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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4월 1일 토요일[(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4월 1일 토요일[(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22(21),20.7 참조
주님,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저를 도우소서. 저는 인간도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모든 이가
뽑힌 겨레, 임금의 사제단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바라고 이루어
영원한 생명으로 부름받은 백성이
같은 마음으로 믿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예레 31,10.11-12ㄱㄴ.13(◎ 10ㄹ 참조)
◎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
○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
○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

복음 환호송

에제 18,31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속죄와 단식으로 마련한 예물을 받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수난 감사송 1 : 십자가의 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수난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무궁한 힘으로
성자의 권능과 세상 심판이 드러났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1,52 참조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그리스도 죽음에 넘겨지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기도하는 교회에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께 마음을 두는 이들을 인자로이 돌보시어
외아드님의 죽음으로 구원하신 이들이
다시 죄에 빠져 불행을 겪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 롤로메이는 현재와 같은 불안정한 시대에 인생의 가치와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라고 책의 저술 목적을 밝혔습니다. 저자는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 인간 불행의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자아의 재발견이 불안과 불행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아를 재발견한 사람은 자유와 내적인 힘을 회복하여 창조적인 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은 머물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쉬게 하는 머물 곳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머물 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혼재하기 때문입니다. 신념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검색엔진을 돌리지만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곤 합니다. 이런 현대인들의 고독과 불안을 이용해서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 있는데 ‘JMS'와 같은 사이비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구원의 등불을 더 높이 들어야 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로 인도해야 합니다.

 

인간 불행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있습니다.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려도 우리는 마음이 아픕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앞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가톨릭신앙체험 수기에 당선된 작품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아들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남편의 죽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감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둘째는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성격차이 때문에, 무능함 때문에, 외도 때문에 원수처럼 지내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이처럼 원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내가 가진 것을 온전히 내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용서를 만날 때 부활의 꽃은 피는 것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는 길입니다.

 

셋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람쥐는 한 모금 물을 마시면 미련 없이 샘을 떠납니다. 새는 둥지를 트는데 가지 하나면 만족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아합 왕은 이미 많은 포도원이 있었지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다윗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충실한 종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겸손만이 우리를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오게 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참된 자아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강물에 떠밀려 내려가듯이 시류에 휩쓸려서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거짓된 자아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오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사제복을 입었지만, 수도자로 살지만 그 의미를 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은총 속에 살면서 그 은총에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참된 자아를 찾아 가는 길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말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나간 예언문학의 기조 중에는 사람에 의한 정치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의 백성을 철없는 것으로 여기고 거절하는 의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집요하게 그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느님과 상의해서 마음내키지 않는 결정을 내립니다.

백성의 뜻대로 그들은 사울을 최초의 왕을 세웁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염려한대로 사울은 갈팡질팡하는 모습, 염려스러운 정치를 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길보아 산에서 그의 전사소식은 이미 시작한 사울왕가와 신흥세력인 유다지파를 배경으로 하는 다윗과 솔로몬을 등장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못가고 솔로몬의 후계자 르하보암과 여론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 여로보암 사이의 갈등으로 두 왕국이 되었고 정치가 그렇듯 결국 서로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갈라진 민심이 두 나라의 멸망을 가져 왔습니다.

후대의 예언자들은 하나의 선민 이스라엘이 갈라진 사실이 속상하고 그것 때문에 멸망을 불러 일으킨 죄를 물었던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나라를 극진히 사랑해서 갈라진 나라, 갈라진 성전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의 성전에 하나의 민족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장차 펼쳐질 자신의 꿈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에제 37,21ㄴ-22)

그러나 예언자도 거기까지였고 후에 페르시아로부터 귀환했던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시도했던 성전재건의 꿈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꿈도 역사에서 사라졌고 예루살렘 한 켠에 남아 있는 ‘통곡의 벽’에서 그들은 그곳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이어서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26-27절)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영원한 성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시대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일까요?

유대인들의 박해의 대상이었고 버려진 돌이었던 주님께서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시편저자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버림받고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 안에서 어쩌면 그렇게 잘 맞는지요?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그들은 두 사람을 그들 가운데 세워놓고 누구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지에 대해서 추궁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 사도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임을 강조하며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1-1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성전이 되어서 하느님과 백성을 이어주시는 영원하 계약이 되신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했을 때, 예수님에 대해서 그해 대사제인 가야파가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라고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다가오는 사실을 아시고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지 않고 그곳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에프라임이라는 고을로 제자들과 가시어 그곳에 머므십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다시 올라가십니다.

많은 이들도 예루살렘을 올라가 성전에 모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56절)라며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때’,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준비하십니다.


230331. 사순 제5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이들 안에서 말씀이 되는 일, 곧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 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하느님 중심의 삶

-자녀답게-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시편18,2)

 

오늘은 성요셉성월, 3월의 끝날이자 내일은 4월의 첫날입니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임을 배웁니다.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벌써 주님 부활을 앞당겨 경축하는 축제 분위기의 날들입니다. 

 

진리 탐구에 전념했던 분들의 말씀은 종파를 초월하여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다음 불가 선사의 말씀도 흡사 사막교부들을 연상케 합니다. 어제 선물받은 책안에 나오는 봉암사의 조실이자 조계종 8대 종정이었던 서암스님의 일화입니다.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것 없다.”

 “그래도 한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생(生)을 어떻게 정리하시렵니까?”

 “이 좋은 그대로.”

 “극락과 같습니까?”

 “같다.”-

 

얼마나 멋진지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참으로 진리를 살았던 구도자 서암 고승이었음을 봅니다. 사찰의 두 자산은 노승老僧이요 노목老木이라 하는데 고승高僧인 노승이면 더욱 좋겠고 천주교 수도원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진리이겠습니다. 어제 오후는 참 흡족한 날이었습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산 분들 여덟분에게 고백성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녀답게 영적승리의 삶을 사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성녀처럼 사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겸손과 사랑의 훈련장에서 참 성실히 사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구도자처럼 사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격려의 조언을 드렸더니 모두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환히 피어나는 얼굴들이 그대로 자녀답게 살았음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미사전례의 절정은 성체 모시기 전 마치 만세 부르는 자세로 양손을 펴들고 함께, ‘하느님의 자녀되어 삼가 아뢰오니’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일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삶의 중심적 가르침이 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하느님의 중심의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완고했던 무지한 유다인들은 주님을 믿지 못했지만 우리는 다음 예수님 말씀을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영원한 삶의 모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일치의 삶이 깊어져 신적일수록 더욱 인간적인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적임과 인간적임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신적神的이자 인간적人間的인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며 믿는 이들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면초가의 위기 상황중에도 하느님의 아드님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분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입니다. 적대자들에 포위된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예레미야의 상황이 예수님과 흡사합니다.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의 “마고로 비싸빕”이란 말마디가 예레미야의 위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얼마나 견고한지 다음 두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던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하느님의 이름은 “I AM”이라 했습니다. 이를 보강하여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하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잘 드러납니다. 어제 병상에 있는 분에게 보내드린 격려성 응원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자매님이 나을 때까지 저와 제 절친이신 예수님께서 늘 동행하실 것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입니다.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호흡은 길고 깊게 하세요.”

 

오늘 제1독서 즉시 이어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양노래의 고백도 힘이 납니다. 하느님 사랑의 찬미, 찬양보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수행도 없습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이사20,13)

 

여기 가난한 이들은 아나뷤으로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참으로 마음 가난한, 겸손한 이들을 뜻하니 바로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앞서 생략된 구절을 인용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씀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말하지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이사20,9)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인지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후렴이 은혜롭습니다.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시편18,7). 아멘.


[4/1(토)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주님께서는 당신의 ‘때’,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준비하십니다.(정인준 신부)

 

3.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이영근 신부)

 

4.  하느님의 이름은 “I AM”이라 했습니다. 이를 보강하여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하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잘 드러납니다. (이수철 신부)

 

[4/1(토)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98일 기도]

 

하느님! “I AM” 하느님!

 “I AM with you"

 “I AM for you"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4월1일(토) 7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