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2월 9일 목요일[(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입당송
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본기도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빵과 포도주를 마련하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주셨으니
이 예물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또는>
마태 5,4.6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기꺼이 인류 구원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실해서 인 경우도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인 경우도 있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우선순위’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산에 가기로 했으면 북한산에 대한 자료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설악산에 대한 자료를 본다면 시간을 많이 내서 일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이 오면 당황하게 됩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이 우선순위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 이웃사랑’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신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품에 올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능력, 재능, 업적이 뛰어나서 신앙의 모범이 되고, 성인품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 이웃사랑을 삶의 우선순위에 놓았던 분들입니다.
요즘 우리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을 만드시고, 해와 달 그리고 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바다와 육지를 만드시고, 그 위에 많은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느님을 닮은 ‘모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호하고, 돌볼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사람에게는 ‘짝’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생명이 아닌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사람에게서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짝을 보고 사람은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부부가 되었고,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천사보다 못하게 만드셨지만 존귀함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신문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6년 동안이나 간호해서 의식을 되살려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의사들도 회복할 수 없다고 포기한 남편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습니다. 그녀는 항상 "그는 환자가 아니다. 내 남편이다."라고 스스로 다짐하였으며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의식 없는 남편과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남편을 아기처럼 껴안고 뽀뽀도 하였으며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이 그 남편은 6년 만에 부활하여 첫마디를 "아멘"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남편들을, 아내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모든 부부는 분명히 결혼식에서 '비가 오나 바람 부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병들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항상 사랑할 것을 맹세'한 신랑 신부였습니다. 그 자매님에게 우선순위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남편은 이 세상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 여인에게 우선순위는 병중에 있는 ‘딸’이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강론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7,24-30: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이 불쾌하게 여기자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 것 같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계실 수가 없었다.”(24절)
그분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끈질긴 간청으로 주님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티로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아마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 생활의 자세인가?
마치 유대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우리의 원의를 갖고 기도할 때에 얼마나 조바심을 해왔고, 또 귀에 거슬리는 처사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 이 여인의 모습보다는 화를 낸다든지 즉시 그 사람을 향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욕을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하여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태도는 다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그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신다.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말씀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08.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마르 7,14)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예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마르 7,14-15)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막상 속은 은폐하면서 겉의 정결예법에만 치중하는 위선적인 정결예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16)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처럼,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기에, 우리의 내면의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선의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온전한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희 마음이 빛과 선으로 빛나는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마르 7,14)
주님!
늘 당신 면전에 머물게 하소서. 먼저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아니라 당신 뜻에 따라 살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고 갈망하게 하소서.
나의 습관과 판단이 아니라 내 안에 심어진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고,
실행하더라도 빛 안에서 사랑으로 실행하고,
사랑하더라도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깨달음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은총의 깨달음뿐이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역시 흥미롭습니다. 어제의 인간 창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제는 하느님을 닮은 고귀한 품위의 인간존재를 말했다면 오늘은 흙에서 창조된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현실적 모습입니다. 하늘과 땅의 양 측면을 지닌 모순(矛盾)적인 인간 피조물임을 깨닫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흙의 인간임이 엄연한 현실로 드러납니다. 흙의 먼지로 빚어진 인간, 바로 피조물로서 인간이라는 자각이 우리를 참으로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흙(humus)’에 어원을 둔 ‘인간(homo)’이요 ‘겸손(humilitas)’입니다. 흙처럼 겸손해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흙으로의 인간창조에 이어지는 에덴동산이 웬지 모를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입니다. 참 좋은 에덴동산의 낙원이지만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고 에덴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동시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이어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참으로 엄중한 금령으로 끝나는 오늘 제1독서 창세기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합니다. 새삼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넘지 말아야 선을 넘어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는 선택을 하는 날, 온갖 불행과 더불어 죽음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새삼 삶은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부단히 선善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요즘 참 많이도 강조한 “선택의 은총–훈련-습관”의 시스템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도 참 좋은 선택을 보여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하느님 찬미는 영혼의 본능이요 참 좋은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찬미의 선택이요 훈련입니다. 영혼의 건강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자발적 선택과 훈련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깨달음의 은총도 이런 좋은 선택의 훈련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참 강렬합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내가 나를 더럽힐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탓이 아닌 내탓이라는 것이고 이 또한 진실입니다. 이어 제자들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반복합니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은 알아들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결국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시는 것입니다. 결코 음식이 마음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깨달음을 강조하십니다. 우리의 영적 삶은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과 더불어 자유롭고 겸손해지고 순수해지는 마음이요 무지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에게는 참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가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바로 이것이 인간무지의 현실입니다.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흙으로 지음 받은 모순(矛盾)된 우리 인간의 엄연한 어둡고 부정적인 보편적 현실입니다. 참 무지한 인간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오늘날의 인간현실을 보면, 멀리 갈 것 없이 내안의 나를 보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이런 안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 자신을 더럽힐뿐 아니라 공동체도 사회도 더럽힙니다.
참 무지한 인간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동안 참 많이도 강조한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뿐입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통한 마음의 순수와 자유, 겸손입니다. 이래서 깨달음의 지혜,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여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깨어있음, 깨끗한 마음, 모두 ‘깨’자 돌림으로 서로 하나로 연결되는 우리 말이 고맙습니다. 부단한 깨달음의 훈련과 여정을 통해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뒤따릅니다. 이래서 부단한 기도, 부단한 회개, 부단한 말씀 공부의 선택과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인간 영혼은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깨달음에 대한, 말씀에 대한, 공부에 대한 본능적 갈망과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공부의 궁극적 목적도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행복을 살기위함입니다. 하느님은 고맙게도 하느님 말씀을 향한 사랑과 갈망도 우리 마음에 심어주셨습니다. 시편37장 30-31절 말씀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고,
그의 혀는 옳은 것을 말하느니라.
하느님의 법이 그의 마음에 있어,
그의 걸음이 흔들리지 않느니라.”
이어 시편 39장9절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사람되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 공부도 없습니다. 늘 강조하다시피 우리 삶은 평생 졸업이 없는 평생 현역의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평생 배움터 인생에서 부단한 기도, 부단한 회개, 부단한 말씀 공부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를 통해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순수와 겸손, 자유의 참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깨달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2/9(목)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조재형 신부)
2.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말씀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조욱현 신부)
3.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16)(이영근 신부)
4. 부단한 기도, 부단한 회개, 부단한 말씀 공부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를 통해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순수와 겸손, 자유의 참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2/9(목)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제 47일 기도]
하느님!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매일미사 묵상을 함에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무량무변하신 지혜와 동행함에 감사하나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상 행복하고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9일(목) 5시1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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