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3월 11일 토요일[(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5개

[매묵]2023년 3월 11일 토요일[(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5개

 

입당송

시편 145(144),8-9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본기도

하느님,
영광스러운 이 성사로
세상에 사는 저희가 천상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계시는 그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가도록
저희의 삶을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3(102),1-2.3-4.9-10.11-12(◎ 8ㄱ)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복음 환호송

루카 15,18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제사를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시고
저희를 죄악에서 건져 주시어
언제나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15,32 참조
아들아, 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그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여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께 간청하는 이들의 기도에 자비로이 귀를 기울이시어
주님 뜻에 맞는 것을 청하고
바라는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오늘의 묵상

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대목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말이지 단출합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전에는 이 비유를 묵상할 때마다, ‘나는 과연 첫째 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안에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죄 없다고 큰소리치며, 돌아온 동생을 손가락질하는 큰아들의 모습과 크게 가슴치며 탄식하는 작은아들의 이미지, 그리고 사랑밖에 모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사실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판공성사 좀 보라고 외쳐도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판공성사 본 지가 5년,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한 이웃들을 큰 궁지로 몰아넣는 패악을 저질러놓고도, 반성하기는커녕 큰소리치고, 의기양양하게 활보하는 적반하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 큰아들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온 이후에 또 한 가지 과제가 생깁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큰 죄인이다.’‘나보다 더 큰 죄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치기만 하면서 살아서는 또 안 될 일입니다.

 

이제는 작은아들에서 아버지에게로 넘어갈 순간입니다. 죽을죄를 짓고 돌아왔지만,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뛰어나와 맞이하신 아버지의 크신 자비를 온몸으로 느낀 작은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그 한없는 따뜻함, 그 극진한 환대를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이제 밥 먹듯이 용서할 때입니다. 치유 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 틈만 나면 치유와 구원의 손길을 펼칠 때입니다.

 

탕자의 귀환을 통해 드러난 영적 순환(큰아들☞작은아들☞아버지), 그것은 오늘 우리네 일상생활 안에서 부단히 되풀이되어야 할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헨리 나우웬 신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요한 23세 교황)


2.  2023년 03월 11일 토요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비유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작은아들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죄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뉘우침의 의미를 일깨웁니다.

그리고 회개에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실천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라는 아버지의 심정 표현은 온전히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복음서에서 가엾은 마음은 동정이 아니라 자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비교적 적게 관심을 받지만큰아들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집안의 일을 도맡아 성실하게 종처럼”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뜻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충실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의 귀환과 그를 위한 잔치가 마뜩하지 않습니다.

 

비유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두 아들을 대비하여 보여 줍니다.

작은아들에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비의 체험이고 행복입니다

러나 큰아들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행복이기보다 견뎌야 할 일입니다.

작은아들은 스스로 품팔이꾼이라고 하지만 아들로 대우받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스스로 종인 듯 살아 갑니다.

오늘 비유는 교회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은아들은 회개하는 죄인을큰아들은 율법에 충실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말합니다.

나는 어떤 아들의 모습입니까?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LA에서 미술관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지난번에는 게티 센터 (Getty Center)’ 미술관을 보았습니다.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전망이 좋았고,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소장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게티 미술관은 석유 사업으로 부자가 된 게티가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룬 부를 예술을 통하여 나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지만 이렇게 자신이 이룬 부를 이웃을 위해서 나눌 수 있다면 부자도 쉽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노턴 사이먼 미술관(Norton Simon Museum)’ 을 보았습니다. 신문에 글을 주시는 부제님과 함께 갔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하신 부제님은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보는 만큼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부제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을 보니 새롭게 보였습니다. 지하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노턴 사이먼 미술관은 부동산 사업으로 부자가 된 노턴 사이먼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기만 한다면 부자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철부지 아들, 싸가지 없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 아들과 철부지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큰 아들은 유산에 상관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거지꼴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옷도 주고, 반지도 주고, 잔치를 벌여 줍니다. 큰 아들은 밭에서 일하다 돌아와서 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큰 아들의 불만은 성실하게 일한 자기를 위해서는 잔치를 벌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방탕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니 잔치를 벌여 준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의 불만도 이해가 갑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 아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달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것은 모두 너의 것이 아니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죄를 지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은 형제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으니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고, 그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했으니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잡혀가는 스승을 위해서 함께 하지 못하였고, 도망을 갔습니다. 정의롭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를 벌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잘못한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치는 것입니다. 카인은 자신의 죄가 크지만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머슴으로라도 살겠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큰 아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잣대로 규정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310.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꿈꾸는 사람이 됩시다"

꿈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승리

-요셉, 예수님, 성인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제가 예전은 물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 꿈입니다. 꿈을 소재로한 시도 많습니다. 꿈이 있어야 비로소 산 사람입니다. 꿈이 없을 때 사람은 참 거칠어지고 사나워집니다. 요즘 사람들 보세요. 너무 거칠고 사나워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꿈을 잃으면 사람은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의 사람들에게서 꽃처럼 피어나는 시들입니다. 꿈에서 피어나는 시의 꽃입니다. 이런 이들이 궁극의 승리자가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성인들입니다. 왜냐? 하느님이 꿈꾸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현실화된 분들이 성인들입니다. 예전 제 자작 짧은 애송시 몇편을 나눕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있다

흰 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그 당시 장면입니다. 이 시 덕분에 그해 겨울은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봄꿈’에 이어 ‘별꿈’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 방울들”-2000.10.1.

 

요즘 산책하며 자주 부르는 제18번 노래 아침이슬 노래중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이란 대목이 연상되어 더욱 애착이 가는 별꿈이란 시입니다. 별꿈을 꾼후 강론을 쓰는 새벽 고요한 시간입니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문득 과로로 지금 입원중인, 윗 시가 속한 시집들을 곱게 편집하고 제본해준, 20년 이상 물심양면 헌신적으로 수도원과 저를 도와준 고마운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은 참 사랑스런 하느님의 딸, 자매님에게 주님의 치유의 축복을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어제 사촌 누님의 장례미사시 깜짝 놀랐습니다. 자녀들이 모두가 신자들인데 냉담중인 듯 한사람도 영성체를 하지 않고 연령회 회원 몇분만이 했습니다. 미사도 참 무미건조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꿈이 없구나. 위로부터의 끈이, 하느님의 끈, 믿음의 끈이 단斷! 끊어졌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무관한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의 단절, 믿음의 단절, 꿈의 단절이 오늘날의 대체적 보편적 현실같습니다. 참으로 자녀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최고의 유산은 믿음이자 하느님 꿈임을 깨닫습니다. 조카들의 잠든 믿음의 씨앗이 초록빛 믿음의 꿈으로 활짝 피어나는 파스카의 봄철이면 참 좋겠습니다.

 

문득 어제 끝기도후 신선한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누구보다 꿈의 사람들이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평생 날마다 함께 바치는 아름다운 시편 성무일도의 은총이 꿈의 수도자들로 만들어 줍니다. 한 형제가 집무실 밖에서 서성이다 저를 보자 청했습니다. 작년 꿈같은 아이디어로 제주도 여행을 주선했던 수사입니다.

 

“수사님, 올해 저와 함께 전주 부근의 아름다운 성지에 성지순례휴가합시다. 아주 아름다운 성지들입니다. 끝기도때 꿈처럼 꽃처럼 떠오른 생각입니다.”

 

요지의 고운 생각과 말에 “고마운 생각입니다. 염두에 두고 생각하겠습니다.” 화답했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강론써 인터넷에 올릴 수 있고 매일 미사만 드릴수 있으면 언제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휴가는 이미 잊은지 수십년이 됩니다. 하루하루 일하면서 꿈꾸듯 휴가하듯 아름다운 나날을 살고 있는데 새삼 무슨 휴가이겠는지요!

 

오늘 창세기의 요셉은 제가 참 좋아하는 꿈의 사람입니다. 참 매력적인 사람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꿈의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꿈이 없으니 질투에 눈멀어 저렇게 모질고 사납게 요셉을 사지로 몰아넣는 형제들이 아닙니까? 꿈을 잃으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사나운 괴물같은 사람들이나 무기력한 폐인들입니다. 악한 형제들의 단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러자 형제들중에 하느님의 첩자(?) 르우벤과 유다가 있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나니 이또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의 꿈은 요셉을 통해 서서히 무르익어 가다가 언젠가는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이며, 아무도 이런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섭리를 막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요셉입니다. 궁극엔 꿈의 사람들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꿈이 없어 욕심에 눈이 멀으니 사납기가 야수같고 괴물같습니다. 

 

오늘날 정가에도 꿈을 잃은 권모술수의 괴물같은 정치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정치가’가 아닌 ‘정치업자들’이라 하더군요. 고 김대중 토마스 대통령을 모 정치 평론가는 정치가를 넘어 ‘정치의 신’이라 칭했고 저역시 공감했습니다. 정치의 신하면 김대중 대통령의 절친이었던 남아프리카의 대통령까지 했던 역시 평화 노벨상 수상자 만델라가 생각납니다. 

 

다음 소작인들의 말이 방금 제1독서 창세기의 사악한 요셉 형제들을 연상케 합니다. 인간 역사는 이처럼 반복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아, 무지한 사람이 꿈을 잃으면 이처럼 사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의 사람, 파스카의 예수님을 좌절시킬수는 없습니다. 다음 예수님 말씀은 후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체험에 배어 있는 시편을 통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아무도 하느님의 꿈을 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파스카의 꽃으로 활짝 피어납니다. 꿈의 사람,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화두는 하늘나라였고 부활을 통해, 매일 미사은총을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입니다. 궁극엔 꿈의 사람, 예수님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임을 뜻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꿈의 사람으로, 파스카의 꽃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박3,19). 아멘.


[3/11(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나는 과연 첫째 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안에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죄 없다고 큰소리치며, 돌아온 동생을 손가락질하는 큰아들의 모습과 크게 가슴치며 탄식하는 작은아들의 이미지, 그리고 사랑밖에 모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양승국 신부)

 

2. 돌아온 작은아들의 이야기는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죄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뉘우침의 의미를 일깨웁니다. 그리고 회개에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실천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허규 신부)

 

3.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큰 아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잣대로 규정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5.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수철 신부)

 

[3/11(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 77일 기도]

 

하느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께서 하시는 일! 감사합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지는 일! 감사합니다.

저를 담금질 하시는 일! 감사합니다.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3월11일(토) 9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