다.
셋째, 배움입니다.
주님의 평생제자이자 평생학인의 기본적 덕목이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수철 신부)
[1/15(일) 연중 제2주일, 제22일 기도]
하느님!
선재하시고, 임재하시며, 후재하시는 하느님!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과 늘상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2023년 1월15일(일) 5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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