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4월 17일 월요일[(백) 부활 제2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니, 이제는 죽음이 그분을 누르지 못하리라. 알렐루야.
본기도
파스카의 영약으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이 땅의 부모에게 받은 모습을 벗어 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4,23-31
그 무렵 23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가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자기들에게 한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24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
“주님,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25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주님의 종인 저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26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모였구나.’
27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곧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을 없애려고,
다른 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이 도성에 모여,
28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
29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0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31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께 피신하는 이 모두 행복하옵니다.
또는
◎ 알렐루야.
○ 어찌하여 민족들은 술렁거리며, 겨레들은 헛된 일을 꾸며 대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메시아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일어나며, 군주들이 모여 음모를 꾸미는구나. “저들의 오랏줄을 끊어 버리고, 저들의 사슬을 벗어 던지자.” ◎
○ 하늘에 앉아 계신 분이 웃으신다. 주님이 그들을 비웃으신다. 마침내 진노하시어 꾸짖으시고, 분노하시어 그들을 떨게 하시리라.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
○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부수고, 옹기그릇 바수듯 바수어 버리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8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에게 이토록 큰 기쁨의 원천을 마련해 주셨으니
기쁨에 가득 찬 교회가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영원한 즐거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저는 다섯 살 때 집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 버스를 탔고, 내렸는데 버스번호를 몰랐습니다. 돌아갈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 집을 잃어버리면 파출소로 가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파출소에서 하루를 지냈고, 다음 날 아침에 아버님이 저를 찾으러 왔습니다. 아버님은 실종신고를 했고, 파출소에서는 저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파출소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저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병원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병명은 ‘유행성 출혈열’이었습니다. 40도가 넘는 고열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지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오셔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증언으로는 추기경님께서 기도하면서 파랗게 변했던 제 손끝이 빨갛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의사 선생님의 치료로 저는 보름 만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어린 간호와 의사 선생님의 치료가 없었다면 저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삶의 고비마다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삶의 방향이 바뀐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 누워서 지내야 했던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했던 소경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나병환자는 깨끗해 졌습니다. 듣지 못했던 귀머거리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악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정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사람들이 손에 돌을 들고 예수님께 “유다의 율법에는 부정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도 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할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희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소녀에게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탈리타쿰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소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라자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에 있던 라자로는 다시 살아나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의 학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삶이 거듭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육의 삶이 아닌 영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강론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3,1-8: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며, 새로 태어나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니코데모는 두 가지 태어남이 있지만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두 가지 태어남은, 하나는 땅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하늘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육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영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죽을 운명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영원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남자와 여자에게서 비롯하고 하나는 하느님과 교회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4절)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
‘물과 성령’이란 바로 세례를 의미한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자 새로운 탄생이다.
부활한다는 것은 죽음 후에 새로이 창조된 것으로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물에 잠김으로써 죽은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물에 잠기는 것은 매장을 상징하고 머리를 물에서 들어 올리는 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6절)
육이라는 것은 죄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썩음을 모르시고 죽음을 넘어
생명을 주신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 멸망을 초래하는 삶에서 우리 자신을 떼어 놓아야 한다.
육적인 삶은 죽음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동반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는 것은 바로 “성령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영적이다.”라는 뜻이며,
영예와 은총에 따른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는 말씀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인간의 능력과 삶이 다다를 수 없는
그 이상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우리 자신이 죽고, 자신을 끊고,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새로이 태어날 수 있고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며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30416.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들려줍니다. 곧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라고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하는 일, 곧 ‘자비를 베푸는 일’이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요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져주며, 짊어져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고,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져주고 걸머져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
-공동체, 평화, 희망-
오늘 부활 제2주일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대희년을 맞이한 2000년 부활 제2주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사도’라 불리는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수녀를 시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제정했습니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20세기 격변의 상황을 돌아보며 “비극적 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비의 메시지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3년이 지난 2023년 지금도 여전히 갈수록 자비의 메시지는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도처에서 계속되는 전쟁에 내외적으로 계속되는 혼란한 상황이 하느님의 자비뿐이 답이 없다는 사실이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는 시대입니다. 말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잊어 자초한 재앙입니다.
한밤중 밤1:30분 강론 쓰다가 체험하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어제 키보드 청소하다 손상을 준 듯 강론을 쓰다 보니 키보드가 고장이 났는지 아무리 해도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 손으로 쓸때는 전혀 문제될리 없었지만 디지털 시대는 대책이 전무합니다.
어쩔수 없이 이 방면에 전문가인 한밤중에 곤히 잠자는 원장 수사를 깨울수 뿐이 없었고, 쾌히 웃으며 잠깬 원장 수사가 자신의 키보드와 교체해 줌으로 강론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그대로 천우신조天佑神助, 구사일생九死一生, 강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형제애를 통한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한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한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그윽한 위로가 되는지요!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아무리 불러도 정겹기 한이 없는 가사와 곡의 화답송 후렴을 오늘 종일 기도 노래로 바치며 지내고 싶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셔라” 계속되는 후렴의 감미로운 시편 136장도 읽으며 감상하려 합니다.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홀로 당신만이 큰 기적을 하셨나니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136,1-4)
무려 26절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시편을 노래하면 깊은 감동에 젖게 됩니다.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수도자들입니다. 새삼 이런 주님의 자비도 공부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부단히 노래할 때 하느님의 자비는 온삶에 스며들어 자비의 사람들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생과제도 단 하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의 심판도 자비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지요. 날로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겠습니다. 바로 자비가 영성의 잣대이자 심판이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참 좋은 자비의 선물에 감동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보답하려는 의욕도 충만해짐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 셋입니다.
첫째, 사랑의 공동체 선물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은총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사랑에 넘치는 아름다운 주님 자비의 공동체인지요! 순전히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활짝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원이 꿈꾸는 공동체입니다. 말그대로 자발적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세상을 꿈꾼 공산주의 혁명이었지만 언감생심, 하느님 자비의 은총없이는 어림없습니다.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집 저집에서 빵을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었다.”
참 아름다운 공존공생, 사랑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순전히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은총의 선물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숙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적극 참여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고 실천의 훈련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공동체에 대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자비의 배움과 훈련으로, 자비의 실천으로 화답해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상천국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니, 우리 수도공동체의 이상이자 희망이기도 합니다.
둘째, 평화의 선물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을 다 소유했어도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의 선물이 절실합니다. 참평화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쟁취하거나 거금으로 사올 수 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임이 드러납니다. 자비와 평화의 주님이 임재하시면서 불신과 불화, 두려움의 벽은 활짝 열린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말그대로 벽이 변하여 문이 된 것입니다. 활짝 열린 문으로 평화와 함께 물밀듯이 들어오는 기쁨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벽은 문이 되고 공동체 한 가운데 자리 잡으시고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크게 기뻐하니 평화에 이은 기쁨의 선물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와 더불어 선사되는 성령과 용서의 선물입니다. 성령과 용서의 선물이 평화 공동체의 완성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참으로 집요하십니다. 여드레 후에 마지막 남은 회의주의자 토마에게 나타나 그의 의심의 벽을 평화로 허물어 버리고 그의 고백을 받아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즉각적인 토마 사도의 감격에 넘친 고백의 반응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평화로 인해 이제 제자들은 평화와 기쁨, 성령과 용서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협조도 필수적입니다. 평화의 은총의 선물에 응답하여 우리 또한 평화를 배우고 공부하며 평화의 실천 훈련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역시 평화의 배움. 평화의 훈련입니다. 산상설교중 참행복이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피스메이커(the peacemakers)”가 되라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the peacemakers)!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셋째, 희망의 선물입니다.
희망이 죽으면 이어 사랑도 믿음도 시들어 죽습니다. 그리하여 성서는 한결같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 합니다. 파스카의 희망,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기쁨이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최고의 선물이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희망이 없으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부패와 타락, 유혹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희망의 빛이 사라지만 바로 거기가 지옥이요 사람들도 품위와 향기를 잃고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파스카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희망입니다. 아니 하느님 자체가, 파스카 예수님 자체가 희망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전체가 ‘희망에 대한 감사’입니다. 희망 찬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우리를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게 합니다. 바로 희망은 기쁨과 평화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 평화입니다. 그러니 자녀나 이웃에게 희망을, 꿈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실질적 사랑인지 깨닫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인지 대부분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은 금보다 훨씬 값지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은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일이 없디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그분을 희망하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기에 시련과 고통중에도 충만한 기쁨중에 즐거워하는 베드로와 그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신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베드로입니다.
역시 희망도 우리의 최선을 다한 응답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우리 역시 끊임없이 희망을 배우고 공부하고 훈련하자는 것입니다. 희망의 배움, 희망의 훈련입니다. 매일 자비하신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두고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에 정성을 다함이 제일 좋은 희망의 배움, 희망의 훈련일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참 좋은 선물 셋을 선사하십니다. 사랑의 공동체, 평화, 그리고 희망입니다. 우리 또한 자비하신 주님께 끊임없고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삶으로, 평화와 희망의 배움과 훈련의 삶으로 충실히 응답하도록 합시다. 아멘.
[4/17(월) 부활제2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을 만나서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삶이 거듭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육의 삶이 아닌 영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2.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우리 자신이 죽고, 자신을 끊고,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새로이 태어날 수 있고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며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참 좋은 선물 셋을 선사하십니다. 사랑의 공동체, 평화, 그리고 희망입니다. 우리 또한 자비하신 주님께 끊임없고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삶으로, 평화와 희망의 배움과 훈련의 삶으로 충실히 응답하도록 합시다. 아멘.(이수철 신부)
[4/17(월) 부활제2주간 월요일, 제114일 기도일]
하느님!
영의 삶으로 살게 하소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4월7일(월) 5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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