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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월 14일 토요일[(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3개

[매묵]2023년 1월 14일 토요일[(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3개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본기도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8.9.10.15(◎ 요한 6,63ㄷ 참조)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복음 환호송

루카 4,18
◎ 알렐루야.
○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알렐루야.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6(35),10 참조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또는>
요한 10,1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매일 꿈을 꾸지만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꿈은 생생하게 기억나기도 합니다. 최근에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약속장소로 가는데 제가 자꾸만 다른 길로 가는 거였습니다. 약속시간은 다가오는데 전혀 생소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꿈속이라도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마치 꽉 막힌 공간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고 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에 대한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꾼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새로운 목표를 찾아서 나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2023년 저의 새로운 목표는 성지순례입니다. 1월에는 과달루페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4월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5월에는 그리스와 터키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6월에는 이탈리아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10월에는 한국성지순례가 있습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2년 동안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성지순례가 많이 예정되어 있어서 걱정도 되었나 봅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지러웠던 방을 깨끗이 정리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버릴 것은 다 버렸고, 벽지도 새로 붙였습니다. 넓고 깨끗해진 방에서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마음이 편했고, 가족이 모이니 즐거웠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에 드는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말끔히 해결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꿈이니 모든 문제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2년을 돌아보면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회계사와 변호사님께서 회사의 문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퀸즈의 정하상 바오로 성당의 신부님들은 언제나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잘 들어주었고,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북부 ME 대표 신부를 맡으면서 엠이 부부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줌으로 하는 강의를 녹화해주기도 했고, 편집도 해 주었습니다. 모임이 있으면 차량 봉사도 해 주었습니다. 엠이에서 주관하는 행사는 따뜻했고, 먼 타향에서 사는 저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3년 째 부르클린 한인성당 미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손님신부라서 어색했는데 지금은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2023년 새해에는 저 역시 누군가의 어려움에 함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꿈을 꾸게 됩니다. 어떤 꿈은 걱정과 근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꿈은 선택과 결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꿈은 바뀌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잡아가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약하게 숨어 지내던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평범하게 가축을 키우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으뜸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레위는 지금가지는 세상의 재물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저 재물을 모으면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레위는 이제 마태오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를 통해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물을 모으던 세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한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른다면 우리들 역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것입니다.

 


2.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30113.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치유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제거하고 없앨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을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교회 공동체에 뿌리 내린

-“개인 신앙”-

 

어제 요셉 수도 공동체 형제들은 참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마르코 수사님의 예언이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은 순수하다.” 말한마디 천량 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한달 가량 피정을 마치고 떠나면서 왜관 수도원의 박알렉시오 신부님이 감사카드와 더불어 주신 덕담입니다. 이에 마르코 수사님은 웃으며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강론에 인용할 것 같다” 예언 하였고, 저는 곧장 오늘 강론 서두에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순수하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듣고보니 우리 요셉 수도 공동체 형제들의 빛나는 특징은 ‘순수’입니다. 순수한 마음,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은 그대로 ‘주님의 빛’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역시 순수한 이들에게 축복을 전해 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알렉시오 신부님의 “순수하다!”란 말마디와 카드 내용을 듣고 후에 게시판에서  읽으면서 새삼 “신부님 역시 순수한 분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마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수행의 목적도 마음의 순수에 있습니다. 예전 읽은 대목도 생각났습니다.

 

“기적이나 신비체험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한 믿음을 지향하는 것은 종파를 초월한 모든 영성가들의 공통점이다. 비밀스런 능력에 관심을 갖는 인간은 신의 임재속에 살 수 없게 된다. 그러한 현상들이 네 안에 생겨나더라도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마라. 비밀스런 능력을 획득하기는 쉽지만, 마음의 순수에 이르는 길은 몹시 힘들다. 순수함을 소유한 자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

 

인도 힌두교의 신비가 라마크리슈나의 말이지만 참으로 공감이 가는 진리말씀입니다. 이렇게 수도원에 머물다 떠나는 수도형제가 이런 순수한 친필의 카드를 전하기도 처음입니다. 카드에 그림과 더불어 성탄 미사시 입당송인 이사야 9장5절 말씀도 은혜로웠습니다.

 

“Puer natus est nobis”(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나셨다)

 

이어지는 신부님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친필 내용 전문을 인용하여 나눕니다.

 

“+주님의 평화

요셉 수도원의 여러 형제 수사님들께!

한달 가량 요양하러 온 알렉시오가 진심으로 감사와 새해(설날) 인사를 이렇게 글로나마 올립니다. 지내는 동안 요셉성인상(특히 정문옆 성가정상과 주차장 앞 아기 예수님을 안은 요셉상)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출입구 신장 맞은편 창문턱에 편안하게 잠든 작은 요셉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 수사님들이 이런 요셉 상에 잘 어울리고 물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암산보다 옛 이름인 천보사天寶山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늘이 보호하는, 하늘의 보화인 이 산속에서 부디 묻혀 있는 보물을 찾으시기를 빌며 감사드립니다. Alex”

 

얼마나 멋진 순수한 편지글인지요! 하늘의 보물같은 정주의 천보산天寶山처럼 순수한 믿음의 정주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자들의 소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천장암天藏庵이란, ‘하늘 보물을 감추고 있는 암자’란 이름의 서산 개심사에 있는 불가의 유명한 선사 경허 스님이 머물더 암자이름도 생각났습니다. 한때는 제 집무실 명칭도 천장암天藏庵이라 불렀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은 얼마나 순수한지요! 말그대로 순수한 마음,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같은 동료들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바로 “교회 공동체 안에 뿌리 내린 개인 신앙”입니다. 무한한 믿음의 살아 있는 보물창고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공동체의 믿음은 무궁무진한 힘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순교의 죽음 못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깊이 뿌리 내릴 때 비로소 가능한 사랑의 순교, 순교의 죽음입니다. 이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날로 깊이 뿌리내릴 때 튼튼히 성장, 성숙하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공동체에서 뿌리 뽑힌 개인신앙은 쉽게 변질되며 얼마 못가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성전에서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그렇게 고맙고 소중한 것입니다. 기도도. 믿음도, 삶도 반드시 하느님 중심에 더불어와 홀로, 공동체와 개인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함은 영적 삶의 필수적 리듬이기도 합니다. 제 좋아하는 미사경문중 한 대목도 이와 일치합니다. 영성체 예식중 주님의 기도후 평화예식중 경문의 일부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이렇게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기도를 통해 교회의 믿음에 깊이 뿌리 내릴 때 날로 성장, 성숙하는 오로지 주님 향한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믿음에서 그 무엇보다 결정적 도움을 받는 것은 성모님의 전구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가장 많이 청하는 것도 형제들의 기도와 성모님의 전구입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2월1일 까지 매일 잠자리에 들기전 바치는 성모찬송가는 곡도 가사 내용도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은혜로운지 요즘 새삼 깨닫습니다. 라틴어 가사를 해석한 우리말이 좋아 전문을 인용합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시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가브리엘의 인사 받으신 그 후도 전과 같이 동정이신 이여,

 죄인을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 육신의 친모는 돌아가셨어도 우리의 영원한 마리아 성모님은 천군만마처럼 늘 우리를 위해 전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전구는 “영(0)” 순위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복음의 중풍병자보다 행복합니다. 수도형제들의 믿음과 더불어 성모님의 전구가 늘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의 간절한 믿음, 순수한 믿음입니다. 참으로 소망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할 때 믿음은 순수할 수 뿐이 없습니다. 궁즉통(窮卽通), 궁하면 통한다 했습니다. 동료들의 순수한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려 절망적 상황안에서 예수님께 도달할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내리는 참으로 기발한 착상입니다.

 

어제는 푸근하기가 겨울속의 봄처럼 느껴졌습니다. 얼마전은 겨울눈이었는데 오늘 밤에 계속 내리는 겨울비는 흡사 봄비처럼 느껴져 참 푸근하고 상쾌했습니다. 겨울속의 봄이, 흡사 절망속의 희망, 죽음속의 생명, 어둠속의 빛처럼, 파스카의 신비를 연상케 했습니다. 결코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 상황에서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을 지닌 중풍병자의 동료들은 예수님의 치유 구원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은 즉각적으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영혼을 치유하시고 이어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함으로 육신을 치유해 주심으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예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의 순수한 믿음으로 용서 받는 중풍병자처럼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중 교회 공동체의 믿음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흡사 미사가 끝나고 치유 구원된 우리를 향한 파견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은 오늘 복음과 연결되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바로 파스카 예수님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임을 깨닫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기쁜소식을 들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이미 히브리서 저자의 권고대로 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 미사를 통해 순수한 믿음으로 영원한 안식처를 앞당겨 체험함으로 복음의 중풍병자처럼 영육의 전인적 치유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이와 연관된 제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성가 177장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 성체성가 2절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아멘.


[1/14(토)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재물을 모으던 세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한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이영근 신부)

 

3.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의 순수한 믿음으로 용서 받는 중풍병자처럼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중 교회 공동체의 믿음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흡사 미사가 끝나고 치유 구원된 우리를 향한 파견 말씀처럼 들립니다.-(이수철 신부)

 

[1/14(토)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제 21일 기도]

 

하느님!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늘상 저와 함께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1월14일(토) 5시30분 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