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4월 10일 월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를 데려오셨으니, 주님의 가르침을 언제나 되뇌어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또는>
말씀하신 대로 주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다. 우리 모두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주님이 영원토록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의 종들이 신앙으로 받은 성사를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14.22-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 저를 타이르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 뛰노니, 제 육신도 편안히 쉬리이다. 당신은 제 영혼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구렁을 보지 않게 하시나이다. ◎
○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
부속가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8,8-15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이름을 믿고 세례로 새로 난 저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니, 이제는 죽음이 그분을 누르지 못하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영원한 구원의 길로 들어선 저희가
이 성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신학교에서 ‘논리학’을 배웠습니다. 강론을 하기 위해서는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두서없는 강론을 듣는 것은 상당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중언부언하는 강론도 분심이 들게 합니다. 논리학을 배우는 이유는 내가 생각한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도 논리학은 좋은 도구가 됩니다. 논리학에는 삼단논법이 있습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을 귀납법이라고 합니다. 공자도 죽었다. 부처도 죽었다. 그래서 사람은 죽는다. 이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반면에 전제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결론을 이끄는 것을 연역법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는다. 공자도 죽었다. 그래서 나도 죽는다. 이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하느님나라에 대해서는 비유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상의 전환’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비’가 되어 일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깨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율법학자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지평을 넓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튀르크에의 지진 피해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장애인들은 본인이 죄를 지었거나, 조상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장애를 가진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통과 고난은 삶의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을 울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귀납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부활’은 전제되는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해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의심이 많았던 토마 사도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성서에 예언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유대인이었기에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체와 성혈’을 축성합니다. 사제의 축성이 끝나면 제병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가 됩니다. 그리고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라고 고백합니다.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들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어떻게 드러나야 할까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삶의 자리였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신 삶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 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 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강론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복음: 마태 28,8-15: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집어주며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8절)
그들은 상상도 못 한 놀라운 일들을 보았다.
그 여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였다.
바로 얼마 전에 그분이 안장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무덤이 비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빈 무덤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천사들이 그들을 무덤으로 데려간 것이다.
그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9절) 하신다.
그들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았고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0절)
주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경비병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때, 사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13절) 라고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무덤은 권력자의 명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몰래 그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설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안 된다.
유다에게 돈을 주어 배신하게 했던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도 돈을 주고 입을 막아 신앙을
무덤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칠 생각이었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장되고 무덤이 봉인되기 전에
시신을 훔쳐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무덤에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골방에 숨어있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이었다.
수석 사제들은 무덤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빌라도에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치고서는
부활하셨다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게 되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마태 27,64)이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돈을 주고 그분의 목숨을 사더니, 그분이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시니,
또다시 돈을 주고 그분이 부활하신 증거를 지우려 했다. 그들은 돈만 쓰고 말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진리를 은폐하려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려보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비병들만 매수해서 가릴 수 있었다면, 그 진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은폐하기보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그렇다면,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혹 여러분도 그분이 어디에 모셔졌는지 모르십니까? 진정,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디에 모시고 계십니까?
‘부활하신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부활은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는지?’를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당연히 무덤에서 벌어집니다. 곧 죽음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니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는 죽음 없이는 부활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 삶 안에서 죽음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냥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으로 건너가는 죽음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대체 왜 죽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우선 모든 죽음의 공통적이고 일차적인 이유는 ‘태어났음’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서는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탄생이 죽음의 제1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한 분’ 예외가 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바로 이 분에게서 드러납니다.
이를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탄생의 결과라고 말하기보다,
그분이 죽을 수 있도록 탄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탄생’이 발생했다는 것은 탄생이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분명 이 죽음에는 탄생이 있습니다. 곧 탄생에 죽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탄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죽음이 부활의 새로운 탄생이 됩니다.
여기서는 탄생, 죽음, 부활이 하나로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이 참 생명을 인간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이 얼마나 크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신비인지요!
이를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시고 잉태되셨다. 그리고 세상은 만들어졌다.”
그러니 ‘못 박힘’은 성령으로 날인되어 잉태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잉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무덤으로부터 부활한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비로소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야 합니다. 곧 우리는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41-42)
그러니 우리에게는 부활을 삶으로 증거 해야 하는 소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 봅니다. ‘이 부활’, ‘이 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이러한 삶을 파스칼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까지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통과 죽음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고통받고 죽으면 부활을 맛볼 것입니다. 고통 받기를, 죽기를 거부하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 안에 사랑의 순교가 자리 잡으면, 곧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면 그 안에서 함께 죽으시면서 함께 살아계신 그분의 생명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지금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죽음 가운데 있고,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의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고통과 죽음의 삶 한가운데 모셔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 안에 살아계신 야훼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희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 동행하시며 저희와 함께 부활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사랑, 믿음, 희망-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한 아드님을 하느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우리는 평생 매일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더불어 방금 부른 화답송 시편 가사와 곡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비단 부활대축일뿐 아니라 평생 매일 불러도 좋겠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의 오늘이 이날이요 부활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부활 성야미사시 ‘파스카 찬송’에 이어 오늘 복음전 부속가는 또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수십년동안 마르코 수사님이 불러오다가 이번 부터는 라우렌시오 수사님이 부르게 된 것도 각별한 느낌입니다. 다음 부분이 더욱 파스카의 기쁨을 더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그의 무덤을 부활하신 분의 영광을
목격자 천사들을 수건과 옷을 내보았노라.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우리 각자 삶의 현장을 상징하는 갈릴래아가 바로 살아계신,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기쁨이 온누리에 가득합니다. 만발했던 봄꽃들이 봄비에 지자마자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나뭇잎들이 꿈꾸듯 펼쳐집니다.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꿈이 신록의 기쁨, 신록의 꿈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얼마전의 깨달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 좋은 분이 선물로 딸기를 사왔는데 순간 집무실을 딸기 열매 향기로 가득 채웠고 저절로 나온 사랑의 덕담입니다.
“어, 꽃만 향기가 있는게 아니라 열매도 향기가 있네요!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나뭇잎처럼, 꽃 향기보다 더 좋은 열매 향기가 자매님 사랑의 향기같습니다. 파스카 주님을 닮아 익어 갈수록 아름다운 삶의 열매 향기이겠습니다.”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드린 수녀님과 나눈 사랑의 덕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런 진정성 가득한 사랑의 덕담이 서로를 자유롭게하고 행복하게하고 향상시킵니다.
“신부님,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수녀님이 필요합니다!”
흡사 선문답같습니다. 달리 필요한 것이 없어 즉각 솟아 나온 답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아주 예전 어느 수녀님과의 문답도 생각납니다.
“신부님,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수녀님을 좋아합니다!”
달리 먹고 싶은 것도, 필요한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기에 얼떨결 대답했고 만족했습니다. 수녀님이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주님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느냐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주님 당신 하나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은, 단하나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실 파스카의 주님뿐일 것입니다. 바로 저는 이것을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배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파스카의 주님과 토마스 아퀴나스와의 대화입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말했다. 너는 무슨 상급을 받기를 원하느냐?
(You have spoken well of me, Thomas. What is your reward to be?)
“오직 당신뿐입니다. 주님!”
(Nothing but youself, Lord!)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답변이 정말 멋집니다. 이 대답 말고 무엇이 있겠는지요. 어제 어느 좋은 분이 수도원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초콜렛 작은 것 한갑씩 나눠주라 선물했고 둥그런 작은 종이에 영어 한마디, “For you(너희를 위하여)”가 한눈에 들어 왔고 즉시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 “I AM”(나는 있다)”라는 불완전한 하느님 이름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에 “For you(너희를 위하여)”를 붙여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또 하나 “With you(너희와 함께)”를 붙여,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를 붙여야 온전한 하느님의 이름이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있는 임마누엘 하느님은 바로 파스카 예수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날 자리는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이 아니라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 갈릴래아입니다. 어떻게 하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을 살아갈수 있을까요? 그 답을 알려드립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의 빈무덤 소식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간 제자는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여기 나온 세분 모두가 예수님 사랑에는 막상막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단연코 돋보이는 인물은 애제자 요한입니다. 저는 익명의 애제자를 요한이라 부르겠습니다. 그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빈무덤에까지 달릴 때 수제자 베드로보다 앞섰고, 도착한후 수제자 베드로 뒤에 따라 들어감으로 겸양의 사랑이 빛납니다. 다음 한마디가 애제자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입증합니다.
‘그제야 무덤에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전광석화, 빈무덤을 보는 순간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의 부활을 직감한 애제자 요한입니다.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폰토스 왕국 국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젤라 전투에서 간단히 이기고 나서 원로원에게 보낸 편지의 전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여기 애제자의 경우는 “왔노라, 보았노라, 알았노라”가 적절하겠습니다.
둘째,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증언이요 믿음의 선포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그 모범입니다. 예전의 유약했던 배반자 베드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난후 수제자의 위상을 완전히 회복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베드로가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한 설교로 베드로의 설교들 가운데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사건이 잘 요약되어 있고 루가의 신학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확신에 넘친 고백이 그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용사가 된 베드로요 우리의 믿음에도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만났다면 믿음의 선포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이래야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살 수 있겠습니다.
셋째 희망입니다.
희망의 샘에서 샘솟는 사랑이자 믿음입니다. 파스카의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주님 사랑에, 주님 믿음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초연하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삶은 천상 희망을 향한 순례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인 애제자 요한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주인공인 베드로가 주님을 증언했다면, 오늘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가 파스카 주님께 희망을 둘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신 파스카 예수님이 바로 우리 의 궁극의 희망이자 미래입니다. 바오로의 강론이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어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것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땅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지 말고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파스카 예수님께 희망을 둘 때 가능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 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속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얼마나 놀랍고 새로운 충격적 고백인지요. 우리의 희망이자 우리의 생명이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바로 우리 생명의 열쇠이자 행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파스카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날로 깊어질수록 파스카의 생명과 기쁨 충만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다시 한번 고백하고 싶은 파스카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희망,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 희망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빕니다. 아멘.

[4/10(월) 부활팔일축제 월요일, 되새김구절]
1. 바리사이들은 장애인들은 본인이 죄를 지었거나, 조상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장애를 가진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통과 고난은 삶의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조재형 신부)
2. 그들은 주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돈을 주고 그분의 목숨을 사더니, 그분이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시니,
또다시 돈을 주고 그분이 부활하신 증거를 지우려 했다. 그들은 돈만 쓰고 말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진리를 은폐하려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려보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것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땅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지 말고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파스카 예수님께 희망을 둘 때 가능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 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속에 나타나실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4/10(월) 부활팔일축제 월요일, 제 107일 기도]
하느님!
'부활팔일축제 월요일' 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4월10일(월) 5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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