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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230507 매일미사/묵상])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백)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매일미사

오늘 전례

해마다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오다가,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며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자는 데 생명 주일을 지내는 뜻이 있다.

오늘은 부활 제5주일이며 생명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시고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성실히 걸어갈 때 우리는 진리를 깨닫고 생명과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입당송

시편 98(97),1-2 참조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 드러내셨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언제나 저희 안에 파스카 성사를 이루시어
거룩한 세례로 새로 난 저희가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2.4-5.18-19(◎ 22 참조)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또는
◎ 알렐루야.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제2독서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입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2,4-9
사랑하는 여러분,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8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14,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총의 샘이신 주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를 이끌어 주시어, 교회 운동들과 단체들이 자신들의 복음화 사명을 날마다 재발견하여 고유한 은사로 세상 속에서 봉사하게 하소서.

2. 생명 주일을 맞아 생명 수호 봉사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이신 주님, 생명 주일을 맞이하여 이 땅의 생명 문화 건설을 위하여 애쓰는 이들에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주시어 지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모두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생명의 지킴이가 되게 하소서.

3. 부모님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언제나 자식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부모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그들이 건강하고 평안하며, 자녀들과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이 넘치게 하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총의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의 모든 이를 보살펴 주시어, 그리스도를 본받고, 저마다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여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전파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교환의 제사로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5,1.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께서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보다 심판과 벌을 먼저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신앙생활을 두렵고 힘들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믿음의 깨달음을 주십사고 청하여야겠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든 사람 사는 곳에는 늘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열정적인 선교로 공동체가 성장하였습니다.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교회에도 몇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나눔’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과부, 어린이들이 나눔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그러자 공동체에 불평과 불만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신망이 깊고, 바른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 나눔을 맡겼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면서 유대인들이 지녔던 율법 준수에 대한 문제도 생겼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을 모르기도 했고, 자신들의 전통과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 규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유대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회의를 교회는 ‘공의회’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저녁 미사가 있는데 오전에 요양원 미사를 부탁 받았습니다. 가겠다고는 했지만 마음으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제게 즐거움을 주는 부탁이라면 기꺼이 했을 겁니다. 그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기쁜 마음으로 요양원 미사를 하는 것이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욕심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과는 더욱 멀어지는 길입니다. 욕심 때문에 창고를 가득 채웠던 부자는 하느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별 지구가 병들어 가는 것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구유’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신 것도 겸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맨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첫 번째 ‘죄’는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의 교만함에서 왔습니다. 교만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큰 바람이 불면 쓰러지는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쓰러지곤 합니다. 작은 나무들은 큰 바람에도 쓰러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유혹이라는 바람이 불 때 가장 먼저 쓰러지는 것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마리아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으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픔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뜻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겸손과 순종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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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506.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10)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는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세 번째 반응이 이어집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하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요한 14,9-1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관계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은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이며, 하느님을 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고서도 보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니 꿰뚫어 깨달아 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헤험쳐다니면서도 자신이 헤험쳐다닐 수 있음이 물이 있음임을 모르듯,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쉬는 줄을 모르듯,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입니다. 곧 지금 ‘와 있는 곳’, 보고 있는 것이 서울임을 모르는 꼴입니다. 거기에는 받아들이고 승복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하나 됨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의 무지를 꾸짖으신 후, 참을성 있게 이전의 가르침을 되풀이 하십니다. 당신이 그들과 함께 보낸 긴 시간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며, 당신이 하신 말씀은 모두 아버지의 말씀(참조:3,34;8,18.28.38.47;12,49)이시고, 당신이 하신 일은 모두 아버지께서 하신 일(참조:5,19.36;9,3-4;10,
25.32.37-38)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이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눈’, 그것은 감각의 기능과 지성의 기능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만남이 벌어지는 것으로, 존재자체로 보는 눈입니다.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러니,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 곧 구원하는 일과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일은 궁극적으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권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시면서,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면, 당신의 권능으로 다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
 
주님!
제가 여전히 이루지 못함은 여전히 죽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제 뜻을 이루려 한 까닭입니다.
사랑으로 죽게 하시어,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이루소서!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아직 남아 있음은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도 늘 저보다 더더더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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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스크랩2023-05-06

주님과 우정의 여정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미래이다”-

어제 수녀원 고백성사후 귀원중 지난 왜관 수도원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자 모임시 참석하여 첵코 출신 토마시 할리크 신부의 강연을 들었던 수녀님의 언급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질의 응답중 체코의 공산치하에서 40년 이상 어떻게 신앙을 유지해왔느냐에 대한 신부의 응답입니다. 바로 왜관 수도원 성전 제대 위의 그리스도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저분께 희망을 두었기에 살아 남았다!"

라는 고백입니다. 부활 삼종 기도중 감미로운 한대목, "하느님, 성자의 부활로 온 세상을 기쁘게 하셨으니" 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미래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 5월3일 베드로 광장에서 주중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 강론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헝가리 사목 방문중 얼마나 많은 겸허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뿌리들과의 결속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알게 되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뿌리들중 최우선의 뿌리들은 바로 성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생명을 바친 성인들이요, 사랑의 복음의 증거자들인 성인들이요, 어둠의 시대에 빛들이 되었던 성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바로 우리의 뿌리들인 과거의 성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임을 기억하면서 패배주의의 위험과 내일의 두려움을 극복할 것을 간곡히 타이르고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미래입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자주, “기억하라, 그리고 희망과 기쁨을 지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앞으로 계속 힘차게 전진하라.” 강조하십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미래임을 굳건히 믿을 때, 비로소 패배주의의 위험과 내일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단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일뿐 아니라 우리의 현재이자 과거임을 즉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좋은 우정 관계의 본보기가 바로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우정의 여정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더불어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어질 것입니다. 과연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형제들간의 우정의 관계인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제가 자치수도원이 되던 해인 2014년부터 지금까지 9년 동안 늘 해 온 일이 있습니다. 피정지도시나 면담성사중 휴대폰에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를 붙여 드린 일입니다. 사실 제가 1988년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대상이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이었습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수없이 되뇌었던 다짐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하늘과 산입니다. 저절로 떠오르는 다음 시편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121,1-2)

수도원 로고의 “하늘과 산”의 그림은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 보고 사람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를 연상케 하는, 참으로 상징성이 깊은 로고입니다.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 좌우명 애송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나눴는지, 그러나 늘 반복해도 새롭게 와닿는 좌우명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의 관계는 얼마나 좋습니까! 바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무려 26년전 1997년 이 자리에서 쓴 시이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살아있는 시입니다. 과연 하늘과 산처럼, 날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우정관계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다음 주님의 질책을 보면 필립보의 주님과의 우정 관계는 여전히 미흡함을 느낍니다. 필립보는 다음 말씀에 부끄러움과 더불어 크게 깨우침을 받았을 것이며 깊은 충격과 더불어 심기일전 주님과의 관계를 날로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아버지와 얼마나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 예수님인지 깨닫습니다. 흡사 우리를 향한 질책처럼 들립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수십년 정주해오면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주님의 절친(切親)으로 주님과 우정을 깊이해 왔는데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고 질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예수님과 믿음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주님과 우정의 절정의 일치 관계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우정이 우리의 전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역경중에도 굴함이 없이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으로 멋진 말씀의 사람, 믿음의 용사인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유다인들의 박해에 쫓겨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미련없이, 바람처럼, 가볍게, 훌훌 떠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자유로운 모습은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지요! 세상 떠날 때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니 말 그대로 성령에 따라 살았던 성령충만한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제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과 더불어 날로 당신과의 우정은 물론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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