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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7월 16일 주일[(녹)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7월 16일 주일[(녹)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입당송

시편 17(16),15 참조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비는 땅에서 싹이 돋아나게 한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5(64),10ㄱㄴㄷㄹ.10ㅁ-11.12-13.14(◎ 루카 8,8)
◎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었네.
○ 하느님은 이 땅에 찾아오시어, 넘치는 물로 풍요롭게 하시나이다. 하느님의 강은 물로 가득하고, 당신은 곡식을 영글게 하시나이다. ◎
○ 정녕 당신이 장만해 주시나이다. 고랑에 물 대시고 이랑을 고르시며, 비를 내려 부드럽게 하시어, 새싹들에게 복을 내리시나이다. ◎
○ 한 해를 은혜로 풍요롭게 하시니, 당신이 가시는 길마다 기름진 땅이 되나이다. 사막의 풀밭에도 윤기가 흐르고, 언덕들도 기쁨의 띠를 두르나이다. ◎
○ 목장들은 양 떼로 뒤덮이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가득 쌓여, 환성을 올리며 노래하나이다. ◎

제2독서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8,18-23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23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또는>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빛이신 주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를 몸소 이끌어 주시어, 교회가 세상 속에서 주님의 진리를 전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공동의 집인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저희를 굽어살피시어, 주님의 지혜를 실천하며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참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3.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창조주이신 주님, 농민들을 보살펴 주시어, 생태 위기와 함께 닥친 자연 현상의 변화에도 잘 대처하게 하시며, 수고의 합당한 대가를 얻고 안정된 생활을 이어 갈 수 있게 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겸손하신 주님, 모든 가정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시어, 서로 존중하고 아낌없는 도움과 조언을 주고받으며 사랑으로 보듬어 안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시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성덕을 더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3 :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천주성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도와주시고
그 인성으로 저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84(83),4-5 참조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또는>

요한 6,5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읍시다.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땅이 되어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아 백 배의 열매를 맺읍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은 농민주일...^^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깊게 보고자 하는 말씀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군중들에게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귀’가 당신의 비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태 13,34 참조). 예수님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쉬워지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마태 13,13 참조). 

    예를 들어 꿀이 없는 세상에 꿀을 맛본 사람이 있다면 그 꿀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 꿀은…. 마치 꽃처럼 향기롭고, 태양처럼 따사롭고, 사탕처럼 달곰하며, 엄마 품처럼 포근한 맛이 납니다.” 

    

    비유는 이렇듯 이미 다른 차원의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자신의 체험까지 오게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마치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어떤 섬에 그들이 문명의 세계로 나아올 수 있도록 놓아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말씀이고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자신들의 세상보다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이 더 유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리를 건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해석하려 들지 말고 순종 하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아무 쓸모 없는 황무지와 같은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게으른 두 아들에게 엄청난 크기의 땅을 반씩 나누어 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받은 땅속엔 내가 공평하게 나누어 묻어 둔 나의 모든 유산이 있단다. 그것을 찾아내어 행복하게 살아라.”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각자의 땅을 열심히 팠습니다. 하지만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고된 노동 끝에 아버지에게 속았다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는 땅을 헐값에 팔아 방탕하게 소진하였습니다. 결국 병에 걸려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둘째는 달랐습니다. 역시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땅을 파다가 밭의 돌을 다 걷어 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씨앗을 뿌리니 엄청난 수확을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비록 황무지이지만 비옥한 땅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돈도 많이 벌었고 행복한 가정도 꾸렸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에 대한 두 아들의 생각이 달랐을까요? 첫째는 비유 말씀을 해석하려 들었고 둘째는 비유 말씀에 순종 하였습니다. 어떤 말씀을 해석하거나 분석하려는 시도는 내가 그 말씀을 한 분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더 똑똑한 사람이 덜 똑똑한 사람의 말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말씀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이들은 자아를 긍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아는 뱀입니다. 뱀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뱀이 요구하는 ‘가져라’, ‘먹어라’, ‘높아져라’라는 명령이 행복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반대되는 하느님의 요구는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문밖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길과 같은 사람은 자아를 긍정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돌 밭과 같은 사람은 들었다가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가시밭과 같은 사람은 돈 걱정 때문에 결국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부모님 말씀에 순종 할 줄 압니다. 그 말씀만이 자신을 어른으로 성장 시켜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믿기 때문에 부모의 말을 분석하기보다는 순종 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 할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 봉헌’이 신앙인으로서 들을 귀가 있다는 첫 번째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봉헌하면 가시밭과 같이 될 일은 없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주님의 가시밭이었기 때문에 멸망하였습니다. 

 

    나무 토막에 계속 불을 지피면 그 안에 있든 물이 빠져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 내면의 안 좋은 욕구들을 솎아내기를 원치 않으면 아무리 성령의 불이 내리더라도 그 사람 안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에 무조건 순종 하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연중 제15 주일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매일 올리는 묵상 글 때문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갈 때였습니다. 성지순례 가이드께서 제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팬데믹 때입니다. 신부님이 매일 올려주는 복음 묵상 글이 제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성지순례 온다는 것을 알고 밀라노 두오모 성당의 미사를 애써서 잡아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복음 묵상 때문에 위로를 받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만나는 분이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가웠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미사에 우간다에서 온 신부님이 함께 미사를 하고 싶다고 하여서 공동 집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가기 전에 밀라노에 잠시 들렸고, 마침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에 함께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매일 올린 복음 묵상 글이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3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 토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씨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환경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 태어난 사람, 가풍이 있는 집에 태어난 사람, 태어나면서 고아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좋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릴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결실을 맺기 어렵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말을 할 때는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쁜 마음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심하게 하면 그 약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강론을 하는 사제는 본인이 하는 강론을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자들은 사제의 강론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말은 그럴싸하지만 삶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나무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고,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린다면, 시련과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가 전한 말씀이 열매 맺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기도하고, 확신에 차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록 척박한 토양이라도 하느님께서는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순교의 시대에도 교회는 찬란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시대에도 교회는 활력을 잃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토양이 아닙니다. 그 토양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마음과 결심입니다. 내가 말씀으로 무장하면 복음의 씨앗은 꽃이 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시기와 질투의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참된 삶, 영원한 삶

-하느님 중심의 삶-

 

 

12년전 돌아가신 셋째 형님의 혜안慧眼에 감탄합니다. 아들들에게 주었다는 정직, 효도, 우애 가훈의 세 말마디중 첫째의 덕목 정직입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지내는 그러나 참으로 첫째로 놓아야 할 덕목이 정직입니다. 참된 삶, 영원한 삶의 우선적 조건이 바르고 참된,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삶입니다. 정직한 삶 자체가 구원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정직한 삶입니다. 셋째 형님은 세례자 요한 예언자처럼 의롭고 정직하게 사셨습니다. 아주 예전 18년전인 2005년에 써놨던 ‘사랑하는 내 형님은’ 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올 팔월에 정년퇴직을 앞둔 세례자 요한 내 형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시다

옛날 시골에서 그 어렵다는 사범학교를 나오셨다

술 담배 일체 안 하시고

오로지 가정과 학교 일에만 전념하셨다

아들 셋에 손자가 둘인 할아버지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젊어 평생을 열정의 청년교사로 사셨다

세월도 형님을 비켜갔다

법없어도 사실 참 선량하고 순수한 분이시다

이 점에서는 내 요셉 큰 형님도, 베네딕도 둘째 형님도 똑같다

생각만 해도 자랑스럽고 든든한 형님들이다

구십 노모를 모시고 계시며

때때로 목욕도 시켜드리고 손톱 발톱도 깎아 드리는

보기 드문 효자이시다

요즘은 신앙에 맛들여 내 강론과 시도 빼놓지 않고 읽으신다

인터넷에서 강론을 읽으신 후 꼭꼭 틀린 글자들은 정정하여 

이메일로 보내 주신다

천생 타고난 자상스런 선생님이시다

요즘도 가르치는 일에 

마지막 열정을 쏟으시는 형님은 동생인 내가 방문할 때마다 

꼭 마중나오시고 떠날 때는 버스 터미널까지 나와 차표를 사주시고 

또 몇만원 주머니 속에 슬며시 넣어주신다

그리고 차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흔들어 주고 돌아가신다

어렸을 때는 가장 많이 싸운 그러나 싸운 후엔 곧장 까맣게 잊어버렸던

다정하면서도 열정 가득한 

사랑하는 내 바로 위에 세례자 요한 세째 형님이시다”

 

2011년 7월 5일 장례미사때도 나눈 시입니다. 세상을 떠났지만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 영원한 삶을 사셨기에 지금도 제 마음엔 물론 세 아들들 마음에도 좋은 추억들로 가득히 살아계신 형님입니다. 엊그제는 세째 형님 대신에 큰 아들인 조카 프란치스코가 거금을 제게 주었고 마침 생각난 18년전 시였습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맨먼저 가르칠 자녀교육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신앙교육인 것입니다. 참사람되는 공부의 첫째가 바로 하느님을 아는 공부입니다. 우선적인 결정적 요소가 부모의 신앙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삶을 보고 배우면서 비로소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공부가, 신앙이 있어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성인다운 참삶입니다. 광야인생, 이런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막 함부로 살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도 될 수 있고,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재앙이, 불행이 괴물이요 폐인입니다. 그래서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바, 선택-훈련-습관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총이나 구원은 없습니다. 죽을때까지 은총과 더불어 부단히 사랑도 이렇게 노력하고 훈련할 때 비로소 참나의 성인입니다. 성서의 위인들이나 교회의 성인들이 바로 참된 삶, 영원한 삶의 모범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립자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기념일입니다. 13세기 당시 도미니코회의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지적인 천사적 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프란치스코회의 영적인 세라핌 박사 성 보나벤투라가 좋은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성인의 보나벤투라 이름도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각별한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전설적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잘 왔노라”, “좋은 소식이로다”라는 의미로 보나벤투라를 봤을 때 프란치스코 입에서 저절로 타져나온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기도 성인의 작품입니다. 성 보나벤투라가 추기경 서임시 일화도 그의 겸손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추기경 서임 칙서를 전하러 교황사절이 도착했을 때 성인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설거지가 다 끝날 때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성인은 참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찾아가 “그 높은 지성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묻자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삶입니다.” 대답했다 합니다. 한 할머니가 “수사님의 지혜를 하느님께서 아시니, 천당에서 분명히 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거요.” 칭찬하자 “저보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도 있죠”하고 대답했다는 일화입니다. 참으로 치열히 살다가 추기경이 된 보나벤투라는 공의회 참석중 1274년 7월15일 새벽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물론 다수의 동서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57세 나이에 병환으로 선종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요셉의 형님들에 대한 관대한 처사가 감동적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신앙을 보고 배워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기에 하느님을 닮은 멋진 삶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꿈이 꿈쟁이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하느님은 굽은 선들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입니다. 이어지는 말이 또 감동입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요셉은 죽습니다. 앞서 야곱의 죽음 장면에 대한 묘사도 거룩한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게 합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분부하고 나서, 다리를 다시 침상위로 올린 뒤, 숨을 거두고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렇게 한생을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다 거룩한 유언을 남기고 편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할자가 몇이나 될런지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잃어버린 영혼의 죽음입니다.

 

영혼없이, 생각없이 자기를 잊고, 잃고 사는 이들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은 죽어있는 유령같은 좀비같은, 괴물이나 폐인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 중심의 삶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육성처럼 들립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참새보다 더 귀하다.”

 

정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신 생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초연하여 영원한 삶을 삽니다. 그는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순교성인들이 영혼 승리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경외할 때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세상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참으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서 주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삶이 참된 삶,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향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되고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7/16(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되새김 구절]

 

1.  성경 말씀은 모두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태 13,34 참조). 예수님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쉬워지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마태 13,13 참조). 

 

 비유는 이렇듯 이미 다른 차원의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자신의 체험까지 오게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마치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어떤 섬에 그들이 문명의 세계로 나아올 수 있도록 놓아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말씀이고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자신들의 세상보다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이 더 유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리를 건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해석하려 들지 말고 순종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문밖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전삼용 신부)

 

2.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시기와 질투의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조재형 신부)

 

3. “(에덴)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이영근 신부)

 

4. 선택-훈련-습관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총이나 구원은 없습니다. 죽을때까지 은총과 더불어 부단히 사랑도 이렇게 노력하고 훈련할 때 비로소 참나의 성인입니다. 성서의 위인들이나 교회의 성인들이 바로 참된 삶, 영원한 삶의 모범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립자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기념일입니다.

성인의 보나벤투라 이름도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각별한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전설적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잘 왔노라”, “좋은 소식이로다”라는 의미로 보나벤투라를 봤을 때 프란치스코 입에서 저절로 타져나온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기도 성인의 작품입니다. 

 

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찾아가 “그 높은 지성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묻자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삶입니다.” 대답했다 합니다. 한 할머니가 “수사님의 지혜를 하느님께서 아시니, 천당에서 분명히 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거요.” 칭찬하자 “저보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도 있죠”하고 대답했다는 일화입니다. 참으로 치열히 살다가 추기경이 된 보나벤투라는 공의회 참석중 1274년 7월15일 새벽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물론 다수의 동서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57세 나이에 병환으로 선종합니다.(이수철 신부)

 

[7/16(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제 204일 기도]

 

임마누엘 하느님! 야훼이레 하느님!

저의 머리카락 낱낱이 세고 계신 자상하신 하느님!

풍랑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 명령하신 하느님!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하느님!

하느님의 저를 향한 사랑과 은총 은혜에 무한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7월16일(일) 11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