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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7월 12일 수요일[(녹) 연중 제14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7월 12일 수요일[(녹) 연중 제14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48(47),10-11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1,55-57; 42,5-7ㄴ.17-24ㄱ
그 무렵 55 이집트 온 땅에 기근이 들자,
백성이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파라오는 모든 이집트인에게 말하였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56 기근이 온 땅에 퍼지자,
요셉은 곡식 창고를 모두 열고 이집트인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이집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57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42,5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6 그때 요셉은 그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그였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하였다.
7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17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18 사흘째 되던 날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살려거든 이렇게 하여라.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19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20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21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22 그러자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하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23 그들은 자기들과 요셉 사이에 통역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알아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24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2-3.10-11.18-19(◎ 22 참조)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고운 가락을 내며 환성 올려라. ◎
○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복음 환호송

마르 1,15
◎ 알렐루야.
○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알렐루야.

복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7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께 바치는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에 날마다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9 참조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또는>
마태 11,28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

12사도를 뽑으심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이민 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마다 사연이 있습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으면 다른 가족들을 초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를 초청하고, 형제를 초청하면서 온 가족이 미국에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 동부에는 50년이 된 성당들이 있습니다. 뉴왁의 메이플 우드 성당, 퀸즈의 정 정하상 바오로 성당입니다. 그리고 내년에 50년이 되는 필라델피아의 홀리 엔젤스 성당과 워싱턴 디시의 성 김대건 성당입니다. 미국 동부의 한인 성당은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과 박창득 어거스틴 몬시뇰이 씨를 뿌렸습니다. 정욱진 신부님과 박창득 몬시뇰은 사제양성에도 깊는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두 분의 길을 따라서 사제성소를 키웠고 지금은 40여명의 사제들이 미국 동부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1997년 한국에는 ‘IMF' 국가부도가 있었습니다. IMF의 파도는 저의 집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대출을 받아서 부모님이 머물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은 건강하셨고, 제가 조금씩 드리는 생활비로 잘 지내셨습니다. IMF로 집안의 형편은 어려웠지만 형제들은 더욱 살갑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다 추억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았던 요셉은 형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가족들과 이별한 요셉은 이집트에서 성공하여 파라오 다음가는 재상이 되었습니다. 심한 가뭄에 야곱과 가족들은 곡식을 구하려고 이집트로 왔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다 준비하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니 형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초청으로 야곱과 가족들은 모두 이집트로 와서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갔고 예수님께서는 이집트로 피난 가셨습니다. 요셉은 모시는 관리의 부인에게 유혹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은전을 받고 요셉을 팔아넘겼고 유다도 은전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고 예수님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온 가족을 풍족하게 먹일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셨고, 12명의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를 하시면서 하느님과 소통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나라를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향기가 되어서 제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더욱 변화되었고, 성령의 강림으로 더욱 용감해 졌습니다. 시련도, 고통도, 박해도, 죽음도 제자들의 앞을 가로막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복음에서 나온 12명의 제자와 같은 사도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요셉 스토리!

 

오늘과 내일 첫 번째 독서로 봉독되는 창세기 요셉의 인생 역전 스토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 스토리를 다시 펼쳐서 읽고 묵상하다 보니, 웬만한 인기 주말 드라마 저리가라 할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요셉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했고 파란만장했습니다. 시기심으로 이글거리던 형들로부터의 철저한 응징을 당했습니다. 어둡고 깊은 수렁 속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요셉은 순식간에 머나먼 이국땅 종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 충만했던 요셉,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던 요셉이었습니다. 드라마틱한 삶이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가운데, 마침내 그는 대제국 이집트의 재상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평생 꿈꾸어오던 장면, 형들과의 재회 순간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대기근을 견디다 못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까지 오게 되었는데, 마침 식량 판매의 결정권자가 요셉이었습니다.

 

제가 요셉이었다면 그래, 정말 오랜 세월 내가 참아왔다며, 그간 참아왔던 서러움과 분노를 형들 앞에서 있는 데로 다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형님들! 내 얼굴 기억 안 나세요? 형님들이 죽일 작정을 하고 깊은 구덩이 속에 던져버린 요셉입니다. 형님들! 대체 그때 왜 그러셨어요?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실 수 있나요? 그러고도 밤에 잠이 오던가요? 밥이 넘어가던가요?”

 

그러나 요셉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기 45장 4~5절)

 

형들의 만행으로 인해 그 어린 나이부터 갖은 고생 다 겪고 숱하게도 죽을 고비를 넘겼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하지 않습니다. 크게 용서합니다. 오히려 형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요셉의 형들은 엄청난 불안감에 쌓이게 됩니다. ‘이제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으니, 그간 참고 있었던 요셉이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철저하게 보복하고 응징하겠지?’ 하는 생각에 요셉을 찾아와 엎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말까지 건넵니다.

 

“이제 우리는 아우님의 종들일세.”(창세 50, 18)

 

형들의 태도에 깜짝 놀란 요셉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들 하지 마시라고 만류합니다. 그리고 형들을 따뜻이 위로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창세 50, 19-21)

 

자신에게 닥친 크나큰 불행과 역경조차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바라봅니다. 혹독한 시련과 십자가를 하느님 은총의 선물로 바라봅니다. 참으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요셉의 인생관입니다. 그 어떤 풍파가 닥쳐오더라도 항상 자신의 삶에 대해서 Yes!라고 외쳤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참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만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매사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오늘은 사부 베네딕도의 대축일입니다. ‘베네딕도’(Benedictus)라는 이름의 말뜻은 “좋게 말한다.”, “복 받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성인은 그의 <대화편>에서 말합니다.
 
“베네딕도는 은총과 이름으로 복 받은 분이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되리라.”(창시 12,2).
 
이는 단지 복을 주리라는 것을 넘어서, “네 자신이 복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사부 성 베네딕도께도 해당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베네딕도의 후손인 우리도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씀처럼, “은총으로도 복이 되고, 이름으로도 복 받은” 삶은 어떤 삶,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 우선 형제들에게 좋게 말하는 것, 형제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곧 입에 항상 찬양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닐까요? “내 입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시편 33,1)라고 노래한 <시편>작가처럼, 언제나 주님을 찬양하고, 형제들의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아닐까요?
 
베네딕도께서는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라.”(머리말 30)고 하시고, 72장에서는 형제들 간에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72,4)고 하십니다. 곧 ‘복받은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형제를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베네딕도께서는 수도원을 “하느님의 집”(베규 31,19)이라 명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집”, 이는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베네딕도께서는 그냥 ‘집’이라 하지 않으시고, 또는 ‘하느님을 위한 집’이나, 혹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함께 사는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요,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 더불어 ‘살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살림”(Economia)라는 말은 아주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집’을 뜻하는 말(oikos)와 규율을 뜻하는 말(nomos)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를 우리 말로는 “살림살이”, 혹은 줄여서 “살림”이라 표현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이는 서로를 살리면서 살아간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서로를 살리며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살림”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집”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는 수도원에서 함께 공동으로 드리는 성무일도기도를 “하느님의 일”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그저 ‘기도’라 하지 않으시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일’이라 하지 않으시고, 또는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나 혹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분과 함께, ‘섬기면서 섬기기’를 배우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을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해드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관심이나 계획, 혹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보이거든, 눈을 돌려 바로 그것을 비추고 있는 빛을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이 비추인 곳의 어둠을 보기보다, 그 어둠을 비추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빛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집”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머리말 30)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사부 성 베네딕도 예찬

-유럽의 수호자,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8-9)

 

어제부터의 분위기는 웬지 모를 잔치날 분위기처럼 참 흥겹게 느껴졌습니다. 저녁 식탁도 꽉 찼습니다. 무려 머물고 있는 손님이 6명, 전체의 1/3이니 정주수도원의 환대 영성이 빛납니다. 바로 오늘은 유럽의 수호자이자 서방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사부 성 베네딕도 대축일이 흥겨운 잔치분위기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또 오늘은 제 34주년 사제서품 기념일이자 우리 수도원의 정보영 라우렌시오 수련수사가 수련을 마치고 첫서원을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중세초기 암흑시대에 성 베네딕도가 없었다면 유럽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중세 야만의 유럽을 문명화한 성 베네딕도는 유럽을 구원한 은인이자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1964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성 베네딕도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이어 1980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네딕도를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와 더불어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습니다. 

 

2008년 교황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베네딕도 성인은 자신의 삶과 업적을 통해 유럽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유럽이 로마제국의 몰락이후 이어진 역사의 어두운 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감격에 벅차 고백했습니다. 한 성인의 업적은 얼마나 위대한지요! “성 베네딕도 규칙서”와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가 성인의 위대함을 웅변합니다. 저녁기도 성경 소구가 성인의 모습을, 계응송이 베네딕도 규칙의 위대함을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그분은 위대한 증거자로다. 그는 구름들 사이에 있는 아침 별과 같고 보름의 둥근 달과 같도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전 위에 비치는 태양과 같고 영광의 구름에 걸린 무지개와 같도다.”(집회50,5-7)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했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성 베네딕도 자랑을 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성 베네딕도 자랑은 결국 하느님 자랑이라 기분이 참 유쾌합니다. 성 베네딕도의 영성은 저는 산과 강의 영성이라 정의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의 영성이라 정의하고 이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프란치스코 수도명을 지닌 저는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의 산,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의 강”이라 자칭 일컫기도 합니다. 저는 외로움을, 스승의 부재를 전혀 느껴본적이 없습니다. 주님께 인도하는 위대한 멘토이자 스승을 세분이나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 요셉, 성 베네딕도, 성 프란치스코 이 세 성인이 시공을 초월하여 저와 영원히 함께 하는 수호성인들입니다. 전임 고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시공을 초월한 자신의 영원한 스승이자 멘토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라 고백했습니다. 산과 강으로 요약되는 성 베네딕도의 삶은 다음 제 좌우명 고백시가 아름답고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佛巖山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오랜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맑은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제 간절한 단 하나의 소원은 성 베네딕도를 닮아 죽는 그날까지 “산과 강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오늘 말씀이 그 비결을 알려 줍니다.

 

첫째, 추종입니다.

바로 복음이 답을 줍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수호성인들의 인도에 따라,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답이 우리에겐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베드로의 생각이 참 짧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일편단심, 오매불망 사모하는 주님을 따르는 자체가 더할나위없는 축복이요 행복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지요!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자상한 예수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귀향의 여정,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죽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시종여일, 초지일관 한결같이, 끊임없이 겸손히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저녁 성무일도 찬미가도 주님 따르는 기쁨을 한껏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발자취 따르는 이들, 아버지요 스승인 성 베네딕도

 찬란하게 빛나는 이날 기리며, 노래 불러라.

 스쳐가는 세속의 행락등지고, 주님 찾는 보람을 한껏 누리며

 천사들과 한노래 부르는 영복, 끝이 없어라.”

 

둘째,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으로 따를 때 사랑의 은총 선물입니다. 사랑의 샘,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사랑이 있어 지칠줄 모르는 하느님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사랑의 대가였습니다.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무수한 기적들은 바로 사랑의 기적들이었습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기적이 일어나니 사랑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온통 사랑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1.동정과 2.호의와 3.겸손과 4.온유와 5.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6.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7.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지는 끈입니다. 8.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9.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두가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엔 역시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평생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이 되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한결같이 끊임없이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셋째, 지혜입니다.

지혜는 감추어진 보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깊고 아름답습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사랑의 빛, 지혜의 빛이 무지의 어둠,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사랑과 지혜가 결정체를 이룬 성 베네딕도입니다. 분별력의 지혜, 중용의 지혜는 바로 모두를 살리는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날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아갈 때 사랑과 지혜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제1독서 잠언 말씀이 감로수같습니다.

 

“네가 만일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계명을 네 안에 간직한다면,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을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의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람이 되어 가면서 주님을 닮아갈수록 지혜로운 삶입니다. 주님을, 성 베네딕도를 닮고 싶습니까?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삶, 사랑의 삶, 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추종과 사랑과 지혜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 뿐이리라.”(시편34,10-11). 아멘.


[7/12(수)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 모두는 오늘 복음에서 나온 12명의 제자와 같은 사도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2.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창세 50, 19-21)

 

자신에게 닥친 크나큰 불행과 역경조차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바라봅니다. 혹독한 시련과 십자가를 하느님 은총의 선물로 바라봅니다. 참으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요셉의 인생관입니다. 그 어떤 풍파가 닥쳐오더라도 항상 자신의 삶에 대해서 Yes!라고 외쳤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참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만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매사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양승국 신부)

 

3. 이제 우리는 빛으로 빛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집”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머리말 30)해야 할 일입니다. (이영근 신부)

 

4.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삶, 사랑의 삶, 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7/12(수)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제 200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야훼이레 하느님!

오늘 독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긍정 마인드 이야기에 감동합니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요셉처럼...

불행과 역경을 하느님 섭리로 바라보게 하소서.

혹독한 시련과 십자가를 하느님 은총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어떤 풍파가 닥쳐오더라도 항상 자신의 삶에 대해서 Yes!라고 외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7월12일(수)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