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7월 15일 토요일[(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7월 15일 토요일[(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7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기고 1274년 무렵 선종하였다.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그를 시성하였고,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입당송

에제 34,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이 사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주님이 그를 세우시어,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 주게 하셨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며 비오니
저희가 그의 높은 지혜와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며
언제나 그의 불타는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그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9,29-31.33; 50,15-26ㄱ
그 무렵 29 야곱이 아들들에게 분부하였다.
“나는 이제 선조들 곁으로 간다.
나를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의 밭에 있는 동굴에 조상들과 함께 묻어 다오.
30 그 동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맞은쪽 막펠라 밭에 있는 것으로,
아브라함께서 그 밭을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에게서 묘지로 사 두셨다.
31 그곳에 아브라함과 그분의 아내 사라께서 묻히셨고,
그곳에 이사악과 그분의 아내 레베카께서 묻히셨다.
나도 레아를 그곳에 묻었다.”
33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분부하고 나서,
다리를 다시 침상 위로 올린 뒤, 숨을 거두고 선조들 곁으로 갔다.
50,15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보고,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면서,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아우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분부하셨네.
17 ‘너희는 요셉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의 형들이 네게 악을 저질렀지만,
제발 형들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니 아우님은 그대 아버지의 하느님의 이 종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게.”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듣고 울었다.
18 이어 요셉의 형제들도 직접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아우님의 종들일세.”
19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20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1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며 다정하게 이야기하였다.
22 이렇게 해서 요셉과 그 아버지의 집안이 이집트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요셉은 백십 년을 살았다.
23 그러면서 요셉은 에프라임에게서 삼 대를 보았다.
므나쎄의 아들 마키르의 아들들도 태어나 요셉 무릎에 안겼다.
24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25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게 하면서 일렀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여기서 내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십시오.”
그러고 나서 26 요셉은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5(104),1-2.3-4.6-7(◎ 69〔68〕,33 참조)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
○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복음 환호송

1베드 4,14 참조
◎ 알렐루야.
○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3,14-19)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보나벤투라를 기리며 거룩한 제대에 바치는 이 제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제물이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또는>

루카 12,36-37 참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깨어 있는 종!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로 힘을 얻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를 본받아
그가 믿은 진리를 고백하고 그가 가르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전임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 신부님이 잠시 뉴욕으로 왔습니다. 신부님은 4년 동안 열심히 일하였고, 제게 넉넉한 운영자금을 남겨 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남겨주신 운영자금으로 팬데믹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신문 홍보를 위해서 미국 51개 주를 모두 다녔다고 합니다. Mary Hopkin이 감미롭게 불렀던 ‘Those were days.'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지나간 시절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옛날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지/ 우린 거기서 한 잔, 두 잔 잔을 기울이곤 했어/ 우리가 얼마나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 우리가 하려고 했던 거창한 계획들도/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우리는 그날들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지/ 우린 영원히 노래하고 춤추려고 했었지/ 우리가 선택한 인생을 살려고 했었지/ 우린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었지/ 우린 젊었고 우리의 길에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쁜 세월은 쏜살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우리의 빛나던 신념들을 그 세월 속에서 잃어버렸지/ 우연히 그 술집에서 너를 마주친다면/ 우린 서로 웃으며 말하겠지/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우리는 그날들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지/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그래 그때가 좋았지 지나간 날들의 추억을 회상하며 환하게 웃는 신부님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곳의 임기를 마치면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려 합니다. 그러게 하려면 지금의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마지막을 읽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한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100세에 얻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이사악은 큰 아들 에사우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고 했으나 야곱과 아내 레베카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분노가 두려워서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가량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딸들과 결혼하였고 1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작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동생을 편애한 것도 있고, 동생 야곱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형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뿌리쳤지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풀이를 잘하였고, 파라오의 마음에 들어서 이집트에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사는 땅에 큰 기근이 들었고, 형들은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형들은 성공한 동생 요셉을 만났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던 형들은 크게 걱정했지만 동생 요셉은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것이라고 말하며 가족들은 이집트로 초청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걱정이 되어서 요셉에게 다시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죽으면서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가족들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은 하느님 품에서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요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파견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을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대에 돈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모욕을 받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하겠지만 하느님께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달릴 길을 다 달린 제자들도 하느님 품에서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뭐 두려움 없이 담대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면 좋겠습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마태오 10,24-33

 

짙은 어둠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김창옥 강사가 오랜 강의로 지쳐 우울증이 걸려있을 때였습니다.

소통과 치유 등을 주제로 강의했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부질없이 느껴졌습니다.

길을 찾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노(老) 수사신부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신부님은 침묵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침묵을 어디서 배우냐고 묻자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마콩이라는 수도원에 들어가 잠시 피정을 하라는 권고였습니다.

 

하도 절박했기에 그는 생전 처음으로 2주의 휴가를 내서 프랑스 시골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는 어차피 말이 안 통하니 침묵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짧지만 진실 되게 자신과 대화해 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걸기가 두려웠습니다.

며칠이 지나 그 날도 과수원에 앉아 있는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너 여기까지 잘 왔다!” 별 말이 아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그 위로를 그렇게 갈망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강사가 자신이 믿지도 않는 종교가 운영하는 외국 피정 집에

귀중한 2주간의 휴가를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절실하면 얻게 됩니다.

 

대부분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길을 찾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황을 끝내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길을 제시해주면 시큰둥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혹은 자기 방식으로 끝내고 싶은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지만 또한 끊임없이 그 만남을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누군가와의 만남은

내 자신과의 헤어짐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느님이 있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통령의 옷까지 벗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먼저 대통령의 옷을 벗지 못하면

하느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대통령의 옷을 벗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를 벗어야 그분을 입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생각을 멈춰야 그분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성경이나 영성가들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과의 만남은 늘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분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둠에서만 구별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어둠임을 인정할 때

그 빛이 보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어둠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어둠속에서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둠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자신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 스스로 빛을 찾아내겠다고 돌아다녔다면

자신의 우울증을 끊어버렸던 저 목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방황할 때,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싶을 때,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합니다.

어둠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하게 홀로 멈추어서면 됩니다.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둠입니다.

 

세상 것에서 빛을 찾지 않는 것이고 내 스스로도 빛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만나지 못할까요? 계속 빛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짙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십계명을 내려주셨습니다(신명 5,22참조).

하느님께서 성막의 지성소에서 모세를 만나 이야기 하실 때도

지성소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의 공간이었습니다.

 

각자의 지성소가 있고 그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이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두워지지 않으면 그분은 빛으로 오실 수 없습니다.

 

배부를 때보다 배가 고플 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골똘히 생각할 때보다 생각의 끈을 놓았을 때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기쁠 때보다 어둠으로 짓눌릴 때 그분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고 하십니다.

분명 그분은 어두운 곳에서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밝아집니다.

 

말씀으로 등불을 삼고 싶다면 어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둠속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을 주님은 예언자로 만드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끊으면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어둠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분과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어둠 속에 있어야 말씀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머무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이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주님!
가슴 깊이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슬기로움을 주소서.
목숨이 노략질 당하는 굴욕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는 순박함을 주소서.
십자가에서 지니신 그 순박함과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다

-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성령충만한 삶-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시편37;3,5)

 

어제 하루가 참 은혜로운 날이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안에 펼쳐진 하루임에 감사했습니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세상을 떠난 요한 형님의 장례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 모두가 평화롭고 감사로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청담동 성당 오전 7시 장례미사 참석을 위한 차량봉사를 위해 밤 01:30분에 일어나 대전에서 02시에 출발한 조카 프란치스코가 수도원에 05시전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렀다가 청담동 성당에 여유있게 안내하여 주임신부님과 함께 만101세로 선종한 요한 형님의 조촐하고 아름다운 장례미사를 봉헌하니 얼마나 고맙던지요!

 

“요한 형님! 축하드립니다.”

 

라는 장례미사 강론 제목입니다. 정말 판란만장했던 세상살이 충실히 끝내고 아버지의 집에 귀향한 요한 형님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귀향의 여정을 끝내면 아버지의 집에 귀향할 것이고 이렇게 축하를 받으며 떠날 이들이 얼마나 될런지요. 이어 수원교구의 안성 공원 묘지에서 잔잔히 내리는 우중의 하관식도 은혜로웠습니다. 마지막 기도문입니다.

 

“영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요한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천국에 들게 하시며, 성인들과 함께 영원히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이미 지상에서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관식까지 조용히 내리던 비가 마치 참았듯이 끝나자마자 억수같은 장대비가되어 쏟아지기 시작했고 오후 내내 많은 비가 내렸으니 이 또한 자비로운 하느님의 배려 은총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조카와 베로니카 형수님이 시종여일 충실히 함께 해주었고 오후 1시 수도원까지 잘 도착되니 얼마나 산뜻하고 기분 좋은 하루였던지요! 대전에 무사히 도착한 조카의 답신이었습니다.

 

“삼촌 신부님을 오랜만에 뵈니 좋네요! 저 대전집에 잘 도착하였습니다. 삼촌신부님과 숙모님 뵙고 많은 대화 나눌수 있어 좋았고, 유족분들에게 큰 위로를 주신 삼촌 신부님의 장례미사 강론과 하관식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편안한 저녁되세요. 고맙습니다. 저녁 밥맛이 꿀맛이네요.”

 

밤 01:30분에 기상하여 오후 6시 대전집에 도착하기 까지 온전히 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한 프란치스코 조카에게도 축복 가득한 하루였을 것입니다. 차중에서 나눈 조카의 아버지인 셋째 형님의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한문 선생님이 가훈을 써오라 했을 때 아버지는 ‘정직, 효도, 우애’ 세 단어를 써주셨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중 수신제가修身齊家까지 해당되는 덕목입니다. 당시는 몰랐는데 나이들어 세월지나 갈수록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마음속에 심어졌다가 싹이 트고 계속 자라는 듯 합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보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셋째 형님이 얼마나 성실하고 충실했는지 조카인 3형제의 아들들을 보며 깨닫게 됩니다. 정말 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정 넘치게 매사 최선을 다해 살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 퇴직후 12년전에 돌아가신, 저를 가장 사랑해 줬던 바로 위 형님입니다. 형님은 세상을 떠나셨어도 효성과 우애가 뛰어난 삼형제 아들들이 형님의 뒤를 잇고 있으니 하느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최민순 신부님이 번역한 시편 136장, 1절부터 26절까지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후렴은 얼마나 은혜로운지 평생 부르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에 대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자비도 은혜롭기 한이 없습니다. 청년시절 형 에사우의 보복이 두려워 피신하여 브에르 세바를 떠나던중 하느님을 만났던 야곱이 노년에 이집트의 요셉을 만나러 가던중 브에르 세바에서 제사를 드렸고 또 하느님을 만납니다.

 

“야곱아, 야곱아!”

“예, 여기있습니다.”

 

다정한 부름과 응답을 통해 하느님과 한결같은 사랑의 친교를 나눠 온 야곱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야곱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과의 한결같은 친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의 인도로 요셉을 만나 목을 껴안은채 우는 야곱의 고백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평생 하느님과 함께 살아 온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에게서 하느님 없는 삶은 상상불가입니다. 저 역시 하느님 없는, 예수님 없는 삶은 상상불가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처럼 주님과의 한결같은 끊임없는 신뢰와 사랑의 삶이었는지 반성하게 되고 심기일전 다시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이들 이스라엘의 선조들처럼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당신과 제자들과의 친밀한 관계와 더불어 아버지의 영이 늘 함께 하심을 상기시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영적 전쟁터에서 치열한 영적전투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충고 말씀으로 큰 위로와 힘이, 격려가 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줄 것이니,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 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주님과의 한결같은, 끊임없는 친교의 나눔이, 지혜롭고 순박한 처신이, 끝까지 견뎌내어 인내로 구원을 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해주는 아버지의 영, 성령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해 주시며, 늘 성령충만한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하십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내 주 하느님 안에서 춤추겠나이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 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박3,18-19). 아멘.


[7/15(토)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달릴 길을 다 달린 제자들도 하느님 품에서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뭐 두려움 없이 담대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그래, 너 여기까지 잘 왔다!” 별 말이 아니었지만 그(김창옥 강사)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그 위로를 그렇게 갈망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이나 영성가들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과의 만남은 늘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분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둠에서만 구별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어둠임을 인정할 때

그 빛이 보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주님!
가슴 깊이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슬기로움을 주소서.
목숨이 노략질 당하는 굴욕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는 순박함을 주소서.
십자가에서 지니신 그 순박함과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평생 하느님과 함께 살아 온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에게서 하느님 없는 삶은 상상불가입니다. 저 역시 하느님 없는, 예수님 없는 삶은 상상불가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처럼 주님과의 한결같은 끊임없는 신뢰와 사랑의 삶이었는지 반성하게 되고 심기일전 다시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이수철 신부)

 

[7/15(토)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제 203일 기도]

 

임마누엘 하느님, 야훼이레 하느님!

빛이신 하느님!

어둠 속에 있는 저를 인정하면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7얼15일(토) 4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