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5월 5일 금요일[(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주님은 당신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저희를 속량하시어,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가 되게 하셨나이다. 알렐루야.
본기도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성자의 피로 구원받은 저희가
하느님의 힘으로 살며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또는
◎ 알렐루야.
○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
○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부수고, 옹기그릇 바수듯 바수어 버리리라. ◎
○ 임금들아, 이제는 깨달아라. 세상 통치자들아, 경고를 받아들여라.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 발에 입 맞추어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가족이 드리는 제물을 자비로이 받으시고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로
저희가 받은 것을 잃지 않고 영원한 선물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 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자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사건과 부활신앙’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부활사건은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사건은 증인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의 첫 증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여성의 증언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당당하게 부활의 증인으로 여성을 이야기합니다. 부활사건이 있었다는 공동체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사건으로 제자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선장이 없는 배는 거친바다를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삶이 변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변하였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였습니다. 고통도, 박해도, 죽음도 전혀 겁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실천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변화된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현대의 과학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현대와 같은 과학기술과 도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증언과 변화된 제자들의 삶이 부활사건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사건에 대한 규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렇습니다. 부활은 사건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선포해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의 핵심은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희망입니다. 캄캄한 지하무덤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것은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자 우리에서 당당하게 기도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삶, 사랑이 없는 삶, 희망이 없는 삶은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는 것,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의 삶의 이정표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행동, 기도를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기도했으며, 서로 격려하였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늘 감사드리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어린이들에게는 세상 온천지가 호기심 천국입니다!
언젠가 홀로 피정 오신 형제님을 위해서 제 주특기인 해물 라면을 끓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김치도 내오고, 햇반까지 데워드리니,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하신다는 생각. 오직 딱 한 사람, 나만을 위해 손수 빵을, 그것도 영원한 생명의 빵을 마련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생각.
오늘은 보기만 봐도 사랑스러운 어린이날입니다. 돌아보니 저도 어린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베이비붐 시대여서 아이들로 넘쳐났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많다 보니 학교가 다 수용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전 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할 정도였습니다. 5학년 때 제 번호가 100번일 정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한 아이 한 아이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많이 부족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선생님들께서는 담당하던 아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한 학년이 다 끝나갈 때까지도 반 아이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명 한명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존중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어린이들은 참으로 혹독한 취급을 당했습니다. 당시 워낙 유아사망률이 높다 보니, 일단 성인이 되어야만 정상적인 한 인간 존재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숫자를 헤아릴 때 어린이들은 제외되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을 때, 복음 사가들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5천명.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볼 때, 동등한 인격체, 자유의지를 지닌 한 인간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과 안수를 청합니다.
그런 어른들의 모습에 사도들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집요하게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상습 피로에 시달리던 스승님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휴식이 필요한 스승님이셨기에, 개념도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생각에, 스승님께서는 보다 위대하고 중요한 일을 행하셔야 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개념 없는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일은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의 생각과 180도 달랐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크게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오 복음 19장 14절)
여기서 말씀하신 어린이들은 대여섯 살 어린이들도 해당 되겠지만, 더 폭넓게 적용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 단순하고 소박한 이들, 스스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기에,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겨드리는 이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 어린이들,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신앙인들의 모범이요 이정표로 선언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많이 배웠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과 공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삶을 내맡기는 사람, 그분의 크신 자비에 매일 의탁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진정한 어린이들에게는 세상 온천지가 호기심 천국입니다. 매사를 설레는 마음으로 흥미진진하게 바라봅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상만사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수용합니다.
나이를 점점 들어갈수록 더 노력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어린이로 태어나서, 오랜 세월 어른으로 살았으니, 이제 다시 어린이로 되돌아갈 순간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삶의 특징은 나약함이요 미성숙이지만, 동시에 기쁨이요 희망, 천진난만함이요 신뢰심입니다.
어린이들은 오늘 내 처지가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큰 실망에 빠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감사합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일상 안에서의 작은 기쁨을 찾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504.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이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알고 실천하는 이’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섬김의 도’는 ‘실행하는 이’만이 배울 수 있는 ‘도’(깨달음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배우는 방법도 가르쳐주셨고,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방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방법은 유일한 단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것은 섬기면서 섬김을 배우고,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용서하면서 용서를 배우는, 곧 ‘실천을 통해’ 배우는 방법입니다. 마치 수영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수영을 배울 수 없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서는 결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실천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원천은 무엇인가? 아니 어디로부터 나오는 힘이어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아 알고 그것에 전적으로 승복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 다름 아닌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알고, 그것에 대한 전폭적인 승복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파견받은 자’로서의 사명실천에 달려있는 일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깊이 깨달아 알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행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고 하십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실현되지 않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관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이토록,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칭하신 그레고리오 교종은 참으로 본연의 자리를 갈파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은 ‘종들 중의 으뜸’, ‘종들의 대빵’이라는 말이 아니라, ‘종들을 섬기는 종의 종’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주님의 섬김을 받은 이들이요, 이미 섬김의 “몫”을 받은 이들입니다. 결국, 진정 섬김을 받은 자만이 진정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먼저 섬기는 이가 섬김을 받고, 먼저 존경하는 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개방, 섬김, 환대-
5월 성모성월이 시작되면서 계속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생명과 신록의 빛이 파스카의 기쁨중에 살게 합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수도원 곳곳을 샛노란 야생화 들꽃인 애기똥풀꽃들이 수놓고 있습니다. 25년 전 1998년 5월에도 그러했고 마침 그당시 써놓고 애송했던 '검정 고무신'이란 동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때도 수도원 초창기 때처럼 늘 검정고무신을 신고 지냈습니다.
“볼품없는
검정 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1998.5.7.
주님을 만날 때 변화된, 정화되고 성화된 모습을 상징하는 검정고무신이란 시입니다. 요즘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의 평화를 찾아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방문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주님의 집인 아름다운 요셉 수도원인지요! 수도원의 자랑은 1987년 3월 19일 개원후로 늘 활짝 열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 수도원 성전처럼 개원후 36년 동안 하루 24시간 늘 열려있는 곳은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명실공히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혼들의 쉼터이자 오아시스 같은 주님의 집, 평화의 집, 기도의 집, 환대의 집인 여기 ‘베네딕도회 성 요셉 수도원’입니다.
요셉 수도원의 영성을 셋으로 요약한다면 “개방, 섬김, 환대”일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개방하고 서로 섬기고 환대하십시오. 개방, 섬김, 환대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세 필수 요소이자 참영성의 잣대도 됩니다. 물론 앞에 사랑을 붙여야 합니다. 사랑의 개방, 사랑의 섬김, 사랑의 환대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제의 아름답게 빛났던 추억을 잊지 못합니다. 노래하는 영혼의 아름다움은 늘 감동하게 합니다. 오랜만에 수도원을 찾아 면담성사를 받은 자매의 일화입니다. 집무실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늘 명심하는 요소 역시 개방, 섬김, 환대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으로 면담성사차 찾아 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어제 자매님은 음성이 고와 보속으로 성가 244장 성모의 성월을 4절까지, 또 스승의 은혜를 3절까지 전부 부르도록 했습니다.
정말 감동했습니다. 알고보니 오랫동안 찬양 봉사를 해온 자매였고 너무 고맙고 감동하여 사죄경과 강복후 안아 들이며 주님의 축복을 받으라는 덕담과 더불어 “참 정성껏 성실히 사셨습니다”라며 격려하며 결정적 덕담을 드렸습니다.
“자매님 5월 성모성월은 걱정 안해도 됩니다. '성모의 성월' 성가를 통해 성모님을 찬양했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통해 스승이신 예수님을 찬양했기 때문에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자매님을 각별히 돌봐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서로 개방하고 섬기고 환대하십시오. 서로 개방하고 섬기고 환대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인류 역사는 오직 단 한 분 예수님으로 수렴되며, 최종적으로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실 결정적인 분은 오직 단 한 분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개방과 섬김, 환대의 모범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바오로의 감동적인 연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이스라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행한 위업의 나열입니다. 마지막 절정이자 마감이신 예수님으로 대단원의 막은 내립니다.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바오로는 물론 우리가 평생 보고 배울 스승이자 주님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개방과 섬김, 그리고 환대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첫째, 개방하십시오.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벽이 없는 진리와 생명, 구원의 문자체, 개방 자체이신 분입니다. 지난 성소주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교황님의 강론 끝부분도 개방에 대한 감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문들을 열어라(Be open doors)!”
라는 주재하에 주교들, 사제들, 교회내의 모든 목자들, 바로 하느님 은총의 기획자들인 이들에게 끊임없이 문을 열라고 촉구했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평신도들, 교리교사들, 사목일꾼들, 정치지도자들, 사회지도자들에게 문들을 열 것은 촉구했습니다.
“문들을 여십시오! 열고 포용하십시오. 그래서 헝가리가 형제애를 꽃필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은 자신을 활짝 열고 우리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한없이 온유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제가 최고의 강론가를 뽑는다면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고 김수환 추기경님일 것입니다. 두분의 강론은 늘 보편적이자 구체적이고, 쉽고 단순하고 깊으며, 힘있고 감동적이며 착한 목자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둘째, 섬기십시오.
예수님이 역시 섬김의 모범이요 그 결정적 절정의 장면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사건일 것입니다. 바로 발을 씻어 주신 일은 사랑의 겸손, 사랑의 섬김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어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 말씀하십니다. 참행복도 섬김의 삶에 있다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셋째, 환대하시십시오.
성 베네딕도 역시 주님을 환대하듯 찾아 오는 이들을 환대하라 하십니다. 정주와 직결되는 환대영성입니다. 환대를 통한 선교가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승들의 선교 사명입니다. 참으로 이웃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고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진짜 땅에 깊이 뿌리 내린 건강한 신비주의자는, 영성가는 이렇게 이웃을 예수님처럼, 하느님처럼 사랑으로 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개방, 사랑의 섬김, 사랑의 환대를 실천하십시오. 바로 이때 개방과 섬김, 환대의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자신을 활짝 열고 우리를 섬기시고 환대하심으로 우리에게 개방과 섬김, 환대에 대해 가르치시고 깨우치십니다. 주님을 닮을수록 개방과 섬김, 환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한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5/5(금) 부활제4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부활신앙의 핵심은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희망입니다. 캄캄한 지하무덤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것은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자 우리에서 당당하게 기도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삶, 사랑이 없는 삶, 희망이 없는 삶은 부활신앙이 아닙니다.(조재형 신부)
2.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진정한 어린이들에게는 세상 온천지가 호기심 천국입니다. 매사를 설레는 마음으로 흥미진진하게 바라봅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상만사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수용합니다.
나이를 점점 들어갈수록 더 노력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어린이로 태어나서, 오랜 세월 어른으로 살았으니, 이제 다시 어린이로 되돌아갈 순간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삶의 특징은 나약함이요 미성숙이지만, 동시에 기쁨이요 희망, 천진난만함이요 신뢰심입니다.
어린이들은 오늘 내 처지가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큰 실망에 빠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감사합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일상 안에서의 작은 기쁨을 찾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요셉 수도원의 영성을 셋으로 요약한다면 “개방, 섬김, 환대”일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개방하고 서로 섬기고 환대하십시오. 개방, 섬김, 환대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세 필수 요소이자 참영성의 잣대도 됩니다. 물론 앞에 사랑을 붙여야 합니다. 사랑의 개방, 사랑의 섬김, 사랑의 환대입니다. (이수철 신부)
[5/5(금) 부활제4주간 금요일, 제132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변화, 사랑, 희망하게 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띄며 기뻐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행복하게 하소서.
개방, 섬김, 환대하게 하소서.
- 2023년 5월5일(금) 9시1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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