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월 23일 월요일[(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월 23일 월요일[(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96(95),1.6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9,15.24-28
형제 여러분,
15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8(97),1.2-3ㄱㄴ.3ㄷㄹ-4.5-6(◎ 1ㄱㄴ)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제물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6 참조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탄은 끝장이 난다.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23일 월요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일부의 사람들은 그분께 악령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업적이 일상 안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업적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그것이 악의 힘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악의 힘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감하면서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모든 죄와 신성을 모독하는 어떤 말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표현이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오늘 복음의 28절과 관련되어 보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업적을모든 죄와 모독하는 말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탈출기에 나오는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다음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조상들의 죄악을아들 손자들을 거쳐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저는 강론의 서두에 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안녕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어로 ‘How are you, Good morning!’과 같은 말입니다. 어른들에게 하는 인사로도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문안의 인사입니다. 가끔 어르신들이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제가 강론 때 안녕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처음 보는 분들에게 하는 인사도 아니고,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늘 성당에 잘 오셨다는 환영의 인사입니다. 그러고 나서 편안하게 오늘 성서 말씀에 대한 강론을 시작합니다. 안녕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이별입니다. 영어로는 ‘Good bye, See you later!’와 같은 뜻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지지만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말입니다. 저도 친근한 사람들에게 안녕 다음에 또 봐요.’라고 인사하곤 합니다.

 

2023년 새로운 한해를 같이 시작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12 31일에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뉴욕 동북부에서 함께 지내던 백운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도 12 30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 2023년을 같은 공간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안녕, 이별은 없기 때문입니다. 위령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나도 천국성인도 에서 그대들과 같이 만나 영원한 복을 즐기게 될 것을 바라고 있소. 그대들을 정답게 껴안아 주겠소. 틀림없으니 그리 몹시 슬퍼 마시고 큰 사랑을 가지고 천주를 섬기도록 힘쓰시오. 그렇게 하면 죽은 후 영원히 주님 앞에서 서로 만나 끝없는 즐거움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요.”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독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고, 성령을 모독하는 삶을 산다면 권력을 지녔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많아도 우리는 안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병중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안녕할 수 있습니다. 박해의 칼날 위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활할 몸이요, 하느님의 살아계신 성전인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몸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속량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주님의 몸이요, 성체도 주님의 몸이요, 하나로 일치를 이루는 몸입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테살로니카 전서 5 15-18)”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122. 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민수 6,23)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리라. ...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2-26).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나아가,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일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일입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 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 ‘주어진 선물’, 곧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무엇보다도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축복’인 것입니다. 곧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곧 상대를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가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축복하는 행위’가 곧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어떻게 빌어주는가? 곧 ‘축복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이렇게 하면 됩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그가 응답하게 도와주십시오!
또한 그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협조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축복하는 이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축복하는 이 안에 ‘먼저’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하는 이가 먼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축복받은 이가 축복을 주는 이가 됩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인 ‘축복기도’는 우리 안에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이 한 해 내내토록 차고 넘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오늘,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베풀어진 이 ‘축복’이
일 년 내내 토록 날마다 여러분의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피고
올 한 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게 하소서.
또한 당신께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물고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주여, 당신은 대대로 저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은 제 좋아하는 시편이고 방금 부른 윗 화답송 후렴도 참 좋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시편 기도도 은혜롭고 위로와 힘이 됩니다. 설날 아침 미사에 잘 어울립니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이 잘되게 하소서.”(시편90,14.17)

 

오늘은 하느님의 축복이 넘치도록 주어지는 설날입니다. 설날이자 연중 제3주일이고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기도 합니다. 반갑고 고맙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30일 자의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해 매년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내도록 제정하셨습니다. 작년 하느님의 말씀 주일 때 교황님의 다음 강론 대목도 여전히 호소력을 지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예상을 폭로하며, 지나치게 인간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허물고, 그분의 참다운 얼굴과 그분의 자비를 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음을 기르고 새롭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영성생활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두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지 우리에게 계시하는 말씀을 중심에 둡시다.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말씀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참 기쁨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이 인간의 본질임이 다음 시편이 입증합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 말씀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참으로 축복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자녀’ 두 말마디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본질적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말씀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없이,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날 미사중 강론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야 할 꽃자리 하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 구체적 방법을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첫째, 감사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감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하느님 찬양이 살맛나는 인생을 만듭니다. 설날 저녁 성무일도시 후렴 둘의 곡도 참 흥겨웠습니다.

 

“우리 힘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자.”

“초승에 한보름에 우리네 축제일에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자.”

 

하느님 찬미,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 찬양해야 영혼이 삽니다. 영혼 건강에는 하느님 찬미, 찬양이 제일입니다. 아침성무 시편기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구절입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5,1-2)

 

찬양의 기쁨, 찬양의 행복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계속되는 축복속에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은혜로운 설날 미사중 당신 사제를 통해 우리 모두 하나하나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축복중의 축복이 평화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매일의 삶에서 평화의 증인이 되도록 하자”는 어제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당신 자녀들에게 복주시는 일이며, 주님의 복덩어리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며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우리가 자발적 기쁨으로 행해야 할 우리의 우선적 마땅한 의무입니다.

 

둘째, 겸손하십시오.

섬기십시오. 겸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뒤따라야 할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평생 주님 섬김의 배움터 삶의 자리에서 한결같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자만하지 마십시오. 무지한 이들이 교만하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로운 이들은 겸손합니다. 매사 세상에, 세상 사물에 집착함이 없이 초연합니다. 이탈의 참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도 이와 일치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실상을, 진상을 아는 자가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갈수록 주님을 닮아 지혜롭고 겸손한 삶입니다. 이래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열쇠의 답입니다.

 

셋째, 깨어사십시오.

준비하십시오. 유비무환입니다. 막연히 깨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주님을 기다리며 맡은 바 책임에 충실하며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오늘 이렇게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될 것이요 천상탄일의 선종의 복된 죽음일 것이니 내일은 전혀 걱정안해도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참으로 주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둔 신망애의 하느님 자녀들은 하루하루 깨어 기쁘게 삽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가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님인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행복하게 하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바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주어진바 거룩한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노파심에서 거듭 당부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아니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감사와 찬양’, ‘겸손과 섬김’, ‘깨어있음과 준비’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의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마침 가톨릭평화신문에 나온 ‘산다는 것’(김용해)이란 묵상시默想詩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니 이제 알게 되네요

 세상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높아지려는 

 그 욕심과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나이가 들고 죽음을 보면서 이제 깨닫게 되네요

 세상 산다는 것은 사랑이란 것을.

 서로 아끼고 섬기고 서로 나누고 도우면서

 그렇게 사랑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것을.”-아멘.


[1/23(월)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주님은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조상들의 죄악을아들 손자들을 거쳐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허규 신부)

 

2. 위령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조재형 신부)

 

3.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일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일입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이영근 신부)

 

4. ‘감사와 찬양’, ‘겸손과 섬김’, ‘깨어있음과 준비’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의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신부)

 

[1/23(월)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제 30일 기도]

 

하느님!

저와 함께 계시어 동행하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됨에 감사하나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하느님께서 저를 이끄심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1월23일(월) 6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