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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7월 6일 목요일[(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7월 6일 목요일[(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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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홍] 성녀 마리아 고레티 동정 순교자

입당송

시편 47(46),2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본기도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22,1-19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6(114─115),1-2.3-4.5-6.8-9(◎ 9)
◎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 나는 주님을 사랑하네. 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 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
○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 나는 주님의 이름 불렀네. “주님, 부디 이 목숨 살려 주소서.” ◎
○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
○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

복음 환호송

2코린 5,19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이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에게 구원을 베푸시니
이 성찬례가
하느님께 올리는 합당한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03(102),1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또는>
요한 17,20-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전에 성당에서 여름이면 학생들과 신앙학교을 갔습니다. 시설이 갖추어진 캠프장으로 가기도 했고, 산에서 텐트를 치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다고 하였듯이 신앙학교를 열기위해서 교사들은 몇 달 동안 준비하였습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저는 여름방학이면 교사들을 도와서 신앙학교에 함께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를 맡아서 학생들과 지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주로 물품 준비를 하거나, 전례 준비를 도왔습니다.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추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추적놀이였습니다. 조원들이 정해진 미션을 수행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었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였습니다. 추적놀이의 정점은 캄캄한 밤에 무서움을 참고 목적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중간에 교사들은 몇 가지 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무서운 소리가 나기도하고, 분장한 귀신이 나오기도 하고, 무덤이 있기도 했습니다. 담력이 약한 아이들은 울기도 하지만 모두들 조장을 중심으로 추적놀이를 잘 마치게 됩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옥수수, 수박과 같은 간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추적놀이의 시작은 탄생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태중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통해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먹고, 자고, 놀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기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좁고, 어두운 자궁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은 첫 호흡을 하면서 힘차게 울어 됩니다. 엄마와 연결되었던 탯줄은 잘라지고, 그 흔적은 아이의 배꼽으로 남게 됩니다. 이제부터 아이는 스스로 숨을 쉬어야 합니다. 들숨과 날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는 나약한 몸입니다. 부모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아이는 스스로 일어나고, 걷고, 말하게 됩니다.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에 비해서 가장 오랜 시간 추적놀이를 하면서 공동체에 적응하게 됩니다. 이런 추적놀이는 인류가 쌓아온 문화와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저 또한 29년 동안 추적놀이를 통해서 사회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추적놀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추적놀이를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도를 몰랐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미션을 기꺼이 수행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제물로 쓰신다던 이사악을 대신해서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신 미션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련한 추적놀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의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아니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 주실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추적놀이의 관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거두심을 감사드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행동입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이웃은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오늘 내가 들고 가야 할 평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걷지조차 못하는 중증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중병 병자에게 평상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요즘으로 치면 휠체어나 이동식 침대일 것입니다. 그나마 환자가 드러누워 있을 수 있고, 이동 시에는 반드시 필요한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라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대상,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필요하기도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그런 대상! 그러나 언제나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대상!

 

그런 중풍병자를 가엾이 보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외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오늘 내 평상이란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하루라도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내 열악한 환경,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혹독한 매일의 현실이 내 평상입니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이 오랜 악습과 반복되는 죄가 내 평상입니다. 내가 매일 마주해야 하는 못마땅한 주변 동료 인간들이 내 평상입니다.

 

그 평상들은 나를 수시로 힘들게 하고, 좌절케 하며, 무너지게 만들지만,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와 단절시키고, 멀리 던져버리고, 활활 불살라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집에 안착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간직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구원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기쁜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다면, 그게 과연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일상적인 고통과 십자가, 이 비참하고 혹독한 현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평상을 아버지 집에 도착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는 그것으로 가능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05.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오늘은 우리나라의 첫 사제요, 한국 사제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대대로 순교자를 낸 신심 깊은 집안에서 1821년 충남 당진 솔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솔뫼는 그의 증조부(복자 김진후 비오), 부친(성 김제준 이냐시오)을 포함 4대 11명이 순교의 꽃을 피운 곳입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사위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들을 국경을 넘겨 보낸 국사범으로서 온갖 잔악한 형벌을 받은 후에 서소문 밖에서 목 잘려 순교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3남매 중 맏아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 진실한 신심을 드러냈던 신부님에 대해 모방 신부님은 “이 아이는 아마 천주께서 선택하신 아이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1836년, 열다섯 살 때에 세례를 받은 그는 모방 신부가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자, “남의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리하여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고국을 떠나(1836.12) 육로로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1837.6)하여 4년간 철학과 신학 공부했습니다. 만주에 들른 그는 북경으로 가던 신자 김 프란치스코로부터 기해박해로 아버지는 참수를 당하고 어머니는 교우집을 떠돌아다니며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앵베르 주교가 기록했던 박해의 기록과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편지, 그리고 목자를 보내줄 것을 청한 교우들의 편지를 받고, 그 길로 조선에 있는 메스트르 신부를 만나기 위해 변문을 향했습니다. 그 후에 여러 차례 입국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장춘 소팔가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서 선교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마침내 1845년 1월에 온갖 고생을 겪고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셨습니다. 그러나 홀로된 어머니도 뵙지도 못하고, 전교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해 몸이 불편한 중에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다시 상해로 갔고, 1845년 8월 17일에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후, ‘라파엘’ 호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밤낮으로 열심히 사목하는 동시에 선교사제의 서해 입국 통로를 개척하다가, 1846년 6월 5일에 체포되셨습니다. 신부님은 당신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학문을 아깝게 여긴이들이 인재로 쓰려고 수차례 회유를 하지만, “천주를 숭배해야만 한다. 이를 거절하면 죄를 면치 못한다.”고 답했으며, 교우의 이름을 대라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천주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거절했습니다. 신부님은 모진 문초를 받으면서도, 옥중에서 신자들에게 믿음을 잃지 말고 하느님을 섬기며 고통을 참으라고 옥중편지를 통해 이렇게 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천주를 알지 못하면 산 보람이 없습니다. 눈물로 씨 뿌린 농부가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듯 신앙도 좋은 열매를 맺을 때 천국의 기쁨을 누립니다. 박해를 두려워 말고 천주를 섬기고, 순교자들을 기억합시다. 성인들의 발길을 따라 교회에 충실한 시민이 되고, 사랑의 일치로 주님 만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1846년 9월 16일,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1개월 만에 한강가의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참수의 거룩한 순교의 빨마를 얻으셨습니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신앙의 씨앗은 여전히 한국의 신자들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조선대목구 제3대 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이면 어느 누구나 그의 열렬한 신앙심과 성실한 마음에 존경심과 사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고, 늘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49년에 한국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정되셨고, 1984년 5월 6일에 성인으로 시성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때문에” 모진 핍박과 수난 속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임금으로부터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도 “임금 위에 또 천주께서 계시어 당신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그의 배반함은 큰 죄악이라, 임금의 명령이라도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용감히 증거했습니다.
 
참으로 살 때나 죽을 때나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만 살고, “예수님 때문에”만 죽으셨습니다. 마치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서처럼, 살아있을 이유도 핍박을 받고 죽을 이유도,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성인의 “옥중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이처럼 성인께서는 참으로 “예수님 때문에” 고문을 받으셨고, “예수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새남터에서의 마지막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으니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통한 건 오직 천주님과 교회를 위함입니다. 나는 죽으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으시려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참수될 당시, 칼로 여덟 번 목을 친 뒤에야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전해지는데, 칼을 든 열두 회자수 망나니가 목을 치기 위해 무릎의 꿇려 머리를 잡아당긴 상황에서 신부님은 말합니다.
 
“이 모양으로 하고 있으면 칼로 치기가 쉽겠느냐? 자, 준비가 다 되었으니 쳐라.”
 
성인께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오로지 예수님께 희망을 거셨습니다. 참으로, 성인께서는 <제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시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하셨습니다.’(로마 5,2-3).
 
이제 우리 역시, 다름 아닌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서, 매순간을 “순교”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증거”, 곧 우리의 “순교”가 우리의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연속되는 죽음 속에 자리 잡아야 할 일입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나 자신의 뜻에는 스스로 죽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명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2고린 4,10-1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

-섬김의 사랑, 영광의 희망, 인내의 믿음-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1845년 8월17일 상해부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았으니 조선교회에 첫 사제입니다. 이어 사제생활 1년1개월만인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성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만25세입니다. 참으로 꽃다운 한창 젊은 나이에 순교했고 저는 성인보다 무려 3배나 더 살고 있습니다.

 

만25세 나이로 순교했으나 성인의 삶은 참 판란만장했고 치열했으며 용감했습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순교적 삶에 무한한 영감과 힘을 줍니다. 성덕의 삶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하루하루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질’에 있음을 봅니다. 성인의 마지막 1986년 8월26일 순교 얼마전 쓴 옥중편지는 얼마나 꿋꿋하고 박식하고 신심깊고 효심 깊었는지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끝부분만 인용합니다.

 

“저는 감히 주교 각하께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 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각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이제 저는 진심으로 각하의 발 아래 엎디어, 저희 사랑하올 부친이요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후 천당에서 뵙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

 

제2독서 윗 성인의 옥중편지후 이어지는 응송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그대로 성 김대건 순교자의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7-8ㄱ)

 

성가 287장 5절까지 이어지는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가사와 곡도 불후의 작품으로 부를 때 마다 감동입니다. 최민순 시인 신부님의 가사가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시간되면 5절까지 불러보며 내용을 음미하기 바랍니다. 우선 1절만 인용합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이 짙어갈 때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순교적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분발케 하는 순교성인들입니다. 어떻게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 항구히 주님을 섬기는 사랑의 삶입니다.

성인들은 한결같이 항구히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신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만을 섬겼습니다. 이래야 갈림이 없는 하느님 중심의 내적일치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즈카르야 예언자가 줄기차게 말씀하신 것은 주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고 주님을 사랑하여 섬겨야 하는데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고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거슬러 증언했지만 그들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는 배금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극단의 이념들,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우상들입니다.  

 

참으로 일편단심 주님을 섬기는 삶이 참 자유요 행복인데 예나 이제나 우상들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데 세상 “맛”에 따라 살아가니 세상 우상들의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즈카르야 예언자의 경고는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 너희가 잘 될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마침내 요아스 임금은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입니다. 즈카르야의 마지막 임종어가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참으로 시종여일, 죽는 그날까지 주님을 섬기는 삶에 항구하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둘째, 언제나 주님께 희망을 둔 희망의 삶입니다.

주님께 희망의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둘 때 한결같은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바도 희망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은총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샘솟는 희망입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삶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어야 유혹에도 안빠지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셋째, 끝까지 견뎌 인내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사랑에서 희망이요, 희망에서 인내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도 걱정하지 말라며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어 주님은 끝까지 인내의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입니까? 

 

1.늘 주님을 한결같이 섬기는 사랑의 삶입니다.

2.언제나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둔 희망의 삶입니다. 

3.끝까지 견뎌 인내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결국은 하느님께 대한 끝까지 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입니다. 이래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2). 아멘.


[7/5(목)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거두심을 감사드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행동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일상적인 고통과 십자가, 이 비참하고 혹독한 현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평상을 아버지 집에 도착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는 그것으로 가능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2). 

(이수철 신부)

 

 

[7/5(목)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제 194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야훼 이레 하느님!

저와 늘상 동행하시고...

저를 위한 모든 것을 예비하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7월6일(목)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