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2월 4일 토요일[(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본기도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3,15-17.20-21
형제 여러분,
15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16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7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21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엠이 부부들과 멕시코 과달루페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형제님이 깜짝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안내를 오래 했지만 이렇게 형제님들이 많은 순례단은 처음 봅니다.” 그동안 순례를 오면 대부분이 자매님들이었다고 합니다. 40명이 순례를 왔는데 남자는 신부님 포함 2명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순례는 자매님보다 형제님이 더 많은 유일한 순례라고 합니다. 10부부에 사제인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르즈나 골프 모임에는 형제님들이 많은 편인데 성지순례에는 형제님들이 적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지순례에 형제님들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많기에 형제님들이 기꺼이 자매님을 위해서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매님들은 성지순례의 기쁨을 잘 알기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기도합니다. 형제님들에게 우선순위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운동과 취미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순례를 함께 하면서 형제님들이 성지순례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많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형제님들의 우선순위에 성지순례가 맨 위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지 않고, 우선순위에 성지순례를 먼저 놓았던 형제님들과 함께 했던 성지순례였습니다.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성지순례를 하는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성지순례 첫날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당엘 갔는데 그 성당에서 혼배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 참례에 앞서 부부들은 혼배미사를 드린 신랑과 신부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부가 축복을 주었기에 신랑과 신부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낯선 곳에서 혼배미사를 볼 수 있었던 부부들도 혼인의 첫날을 생각하며 부부의 사랑을 새삼 확인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22년 전에 서품 10주년 기념으로 동창신부님들과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했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젊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힘과 열정은 있었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동창들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가 우선순위가 아니라 성지순례로 포장된 동창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22년 시간이 흘러 엠이 부부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니 피정을 겸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1521년 스페인은 신대륙으로 왔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과 대포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총과 대포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후안 디에고에게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성당을 세우라는 말을 주교님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주교님에게 전하였지만 주교님은 배우지 못한 원주민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성모님의 메시지가 맞는다면 ‘증표’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께 주교님의 이야기를 전하였고, 성모님은 장미꽃을 주교님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12월의 장미는 있을 수 없지만 후안 디에고는 가지고 있던 틸마에 장미를 담아 주교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주교님께 장미를 드리는 순간 틸마에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지는 ‘표징’이 일어났습니다. 주교님께서 요구하는 증표를 성모님께서는 성화라는 표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에는 현대과학의 힘으로는 규명하기 힘든 표징들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틸마는 선인장으로 만들었는데 길어도 20년이면 삭아서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곧 500년이 되는데 아직도 틸마는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저도 순례 중에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았습니다. 틸마에 새겨진 색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도료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사의 과학자들이 광학 현미경으로 2000배 이상 확대해서 성모님의 눈을 보았더니 그 눈에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현대의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표징이 있는 것도 신앙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후안 디에고의 뜨거운 신앙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후안 디에고의 말을 믿고 따른 주교님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이 열매를 맺어서 800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가졌던 토착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총과 대포로는 열수 없었던 마음을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열어 주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과달루페 성모 성지를 4번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보호자로 과달루페 성모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멕시코 인들에게 일생에 한번 쯤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한 멕시코 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22년 전 성지순례에도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면 저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졌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다시금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쉬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하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따로 부르셔서 엠이부부들과 함께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저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제게 주어진 일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사도 공동체의 모습은 묵상할 때 마다 감동적입니다..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복음 6장 31절)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돈보스코는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돈보스코 시대 당시 역시 교회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대 변혁의 시대에 사람들은 교회로 부터 매력을 잃고 떠나갔습니다. 그런 어려운 시대 주님께서는 돈보스코를 선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절정기 시절, 발길 닿는 곳마다 수많은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신자들, 청소년들, 특히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의 낡은 수단 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가 지니고 있었던 매력은 탁월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짙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많은 청소년들은 그와 함께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꺼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떼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03. 연중 제4주간 금요일.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주님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주님!
뼈 속에 새겨져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하느님 중심의 삶
-성덕의 훈련, 전례와 삶의 일치-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다음의 반응’과 ‘세례자 요한에 대한 죽음’의 두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헤로데의 예수님의 출현에 궁금해 하고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 났구나.”
예수님의 놀라운 활약에 즉시 세례자 요한을 연상한 헤로데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할 수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죽었지만 이어달리기 경주처럼 세례자 요한에 이어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예수님이 바톤을 이어 받고 달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대활약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다음 예수님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도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당신이 택한 사람을 통해 중단없이 계속됨을 봅니다. 아마 우리 수도원의 앞으로의 역사도 그러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의 극명한 대조가 우리에게는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잣대로 보면 더욱 분명히 구별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 확립된 분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받쳐주는 성덕의 훈련도 참으로 잘된 분입니다. 아무리 선의善意를 지녔어도 성덕의 훈련을 통한 습관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확고하지 않으면 한결같기는 힘듭니다.
참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겸손하고 정의로웠던 성덕의 사람, 세례자 요한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많이 사느냐의 삶의 양이 아닌 어떻게 참으로 의인으로 사느냐가 관건이겠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 정의의 잣대로 수차례 간한 의인 세례자 요한이요 결국은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서 급기야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 헤로데는 삶의 중심도, 성덕의 훈련도 없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헤로데의 선의를 인정합니다만 역시 힘이 없었고 한결같지 못했음을 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선의를 지닌 헤로데였지만 하느님 중심의 삶도, 성덕의 훈련도 턱없이 부족했기에 우유부단함과 분별력의 결핍으로 인해 급기야 헤로디아의 간계의 유혹에 떨어져 세례자 요한을 죽게 만듭니다. 세례자 요한과 비교할 때 너무나 부족한 헤로데의 모습입니다.
선의로만으론 부족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항구한 성덕의 훈련이 필수입니다. 이래야 좋은 분별력도 지닐 수 있고 한결같은 성덕의 삶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제가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훈련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은총의 선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은총의 선물처럼 좋은 선택을 했다면 집중적이고 한결같은 훈련의 노력을 통해 습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들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습관으로 삽니다. 훈련되어 습관화되지 못하면 후에 아무리 노력해도 별무소득입니다. 괴물이나 폐인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성덕의 훈련으로 좋은 습관이 이뤄졌다면 치매에 걸려도 고운 치매가 될 것입니다.
성덕도 훈련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기도도 침묵도 찬미도 감사도 기쁨도 순종도 도대체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은총으로 좋은 선택을 했다면 집중적이고 항구한 훈련의 노력으로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모범이지만 헤로데는 완전 실격입니다.
어제 주님 봉헌 축일에 봉헌도 훈련임을 강조했습니다. 어제 복음 끝부분을 다시 인용합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봉헌 삶에 충실할 때 마지막 봉헌의 축복된 죽음입니다. 봉헌의 은총, 봉헌의 선택, 봉헌의 훈련, 봉헌의 습관입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평생 매일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봉헌의 선택은 은총이자 동시에 훈련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훈련해야할 덕목의 수행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섬김의 삶이자 참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덕목입니다. 앞서 나온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성덕의 훈련이요, 앞서 히브리서 12장 28절 말씀입니다.
“감사와 함께 존경과 경외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예배를 드립시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예배의 열매가 바로 성덕의 실천이요 훈련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예배 공동체, 전례공동체이자 하느님 중심의 참된 공동체를 위한 구체적 이고 현실적인 수행 덕목입니다.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을 위한 구체적 실천과 훈련의 삶입니다.
1.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2.손님 접대를 즉 환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3.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4.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5.불륜을, 간음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6.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십시오.
7.하느님의 말씀을 일러준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이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살펴보고 이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맞갖는 구체적 성덕의 실천이요 훈련입니다. 말그대로 전례와 삶의 일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전례공동체의 수행이자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항구히 사랑하고 배우고 따라야 할 분은 우리 삶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시고 성덕의 실천과 훈련에 매진邁進할 힘을 주십니다.
“이 내 마음 당신께 아뢰옵고,
이 내 얼굴 당신을 찾고 있나이다
주여 당신 얼굴을 찾고 있사오니
그 얼굴 나에게서 감추지 마옵소서.”(시편27,8-9ㄱ). 아멘.
[2/4(토)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800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가졌던 토착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총과 대포로는 열수 없었던 마음을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열어 주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과달루페 성모 성지를 4번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보호자로 과달루페 성모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멕시코 인들에게 일생에 한번 쯤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한 멕시코 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조재형 신부)
2.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떼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이 내 마음 당신께 아뢰옵고,
이 내 얼굴 당신을 찾고 있나이다
주여 당신 얼굴을 찾고 있사오니
그 얼굴 나에게서 감추지 마옵소서.”(시편27,8-9ㄱ). 아멘.(이수철 신부)
[2/4(토)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제 42일 기도]
하느님!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4일(토) 6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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