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 2023년 3월 8일 수요일[(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3월 8일 수요일[(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8(37),22-23 참조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본기도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가족을 보호하시고 위로하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선행을 하고
마침내 천상 선물을 풍성히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어서 그를 치자.>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8,18-20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18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19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1(30),5-6.14.15-16(◎ 17ㄴ 참조)
◎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
○ 정녕 저는 많은 이들의 비방을 듣나이다. 사방에서 두려움이 밀려드나이다. 저에게 맞서 그들이 함께 모의하고, 제 목숨 빼앗을 음모를 꾸미나이다. ◎
○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

복음 환호송

요한 8,12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7-28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저희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불사불멸의 보증으로 주신 이 성체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의 종들을 언제나 보호하시고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형제들을 한없이 사랑하며
언제나 주님과 하나 되어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회전하고 있습니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우리은하(Via lactea)’라고 합니다. 태양계에 있는 별들 중에 지구와 비슷한 별은 금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성은 태양과 너무 가까워서 생명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별은 지구보다는 작지만 화성이라고 합니다. 관측결과에 따르면 화성에는 지구처럼 이 풍부했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물은 지구나 화성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고, 우주에서 고체의 형태로 날아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는 아직도 생명의 터전인 물이 풍부한 반면 화성에는 그 많았던 물이 모두 우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장의 크기라고 합니다. 지구에는 강력한 자기장이 있어서 태양풍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을 지구 밖 35,000킬로까지 밀어낸다고 합니다. 그 힘으로 지구의 물은 우주로 사라지지 않고, 지구의 품에 남게 되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화성에는 자기장이 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태양풍을 그대로 받아야 했고, 그 결과 화성을 가득 채웠던 물은 허망하게도 우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구의 자기장과 관련된 영화 중에 코어(The Core)’가 있습니다. 2003년에 나왔으니 20년 전의 영화입니다. 영화는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면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면 첫째, 지구 대기권을 이루는 공기층이 얇아지거나 사라집니다. 지구의 자기장은 마치 비를 막는 우산처럼 태양에서 오는 태양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 유전자의 심각한 파괴로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빠집니다. 태양풍이 사람이나 동식물에게 그대로 피폭되면 세포의 유전자가 파괴됩니다. 셋째, 지상의 전력 시스템과 지상의 통신 시설에 큰 피해가 발생합니다. 수시로 내려치는 어마어마한 번개의 위력 앞에 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고 바닷물은 증발하게 되고, 결국 화성과 같이 사막뿐인 행성이 되고 맙니다. 영화는 멈춰버린 지구의 자기장을 되살리면서 끝이 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자기장이 지구를 보호하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인간들이 인공지진으로 무기를 만들면서 지구의 핵이 멈추는 일이 생겼다고 설정합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인공지진으로 지구의 핵이 멈추면서 자기장이 멈추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기장이 사라지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결국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공지진처럼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억누르려는 권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재물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은 사람들도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들의 자기장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섬김과 겸손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제자들의 극단적 미성숙, 세속적 야심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서를 읽고 묵상할 때 꾸며낸 이야기라든지 공상 소설이 아니라 참이라는 것을 종종 깨닫습니다.

 

냉정하고 정확한 복음 사가들은 제자단의 모습을 묘사할 때마다 아주 가차없습니다. 수제자건 애제자건 핵심 제자단이건 상관없습니다. 나름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그들의 모습을 절대로 미화시킨다거나 영웅시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무런 가감 없이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의 약점과 흠결, 미성숙과 흑역사를 감추지 않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야욕으로 가득했던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낯뜨겁게도 노골적인 인사청탁을 합니다.

 

인사청탁하면서 절대 그냥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품질 좋은 포도주 한 병, 그리고 고급 안주도 들고 왔을 것입니다. 백주대낮에 부끄러움도 없는지, 이렇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열 제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불쾌해했습니다. 그중에 어떤 제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좋은 엄마 계셔서 좋겠다. 우리 어머니는 대체 뭐하는 건가?’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극단적 미성숙, 세속적 야심 앞에 혀를 내둘렀을 것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들의 모습에 엄청난 실망감과 자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십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을 또다시 용서하시고, 크게 인내하시며, 가르치고 또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20장 26~27절)


3. 이영근 신부 강론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섬김, 경청, 회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23,11)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봉사보다는 저는 섬김이라는 순수한 우리 말을 더 좋아합니다. 복음의 핵심적 요소가 바로 섬김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뿐일 것입니다. 

 

“서로 섬기십시오”, 바로 이미 고인이 된 이 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의 사목 표어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진정한 리더십도 섬김의 리더십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복음의 사람, 성 베네딕도도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성규머리45-46)

 

학원보다는 역시 저는 우리말 배움터를 좋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바로 마산에 있는 여자 트라피스트회 수녀원 정문 기둥에 쓰여 있는 글귀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평생학인 수도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영어가 서비스(service)요, 섬김의 직무는 바로 서비스업임을 깨닫습니다. 

 

서비스업하면 지금도 생생한 30년전 1인6역에 분원장직 소임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1990년대 중반에 제 나이도 40대 중반이었고 사제는 저 혼자였습니다. 1년 365일 혼자 미사와 강론, 신학교 강의, 면담성사, 손님접대, 전화받기, 주방책임, 분원장직, 참 분주했던 때였습니다. 

 

당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전천후全天候로 뛰었고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결연한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종전불퇴의 충일한 정신으로 살 때 였습니다. 수도원 생존의 문제가 참 절박한 때였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자작 좌우명시도 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밤중 피정 신청 전화에 잠결에 퉁명스레 전화를 받았고 격렬한 항의를 받았고, 지체없이 사과하여 간신히 수습했습니다. 바로 이때의 전광석화같은 깨달음입니다.

 

“아, 나는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서비스업이라면 첫째, 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 편안해야 하겠구나. 음식점이나 병원, 학교를 보면 금방 들어나듯 주님의 서비스업인 교회나 수도원 역시 마찬가지다. 과연 주님의 서비스업 수도원에 속한 나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며, 영적 실력이 탁월하며, 수도원의 내외적 환경은 좋은가 자주 성찰해 봐야 하겠다.”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인성, 영성, 환경을 일컬어 주님의 서비스업 3대요소라 칭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결론같은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충고,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결론하여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바로 겸손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다투어 순종하라는 사부 베네딕도의 말씀이 있는데 참으로 다투어 섬기는, 다투어 겸손한 공동체라면, 참 멋진 주님의 복음적 공동체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참 좋은 주님의 복음적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경청과 회개의 삶이 그 답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강조되는 바 경청과 회개로 사순시기를 맞이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개인의 내적회개로는 부족하고 적극적 사회참여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에 충실함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경청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가 회개요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과 순종의 사랑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회개란 하느님 안 본연의 제자리로 돌아옴을 뜻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돌아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대상이 허영과 외적 삶에 치우친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하는바 당대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모든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모셔선 안된다는, 우상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바로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며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우리 삶의 중심은, 우리 공동체의 중심은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참 선생님인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충실함이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새삼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주님의 선언이 참 눈물나도록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론적으로 절대 평등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우상들을 배격, 배제하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겸손한 존재로, 우뚝한 존재로, 의연하고 당당하게 위축되지 말고 참자유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경청과 회개, 섬김의 겸손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경청과 회개, 섬김의 삶에 더욱 정진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 아멘.

 


[3/8(수) 시순 제2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조재형 신부)

 

2.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20장 26~27절)(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임을 깨닫습니다.(이수철 신부)

 

[3/8(수) 시순 제2주간 수요일, 제 74일 기도]

 

하느님!

저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저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3월8일(수) 15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