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3월 5일 주일[(자) 사순 제2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당신 얼굴을 찾으라 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또는>
시편 25(24),6.2.22 참조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원수들이 저희를 짓누르지 못하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모든 곤경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본기도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으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2,1-4ㄱ
그 무렵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1,8ㄴ-10
사랑하는 그대여,
8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빛나는 구름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빛이신 주님,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도와주시어, 십자가의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세상의 유혹과 어려움을 이겨 내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맞서고 있는 이 세상을 굽어보시어, 모든 이의 안녕과 정의 실현을 위하여 대화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3.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치유자이신 주님,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돌보아 주시어, 그들의 몸과 마음의 고통을 없애 주시고 그들을 돌보는 가족들을 살펴 주시어 마음의 평화를 주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주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어, 하나되어 서로서로 지켜 주며 각자의 사명과 역할에 충실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이 제사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저희의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어
파스카 축제를 합당히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영광스러운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감사하며 비오니
저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천상 행복을 미리 맛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백성을 위한 기도
외아드님의 복음을 충실히 따르게 하시어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영광을 끊임없이 바라며
마침내 그 영광에 이르는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2023년 3월 5일(가해) 사순 제2주일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구요비 욥 주교(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제 고향 마을 뒷산의 이름은 ‘보리산’입니다.
작년에 제가 잘 아는 신자 가족이 제 도장을 새겨주고 싶은데 ‘호’(號)를 알려달라고 하여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보리산인(菩提山人)’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사제’가 되고 싶다는 거룩한 원의를 갖게 된 곳도 바로 이 산 위에서였습니다.
보리산을 등반하며 나의 미래와 진로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아! 나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데 사제가 되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라는 마음이 처음으로 생겼었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고향을 지나다가 보리산을 바라보면 가슴이 뛰는데, 이렇게 보리산은 제게 늘 신비로움을 안겨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
다.
인간의 육신은 정신과 영혼이 머무는 집이기에 그의 얼굴은 속마음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태양처럼 변하심은 이분의 내적인 본성이 어떠하신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인성(人性)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성(神性)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이 신성은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2티모 1,10)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습니다.’(루카 20,38 참조)
또한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콜로 2,9)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고 전율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이 하느님의 신성(神性)인 완전한 아름다움(美)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곧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겪으시는 수난을 포함합니다.
“하느님은 고통을 당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고통을 함께 나누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성 베르나르도)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성으로 겪으신 인간의 온갖 반항과 거부, 불신과 증오
와 적개심, 그로 인한 십자가상의 죽으심이 하느님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짐으로 인간적인 모든 것이 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예수님께서 오늘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이 그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엄한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의 이 신적 본성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십니다.(마태 17,5)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교포사목으로 오시는 신부님들은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좋습니다. 언어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는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교포사목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언어의 문제가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사제를 모시기 위해서 한국까지 갔었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몇 개 교구를 다니면서 사제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능력은 있지만 겸손한 사제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결국 한국에서 사제를 모시는 것은 포기하였고, 미국에서 사제를 양성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합니다. 잠시 머물다 왔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섬기는 사제, 겸손한 사제를 못 만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섬김을 받는 삶에 더욱 익숙했습니다. 복음적인 삶, 겸손한 삶 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소금처럼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녹이면서 맛을 내는 사제들이 많았다면 사제를 모시러 갔던 신부님은 기뻐하며 돌아왔을 것 같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교구장님의 본당 사목방문을 보았습니다. 본당에는 영어미사, 스페인어 미사, 한국어 미사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3개 공동체의 미사를 모두 집전하였습니다. 미사는 오전 9시, 10시 30분, 12시에 있었습니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주교님께서 잘 하시기 때문에 주례를 하였지만 한국어 미사는 제가 주례를 하였습니다. 사목방문 하시는 주교님의 열정에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교중미사만 주례를 하시는데 주교님은 모든 주일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주교님의 소탈함과 겸손함에 놀랐습니다. 미사가방도 직접 들고 왔습니다. 제의도 본인이 직접 입었습니다. 한국어는 못 하시니 제게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영어로 미사경본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한국 공동체의 미사니 한국어로 하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셨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주교님은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면서 소통하려고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 교우들과 사진도 같이 찍고, 몸이 아픈 사람에게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격식과 절차를 넘어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사제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은 주로 ‘본당’입니다. 봉사자들이 있고, 사제관도 있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큰 어려움 없이 사제로 지낼 수 있습니다. 둥지를 벗어나야 새는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목의 현장으로 떠나는 신부님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마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이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음식과 문화와 풍토가 다른 곳입니다. 열병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납치의 위험을 겪기도 하고, 외로움에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비록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하지는 않지만 신부님들은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아픈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일지라도 섬기는 삶을 산다면, 겸손한 삶을 산다면 그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과 불만의 삶을 산다면 그 어떤 곳도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섬김과 겸손의 문제입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늘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천막을 3개 만들어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이 있어야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강을 버리는 물만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꽃을 버리는 나무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산다면 지금 이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명을 주십니다. 곧 하느님을 본받으라는 소명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우리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고, 우리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평생과제
-성인이 되십시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
어제 마태복음 5장은 산상설교중 첫째 대당명제에 해당됐다면 오늘은 마지막 여섯째 대당명제로 소주제 역시 “원수를 사랑하여라.” 아주 선명합니다.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절정부분처럼 생각되는 마지막 다음 구절입니다. 예수님 말씀안에 하느님의 소망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말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의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그만큼 당신 자녀들인 우리에 대한 당신의 믿음, 희망, 사랑을 반영합니다. 우리만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또한 우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기대에 부응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일부 영적 엘리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하여 저는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평생과제-성인이 되십시오.”로 정했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참으로 주님을 닮은 고유한 참나의 성인입니다. 말그대로 평생과정이요 평생과제입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성인이 되기에 좋은 환경을 구비한 자들이 우리 수도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인이 되려는 경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도원에 들어온 목적도 여기 있을 것입니다.
“수도자는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to be)서다” 라는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되는 것은 평생과정임을 깨닫습니다.제가 요즘 뒤늦게 탐구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옛 한국의 사표가 될 위인들이요 선비들입니다. 천주교식으로 말해 성인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들입니다. 공통적인 점은 참으로 치열히 참사람 성인이 되기 위해 평생 분투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500년 이상된 왕조는 한국밖에 없다고 합니다. 중국도 200년이상 된 왕조가 없다 하는데 한국은 삼국이나 고려나 조선이, 다 500년이상입니다. 바로 정신적 중심 가치인 선비문화가 건재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계된 책을 주문해도 한참만에 받아보기에 까닭을 수도형제가 알려 줬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주로 보는 책은 자기계발이나 인간관계, 사업상에 관한 대부분 실용적인 것이라, 수사님 주문한 인물 평전에 대한 책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재고를 찾아 보내다 보니 늦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대략 50년전, 1970년대 제가 초등학교 교사시절,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열변을 토하면 당시 아이들은 통했는데 아마 지금 아이들이나 젊은 부모들은 공감하지도 탐탁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당시 아이들이나 부모들은 참 정신적으로도 건강했고 순수했고 소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는 물론 믿는 우리들에게는 평생과제는 단 하나 주님을 닮은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나 참행복도 이런 참나의 성인이 되는데 있을 것입니다. 인생 허무나 무지에 대한 유일한 해법도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면담성사시 성인이, 성녀가 되라고 많이 강조합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부터 다시 새롭게 노력하는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요 실천입니다. 매일 성인이 되려는 선택과 더불어 치열한 영적 훈련을 요구합니다.오늘 제1독서 신명기는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강조되는 말마디 “오늘”이 무려 3회 나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 명령하십니다. 바로 그 구체적 처방을 오늘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우리 수도자들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우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라.” 이래서 끊임없이 보고 배워 성인이 되라 우리 천주교회는 무수한 성인들이란 살아 있는 보물을 지니고 있고, 신자마다 성인의 세례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완전한 성인은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 온전한 전인적 성인을 뜻합니다. 저절로가 아닌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치열한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하는 사랑입니다. 둥글둥글 둥근 마음, 둥근 사랑, 둥근 삶을 뜻하는 온전한 사랑, 원만圓滿한 사랑, 원숙圓熟한 사랑, 집착이 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과 빛을 주는 사랑, 차별이 없는 공평무사한, 대자대비하신 주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다음처럼 묘사되는 하느님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싫어하는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과 배려의 아가페 사랑, 참으로 성숙한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래야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고 환대하라니 참으로 어려운 숙제이나 주님은 우리에게 치열히, 가열차게 분발하여 노력할 수 있는 열정과 사랑을 주십니다. 이런 아가페 사랑 역시 자발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성인이 되는 평생훈련, 평생과제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2코린6,2). 아멘.

[3/5(일) 사순 제2주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성으로 겪으신 인간의 온갖 반항과 거부, 불신과 증오
와 적개심, 그로 인한 십자가상의 죽으심이 하느님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짐으로 인간적인 모든 것이 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구요비 주교)
2.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이 있어야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강을 버리는 물만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꽃을 버리는 나무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3.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이영근 신부)
4.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과 배려의 아가페 사랑, 참으로 성숙한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래야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이수철 신부)
[3/5(일) 사순 제2주일, 제 71일 기도]
하느님!
강을 버리는 물만이 바다에 도착하고....
꽃을 버리는 나무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버릴 줄 알게 하소서. 집착을 끊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3월5일(토) 7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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