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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2월 18일 토요일[(녹) 연중 제6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2월 18일 토요일[(녹) 연중 제6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시편 31(30),3-4 참조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깨닫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1-7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2-3.4-5.10-11(◎ 1ㄴ 참조)
◎ 주님,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그분의 위대하심 헤아릴 길 없어라. ◎
○ 세대가 세대를 이어 당신 업적을 기리고, 당신 위업을 널리 전하리이다. 당신의 위엄 그 찬란한 영광을 이야기하고, 당신의 기적을 노래하리이다. ◎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복음 환호송

마르 9,7 참조
◎ 알렐루야.
○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언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야 언어를 쉽게 터득하지만 저는 그런 재능이 없어서인지, 노력을 하지 않아서인지 미국생활 4년이 되어도 도통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들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언어가 들려야 말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외국어만 그런 것이 아닌 것이 미사 중에 독서와 복음도 비슷합니다. 신심이 깊은 형제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독서와 복음이 살아있는 것처럼 귀에 들립니다.” 저는 아직 신심이 깊지 못해서인지 같은 한국말로 하는 독서도 살아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몇 번씩 읽기는 하지만 독서를 봉독하는 소리는 들리는데 내용이 제 마음에 자리 잡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몸은 성당에 있지만 마음은 분심 중에 있기에 독서와 복음이 살아서 가슴에 들어오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독서와 복음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형제님을 존경합니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말씀에 집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살았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한명은 오른편에 다른 한명은 왼편에 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권력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들었지만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유다가 생각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천국의 열쇠를 받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기도 했습니다. 32년을 사제로 살지만 저 역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삶으로는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직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예언자의 대표인 엘리야와 대화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을 뛰어넘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천막을 3개 만들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애벌레가 누에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비가 되듯이 십자가와 수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부활의 표상입니다. 저 역시도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십자가와 수난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믿음을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에녹은 믿음으로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물의 심판을 대비하여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믿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독서와 복음이 살아서 가슴으로 들어온다는 형제님의 믿음이 새삼 부럽습니다. 그런 믿음만 있으면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믿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히브리 서간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창세기의 주제들을 가지고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1-2)

그래서 저자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특히 아벨, 에녹, 노아를 예로 들어 이 믿음의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다.

아벨은 카인보다 좋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침으로 의인으로 인정 받았고, 에녹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늘로 들어 올려 졌으며 노아는 보이지 않는 일에 관여하여 방주를 마련함으로 의로움을 상속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도 마르코와 같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신 후에 따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다가 당신 신원에 대한 질문(루카 9,18-21),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22절), 어떻게 주님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23-27절)에 대한 이야기 끝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주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이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28절).

다 시 정리해보면 마태오와 마르코는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신 것으로 설명하는데 비해 루카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여들레 쯤 되었을 때 세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당신 얼굴이 달라지고 의복도 하얗게 변한 것입니다. 그 후에는 마태오도 마르코도 거의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마르코는 예수님 모습이 변하신 것과 함께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3)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나서서 초막 셋을 지어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싶다고 자신도 모르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미 이사야(42,1)가 예언되었던 내용 중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러는 순간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예수님만 계시고 모세도 엘리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산을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산에서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 중에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다시 설명하자면 ‘부활할 때까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서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수난과 연결시켜서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마르 9,12-13)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아가 다시 메시아로 도래하리라는 기대를 알고 계시고, 예언서에서 수난 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도 알고 계십니다.

오늘 제자들과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수난과 죽음이 닥치더라도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장차 스승께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제자들이 흩어졌지만 부활 후에 제자들이 다시 모여 하나가 됩니다.

이런 미래의 제자들을 아시기에 부활 후의 모습과 모세,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 아들의 모습이심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비울 수가 없으며, 이미 자신을 비우신 그분에 의해서 비워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빋이들이고, 그분께 의탁하여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스스로를 비운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신을 실현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분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신앙의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주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도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고통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속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사랑의 십자가를 품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바벨탑을 쌓지 마라

바벨탑을 허물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무지의 죄입니다. 반복되는 죄입니다. 죄의 악순환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죄의 현실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눈먼 무지의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습니다. 흡사 거대한 괴물처럼 생각되는 바벨탑입니다. 두려움에서 기인한 바벨탑 쌓기입니다.

 

먼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 참 다양하고 깊습니다. 안팎으로, 알게 모르게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 본능상, 자기 보호 본능상 바벨탑을 쌓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바벨탑, 우상의 바벨탑, 교만의 바벨탑, 허영의 바벨탑, 명예의 바벨탑, 탐욕의 바벨탑,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으면, 하느님을 잃으면 사람은 누구나 바벨탑을 쌓기 마련입니다. 마음 깊이 내재한 갈망, 불안, 두려움, 공허, 허무, 무의미, 무료함 때문에 바벨탑을 쌓습니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바벨탑의 제국들이 명멸했는지요! 도시마다 높이 솟은 거대한 괴물같은 고층 아파트들이 흡사 바벨탑을 연상케 합니다. 오늘날도 바벨탑 제국들의 역사는, 참으로 위태한 바벨탑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무지의 바벨탑에 반드시 등장하는 독재자들입니다. 무지의 독재자들이 꿈꾸는 바 무지의 바벨탑, 교만의 바벨탑 쌓기의 제국들입니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하니 획일적 집단을 이루기가 너무 좋습니다. 두려움의 본능상 함께 모이는 것은 필연입니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합니다. 그들은 이주해 오다가 마침내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습니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 한데 모여 도시를 건설하고 일치의 중심인 우상같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의 바벨탑입니다. 내적 공허와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대책이 고작 우상의 바벨탑, 무지의 바벨탑 쌓기입니다. 결국은 자멸에 이를 바벨탑을 쌓는 무지의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단의 개입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심판, 살리는 심판입니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심으로 바벨탑 중심의 눈먼 획일적 무지의 집단을 살리십니다. 그들은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고, 바벨탑 쌓기를 중단하고 온 땅으로 흩어집니다. 우상 중심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다 보면 지배와 피지배의 상황은 재현되기 마련이며 여기서 노예상태의 사람들 또한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상실이요, 자기를 잃은 익명의 무명의 존재가, 1회용 소모품 인생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그러니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인 하느님 구원 사건의 쾌거가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 참 깊고 두렵습니다. 마치 현대의 문명이 바벨탑 쌓기의 멸망으로 치닫는 불길한 예감도 듭니다. 디지털 혁명이 추세라지만, 문명의 대세라지만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인간이 실종되가는, 도태되어 가는, 퇴화되어 가는 추세가 불길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점점 일자리도 사라져가니 약하고 착한 보통 사람들이 살길이 막막해집니다. 자연이나 마을은 사라져가고 도시화와 더불어 무수한 고층의 아파트들에 사람들은 날로 왜소해져가고 죄도, 병도 많은 세상이 되어 갑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쌓기와 도시건설과 참 좋은 대조를 이루는 옛 광야같은 세상을 옥토로 만든, 야만의 유럽을 문명화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이들 수도자들이 먼저 광야에 머물렀을 때 한 일은 바벨탑 쌓기가 아니라 수도원을 세우고 성전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니 오늘 창세기의 바벨탑같은 우상 중심이 아니라 넓은 광야같은 유럽 대륙 곳곳에 하느님 중심의 도시가 형성됩니다. 

 

수도원 중심의 도시들이 광야의 유럽 곳곳에 생김으로 거친 광야의 유럽은 옥토로 변합니다. 이래서 유럽인들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시토회, 트라피스트회 포함)가 유럽을 구했다 하여 베네딕도 성인을 유럽의 은인으로, 또 주보 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 정주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역시 함께 살지만 공동으로 기도할 때와 식사할 때와 일할 때를 제외하곤 흩어져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 중심의 함께와 홀로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성의 일치를 이루는 유기적 공동체 삶이지, 결코 창세기의 바벨탑 중심의 획일화된, 단일화된 무기적 비인간화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니 살길의 답은 단 하나, 분명해졌습니다. 무지의 바벨탑을 쌓지 않는 것입니다. 무지의 바벨탑 쌓기를 중단하는 일이요, 우상의 바벨탑을 허무는 일입니다. 바벨탑 우상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길이요, 각자 삶의 자리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요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전쟁의 요체입니다.

 

그러니 바로 창세기 바벨탑에 대한 궁극의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예외없이 인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구원의 삶의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겠느냐?”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례여정의 삶을 살 때, 저절로 안주를 위한 바벨탑 쌓기는 중단되고 우상의 바벨탑도 허물어질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늘 나눠도 늘 새로운, 내적 우상의 바벨탑 허물기에 참 좋은 고백기도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2/18(토) 복음 제6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아벨, 에녹, 노아와 같은 믿음만 있으면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믿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 제자들과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수난과 죽음이 닥치더라도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장차 스승께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제자들이 흩어졌지만 부활 후에 제자들이 다시 모여 하나가 됩니다.(정인준 신부)

 

3.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이영근 신부)

 

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겠느냐?”(이수철 신부)

 

[2/18(토) 복음 제6주간 토요일, 제 56일 기도]

 

하느님!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게 하소서.

빛이신 그리스도와 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18일(토) 5시40분...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