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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2월 3일 금요일[(녹) 연중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2월 3일 금요일[(녹) 연중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 또는
[백] 성 안스가리오 주교

입당송

시편 106(105),47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본기도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3,1-8
형제 여러분, 1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2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3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4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5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7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3.5.8ㄷ-9(◎ 1ㄱ)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
○ 환난의 날, 그분은 나를 당신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 천막 은밀한 곳에 감추시며,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세우시리라. ◎
○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를 돕는 분이시옵니다.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

복음 환호송

루카 8,15 참조
◎ 알렐루야.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1(30),17-18 참조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전에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많이 힘들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인 밑에 순교자가 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똑똑하지만 게으른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큰 문제가 없이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현상유지를 하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태평성대에는 이런 지도자도 좋습니다.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하고, 마을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멍청하지만 부지런한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늘 긴장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장작을 쌓아 놓으라고 하고, 겨울에 얼음을 쌓아 놓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멍청하고 게으른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말 그대로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는 유능한 사람들이 떠나기 마련입니다.

 

본당 사목자들도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주도적인 사목자입니다. 모르는 것도 없고, 막히는 것도 없습니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그런 본당 신부와 함께 지내는 교우들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본당 신부가 완벽하게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5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두꺼운 책을 읽어보라고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말 그대로 라고 따르면 되었습니다. 협조적인 사목자입니다. 모든 결정을 사목위원들과 상의를 해서 내립니다. 사목위원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신부님께 상의를 하고, 본당 신부님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 줍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를 믿어 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는 함께 묵주기도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수도자나 사목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목자입니다. 이상적인 것 같지만 때로는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질서가 없는 자유는 무거운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방관자와 같은 사목자입니다. 본당의 친교와 전례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교우들은 차라리 수도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제사보다 제사 밥에 더 관심이 많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건강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환난의 날, 그분은 나를 당신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 천막 은밀한 곳에 감추시며,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세우시리라.” 오늘은 서울대교구의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24명의 새 사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엊그제 같은데 저도 벌써 사제가 된지 32년이 지났습니다. 지나온 발걸음을 보면 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저를 아직까지 사제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사제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제는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험한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와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있다면, 다윗처럼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친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제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힘을 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새 사제들이 주님을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주님!

새 사제들이 겸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성실함을 주소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제가 되게 해 주소서.


2. 연중 제 4주간 금요일 - 형제애를 실천하려면,,, / 김찬선 신부님 강론

 

형제 여러분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오늘 히브리서는 형제애 실천을 계속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애란 어떤 것입니까?

 

형제애란 일단 형제간의 사랑을 뜻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사랑에 여러 사랑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여러 사랑 가운데에서 형제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형제적인 사랑, Brotherly Love 또는 Fraternity

모든 사람을 형제로 사랑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자유평등박애라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 구호 중에서

박애가 실은 Fraternity를 형제애라 번역하지 않고 박애라고 번역한 것이지요.

 

여기서 박애란 앞의 평등과 연결하여,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널리 사랑한다는 뜻에서,

뒤집어 얘기하면 자기 형제만 좁게 사랑하는 것과 반대되는 뜻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 같은데 말 그대로 번역하면 형제애라고 번역해야겠지요.

 

그렇다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형제애는 이것과 같은 뜻일까요?

같은 뜻도 있지만프랑스 혁명 구호와는 다른 뜻도 있을 겁니다.

아니다른 뜻이라기보다는 깊은 뜻 또는 넓은 뜻이 있을 겁니다.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형제애에는 하느님이 숨어 있지요.

모든 이의 한 아버지요 같은 아버지인 하느님 말입니다.

모름지기 형제란 한 아버지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손님을 그저 손님으로 보지 말고 천사로 보고,

감옥에 갇히고 학대받는 사람을 그저 불쌍한 사람 정도로 보지 말고

내가 그 경우에 처한 것처럼 보라고 오늘 히브리서의 가르치는데

사실 자기처럼 여기고자기 형제처럼 여기는 것만도 대단하지요.

 

일반 사회적으로는 손님이 내 물건 사주는 손님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감옥에 갇힌 이는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범죄자일 뿐이고,

박해받는 사람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잖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이웃을 자기화(自己化)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이웃을 신화(神化)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대단할까요?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요?

 

제게는 형제 안에서 나를 보는 것보다

형제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

더 어렵고 대단한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제는 일 마치고 오다가 손수레로 폐지를 줍는 영감님이

한 손은 손수레를 잡고 한 손은 담벼락을 잡고 꼼작 않는 것을 봤습니다.

 

갑자기 혈당이 떨어지고 힘이 완전히 빠져 그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같이 본 젊은 사람과 함께 댁까지 할아버지를 모셔드렸는데

요즘 나이들이 많아 여기저기 아픈 제 육신의 형제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태원의 희생자를 내 자식처럼 보는 것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버려지는 아이들을 내 아기 내 손자처럼 보는 것도

내 안에 인간적인 사랑이 조금만 있으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신앙이 없으면 힘들고

신앙인이라도 하느님 관상을 깊이 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래서 형제로 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형제애를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02. 주님 봉헌 축일.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라삐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매온이 찬미합니다(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른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임을 밝혀줍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문제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남편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봉헌된 삶, 축복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의 뜻을 깨달아 알아듣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참 아름답고 복된 봉헌의 삶

-은총, 선택, 훈련, 습관-

 

주님 봉헌 축일은 동시에 우리의 봉헌 축일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한몸이 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주님 봉헌 축일이면 으레 생각나는 25년전 주님 성탄 대축일날에 쓴 고백시입니다. 여러번 인용했지만 인용할 때마다 새롭습니다. 여기서 물론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수도자는 물론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주님 향한 봉헌의 열정과 갈망이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참 좋아하는 봉헌성가 210장입니다. 오늘 시간되면 찾아 5절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2절까지만 인용합니다.

 

“나의 생명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감사하는 맘으로, 찬미하게 하소서

 

 나의 삶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하소서”

 

2.며칠전 존경하는 선배수도사제의 영명축일에 주고 받은 일부 내용입니다. 제가 은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기에 이에 대한 제 답변입니다. 다음 같은 요지의 말씀을 드렸고 내심 만족했습니다.

 

“수도자에게 은퇴가 어디 있습니까?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영적전쟁에 말씀공부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고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3.하루하루 날마다 수도원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하늘길을 걸을 때 마다 충만한 행복을 느낍니다. 아루리 하늘 높은 나무라도 하늘에서 내려보면 참 작을 것입니다. “하늘이 높다하다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양사언의 시조도 생각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보시기엔 사람들이 아무리 잘났느니 못났느니 해도 결국은 도토리 키재기 일것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소 참된 겸손입니다.

 

그래도 하늘높이 하늘 향해 쭉쭉 자란 가로수들을 보면 내 봉헌 삶의 내적성장을 묵상하게 됩니다. 정확히 2009년에 심은, 14년된 작은 애기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이렇게 거목이 된 것입니다. 하루하루 봉헌 삶의 충실성을 상징하는 나무들의 성장입니다. 과연 몸은 노쇠해가도 내적으로 끊임없이 하늘의 하느님 향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삶인지 묻게 됩니다.

 

4.또 하나는 제 집무실 커다란 초록판 게시판입니다. 흡사 초록빛 하늘을 연상케 합니다. 요즘의 각별한 이용에 행복합니다. 집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참 어려운 사정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 때 마다 메모지에 이름을 써서 초록빛 하늘 같은 게시판에 붙여 놓고 자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대로 하나하나가 봉헌된 귀한 하늘의 별들같은 존재로 생각됩니다. 오래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별’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아마도 우리를 그리워하는 주님의 마음이 이러할 것입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주님의 봉헌과 더불어 우리의 봉헌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축복, 찬미의 봉헌, 감사의 봉헌등 끝이 없습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더 아름답고 심오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도 봉헌뿐입니다. 사람이라하여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됐기에 봉헌이란 말을 이해하지만 하느님을 모르는, 믿지 못하는 이들은 도저히 봉헌이란 깊고 아름답고 신비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정의입니다. 봉헌은 인간 존엄의 근거입니다. 봉헌은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을 뜻합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유대 신비주의자 랍비 여호슈아 헷쉘의 고백이 진리입니다. 시간되면 김춘수 시인의 ‘꽃’도 읽어보시며 우리의 복된 봉헌자이자 성소자로서의 신원에 대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막연한 봉헌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니 바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2018.10.16

 

이렇게 주님을 고백할 수 있음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요 행복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런 봉헌의 모범을 오늘 말씀에서 만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교회 하늘에는 무수한 헤아릴 수 없는 봉헌 삶에 충실했었던 성인들이 별들처럼 교회를, 어둔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부모가, 시메온 노인이, 한나 할머니가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다음 세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모두가 하루이틀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리 정주의 수도자들처럼 항구히, 한결같이 평생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도 이런 봉헌 삶에 항구한 이들이 곳곳에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느님만이 아시는 익명의 성인들입니다.

 

봉헌의 축복입니다. 봉헌해서 축복도 받지만 봉헌 자체가 보상이요 축복입니다. 봉헌의 삶이 주는 깊은 내적 평화와 안정입니다. 봉헌으로 텅 비워진 내면에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니 말그대로 텅빈 충만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도대체 이보다 더 큰 행복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봉헌의 축복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말라기의,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예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 시메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매일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기전 바치는 시메온의 찬가입니다.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전 이 찬가만 잘 바쳐도 선종의 은총일 것입니다. 한나 역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부모에 그 아들입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나자렛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봉헌 삶에 충실했음이 분명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니 그대로 봉헌의 축복입니다.

 

사랑의 봉헌,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니, 봉헌의 삶이 바로 참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봉헌 축일이자 동시에 우리의 봉헌 축일입니다. 하루하루 모두를 주님께 사랑으로 봉헌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날마다 봉헌과 더불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부활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도 있습니다. 봉헌의 빛이자 봉헌의 어둠입니다. 봉헌의 기쁨과 평화만 있는게 아니라 봉헌의 슬픔도 있고 아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여 봉헌할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성모님 역시 시메온의 예언대로 반대받는 표징의 아드님으로 인해 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병고나 상실의 아픔도 괴로움도 슬픔도 불안도 두려움도 통째로 모두 주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든 것들도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님께 봉헌할 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이래야 삶은 짐이 안되고 선물이 됩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봉헌 삶에 충실할 때 마지막 봉헌의 축복된 죽음입니다. 봉헌의 은총, 봉헌의 선택, 봉헌의 훈련, 봉헌의 습관입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평생 매일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봉헌 삶의 요약과 같은 제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2012.9.15.-아멘.


[2/3(금) 연중 제4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환난의 날, 그분은 나를 당신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 천막 은밀한 곳에 감추시며,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세우시리라.” (조재형 신부)

 

2.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래서 형제로 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형제애를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김찬선 신부)

 

3.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봉헌된 삶, 축복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의 뜻을 깨달아 알아듣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봉헌의 기쁨과 평화만 있는게 아니라 봉헌의 슬픔도 있고 아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여 봉헌할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성모님 역시 시메온의 예언대로 반대받는 표징의 아드님으로 인해 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병고나 상실의 아픔도 괴로움도 슬픔도 불안도 두려움도 통째로 모두 주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든 것들도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님께 봉헌할 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이래야 삶은 짐이 안되고 선물이 됩니다. (이수철 신부)

 

[2/3(금)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제 41일 기도]

 

하느님!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형제애를 가지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3일(금) 6시30분...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