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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4월 23일 주일[(백) 부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4월 23일 주일[(백) 부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차분히 살펴볼 때입니다. 무엇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어려움과 슬픔이 있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삶의 순간순간에 살아 숨 쉬기를 청하며,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성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합시다.

입당송

시편 66(65),1-2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이 백성이 영혼의 젊음을 되찾아 끊임없이 즐거워하게 하시니
저희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바라며 기다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14.22ㄴ-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6(15),1-2ㄱ과 5.7-8.9-10.11(◎ 11ㄱ 참조)
◎ 주님,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 저를 타이르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 뛰노니, 제 육신도 편안히 쉬리이다. 당신은 제 영혼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구렁을 보지 않게 하시나이다. ◎
○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

제2독서

<여러분은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1,17-21
사랑하는 여러분, 17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루카 24,32 참조
◎ 알렐루야.
○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빛이신 주님, 주님 부활을 기뻐하는 온 교회를 살펴 주시어, 교회가 인류의 발전과 공동선을 위하여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온 세상에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2. 우리나라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지속적인 경제 발전 속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저희 나라를 굽어살피시어, 저희가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공평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데 앞장서게 하소서.

3. 노숙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저마다의 사정으로 가정을 떠나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보호하시어,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게 하시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찾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4.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의 주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한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새 희망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며 더욱더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저희에게 이토록 큰 기쁨의 원천을 마련해 주셨으니
기쁨에 가득 찬 교회가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영원한 즐거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우리 삶에는 의욕을 잃는 순간이 적지 않습니다. 먹고살 일이 막막하게 느껴져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심으로써 절망 속에서 희망이 자라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힘겨운 길들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만남으로써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길에 함께하시며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시는 가장 가까운 길벗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하느님께 순종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이 되어서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무서운 호랑이 앞에 있는 토끼처럼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찬란한 문명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굶주림을 피해서 갔던 이집트는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을 충분히 먹일 수 있을 만큼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피라미드를 건설할 정도로 과학이 발전하였습니다. 요나가 회개를 선포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는 규모가 엄청 컸습니다. 아시리아는 강한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망국의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에 감탄해야 했습니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로마는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통치하였습니다.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로마의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와 사회 구조에서는 당대의 선진국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굳게 간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꿈꾸었습니다. 비록 강대국의 힘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갈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부활신앙입니다.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권력으로 남을 침략해서 얻는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나눔을 통해서 얻는 평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십자가와 희생을 통해서 얻는 자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미리 예고하신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공동체는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가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터를 잡고 홍익인간의 이상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무서운 호랑이 앞에 있는 토끼처럼 우리 민족의 주변에는 찬란한 문명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강한 힘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불교는 오랜 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 사절을 보내기도 했고,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침략은 막아냈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국토를 침략하였습니다. 한일합방으로 36년간 우리민족을 식민지로 통치하였습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일본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냉전 시대에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그 러시아는 바로 우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과 함께 참전하였습니다. 미군은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으며 우리의 경제, 문화, 사회의 많은 것들은 미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5000년을 이어오는 우리 민족은 많은 외세의 침략이 있었지만 굳건하게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으며 굶주림을 참아야 했지만 이제는 가난한 나라를 도와 줄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K Culture"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기는 슬픈 역사가 있었지만 우리는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굳게 간직하였습니다. 우리의 얼과 혼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얼과 혼을 지켜낸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2. 부활 제 3주일 - 동행 / 김찬선 신부님 ~

 

오늘 엠마우스 얘기를 묵상하자니

주님께서 드셨던 백 마리 양 비유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바로 비유의 잃은 양이라고 연결이 되었던 것이지요.

 

엠마오 두 제자는 왜 엠마오로 갔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단 곧 주님의 공동체서 이탈하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제자를 제멋대로 이탈한 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겠습니까주님의 진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주님의 공동체에서 이탈했겠습니까?

주님의 공동체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제 저는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이 문제이고,

제자들의 배에 주님께서 안 계시기에 풍파를 만난 것이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주님의 공동체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신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공동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와 같이 살던 자매가 공동체를 떠난다면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럿이 떠난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 공동체에도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강하게 반문합니다.

언제나 어디나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 공동체에 안 계신다니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그럴 리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부활하셨습니다그런데 우리 공동체에는 죽어 계신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드려도 그분을 우리 공동체에 모셔 들이지 않기에,

매일 기도를 드려도 그분 말씀을 우리가 공동으로 듣지 않기에 죽어 계십니다.

 

그리고 매일 예물을 바쳐도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 예물을 바치기에,

매일 성체를 모실 때 주님은 모셔도 형제는 받아들이지 않기에,

매일 주님의 몸인 빵을 먹어도 그 빵을 형제와 나누어 먹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형제를 내친 것입니다.

 

물론 공동체의 잘못도 있지만 개인의 잘못도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엄연히 살아계시는데도 주님을 보지 못한 잘못입니다.

욕심과 절망에 눈이 멀어 우리 형제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튼이런 이유로 공동체에서 이탈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동행하시며 그들의 말을 경청도 하시고공감도 해주시며 가르쳐주십니다.

그랬더니 떠난 형제들의 마음이 비로소 움직입니다감동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떠나려는 형제자매에게 할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이것을 먼저 해준 뒤에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며 설득해야 합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설득이것이 다 중요하지만

그런데 다가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가가야 그다음 것들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가가려는 마음 곧 사랑과 경우에 따라 용기도 있어야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떠나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거나 보고 안타까운 마음은커녕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떠나려는 그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거나 떠날 테면 떠나라는

그런 마음이면 결코다가가지 않겠지요.

 

또 사랑의 마음이 있어도 다가감을 그가 거부할까 봐 못 다가갈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이 사랑에는 용기도 있어야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갔으니 그다음은 무식하게 바로 설득하여

성급히 돌려세우려 들지 말고 천천히 그의 길을 같이 걸어주며

그의 말을 듣는 것부터 하고 동감해주는 것에 진심이어야 하고 설득은 나중입니다.

 

하이라이트는 그러나 빵을 같이 나눔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과 빵을 같이 나누셨습니다.

 

멋진 식당이나 술집에 데려가서 음식이나 술을 같이 마실 수도 있고,

손수 음식을 장만하여 같이 먹고 마시면 더 감동적이어서

그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타오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우리의 말씀의 전례와 빵을 나누는 성찬례가 이런 것이면 좋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422.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고통과 좌절에서도 언제나 “믿음”과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떠오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 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제가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언제나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33,18)

 

“나다.” 참 정다운 우리말이자 오늘 복음에서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알게 되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은 바로 “나다(I AM)”인분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탈출기3장14절에서 모세에게 하느님 자신이 밝힌 이름이기도 합니다.

 

“나다.”란 말을 맨처음 들은 것은 약50년전 제가 20대 청년 교사 시절 1970년대 중반 흥사단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김동길 박사에게 들었습니다. 당시 20대 젊은이들의 진리를 찾는, 민주화를 향한 열정은 참 뜨거웠습니다. 김박사님 말고도 함석헌 선생님, 안병욱 교수님, 김형석 교수님, 안병무 박사님등 많은 기라성같은 저명 민주운동인사들과 민중신학자들의 강연을 즐겨 들었고, 법정스님의 책은 모조리 구입해 읽었으며 많은 분들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또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와 '사상계' 잡지', 함석헌 옹의 '씨알의 소리', 안병무 박사의 '현존'을 챙겨 읽었고, 독일의 저항신학자 본훼퍼의 '옥중서간'도 애독했습니다. 또 초등학교 제자들에게는 생일때 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눈속에서의 3개월','어린왕자' 등 다양한 명작을 선물했습니다.

 

김동길 박사님의 설명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아버지가 밤 늦게 집에 돌아오셨을 때 대문을 두드리면, 아들이 방에서 듣고 나와서 “누구세요?” 물으면 “나다.” 대답할 것이고, 이때 아들은 저절로 아버지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에게 “나가 누구냐?”고 묻는 아들이 어디있겠는지요.

 

바로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구는 2012년에 세워진 저희 요셉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성심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로 수도원을 찾는 많은 이들이 위로와 평화를 얻는 성구이기도 합니다. 예나 이제나 두려움에 포위되어 사는 사람들같습니다. 성경에도 무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가 무려 365회 나오는데 하루하루 날마다 상기하라는 것이겠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밤중 물위를 걸어오던 예수님께서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어났을 때 두려움에 떠는 배안에 있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오늘 인생 항해 중인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겠습니다. “나다(I AM)”란 하느님 이름이 은혜롭습니다. 늘 반복해 들어도 새롭습니다. “나다(I AM)”를 보강하여 다음같이 쓰면 완벽해집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바로 하느님은, 부활하여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성구도 이를 입증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런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해서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한후 광적으로 몰려드는 군중을 피해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산으로 물러가셨고,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목적지를 향해 항해 도중이었습니다. 서른 스타디온은 5km 정도 거리로 갈릴리 호수의 절반 거리에 해당됩니다. 호수라 하지만 호수 한복판에서는 바다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호수 한복판에서 한밤중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드높아 질 때 제자들의 두려움도 점점 커졌을 상황에서 유령처럼 자기들을 향하여 걸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제자들은 참 무섭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들려온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다정한 말씀은 얼마나 위로와 평화가 되었겠는지요! 주님은 멀리서도 기도중에 제자들의 곤경을 환히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삼 두려움에 대한 근본 처방은 주님의 이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함께 할 때 두려움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인생 항해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살다보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지요. 바로 이럴 때 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언제나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음성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시편 23장에 나오는 모두가 좋아하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1절 말씀도 기도로 바치면 좋겠습니다. 말마디를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무서울 것 없어라.”로 바꿔 고백기도로 바쳐도 좋겠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혼자든 함께 든 여기 수도자들처럼 늘 시편 성무일도를 습관화하여 평생 날마다 규칙적으로 바칠 때 늘 주님 현존 의식 중에 빛속에 살 수 있을 것이며 두려움의 어둠도 걷힐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이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순식간 목적지에 가 닿았으니 그대로 기적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 온 뒤안 길을 보면 어느새 여기까지 와있나 놀랄 때가 있을 것이며, 순간 주님은 늘 함께 해 오셨음을 은혜로이 깨닫기도 할 것입니다. 제가 여기 요셉 수도원에 1988년 7월11일부터 정주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35년 공동체 배안에 몸담고 인생항해여정중인데 살아온 35년이 순간 같으며 그동안 주님께서 늘 함께 해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대로 인생항해여정중인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흡사 제자들의 공동체란 배가 분열의 위기에 처한 불안한 분위기입니다. 바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렸으니 그들의 과부들이 배급을 받을 때 홀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분열만큼 큰 해악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일치를 꾀하나 사탄을 분열을 꾀합니다. 바로 공동체를, 내 자신을 분열시키는 죄입니다. 외적의 침략이 없어도 내적으로 분열하면 저절로 망합니다. 바로 우리나라가 극히 경계해야 할 사항입니다. 내적 분열로 인한 혐오와 증오가 도를 넘었고 대립과 갈등이 너무나 격화되어 있습니다. 

 

밖의 적과 대결하기도 역부족인데 내적분열로 서로가 적이 되면 이보다 어리석고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한국이란 공동체의 배가 안전 항해 할 수 있도록 각별히 다양성의 일치에 유념하며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사도행전의 열두 사도의 리더십이 빛납니다. 이런 지혜로운 처방은 순전히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식탁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사도들은 참으로 지혜롭게,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여 신속하게 우선 순위를 확실히 하고 역할 분담으로 공동체의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여 일치를 이룹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니 이제 탄탄대로의 인생항해 여정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입니다. 여전히 계속될 어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인생항해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의 경우 요셉 수도원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35년간 인생 항해 여정중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은 미사와 강론을 통한 주님의 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됐음을 은혜로이 깨닫습니다.

 

"주님, 우리가 당신께 바랐던 그대로,

 어여삐 여기심을 우리 위에 내리소서."(시편33,22). 아멘.


[4/23(일) 부활 제3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우리가 공동체를 떠나려는 형제자매에게 할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이것을 먼저 해준 뒤에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며 설득해야 합니다.(김찬선 신부님)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 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제가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식탁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이수철 신부)

 

[4/23(일) 부활 제3주일, 제120 기도일]

 

하느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4월23일(일) 21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