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3일 주일[(녹) 연중 제22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20,7-9
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8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
○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
○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 정녕 당신은 저를 도우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에서 환호하나이다. 제 영혼 당신께 매달리오면,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드나이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2,1-2
1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1-27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구원자이신 주님,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 가난의 정신을 되새겨 주시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신 성자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정의의 주님,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저희를 이끌어 주시어, 인종과 성별, 장애와 나이, 신분과 외모 등으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를 존중하며 참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3.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사회에서 소외되어 비인간적 생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그들이 제도 안에서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으며 결코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지도 않게 하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도자이신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와 함께하시어, 피조물 보호의 날에 한 다짐들을 기억하며 유한한 지구 자원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보호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소서.
예물기도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더없이 사랑하시어
그리스도를 저희에게 구세주로 보내 주시고
죄 말고는 저희와 똑같은 처지에서 살게 하셨나이다.
그리하여 성자를 사랑하셨듯이 저희를 사랑하시고
저희가 순종하지 않아 죄를 지어 깨뜨린 계약을
성자의 순종으로써 다시 맺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마태 5,9-1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2 주일
- 죽음이 삶이 되지 않을 때, 삶이 죽음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 나온 사례 중에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숨 넘어가는 소리로 “내 돈 2억 갚아, 임마!”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 그것에 사로잡혀 더 가지려 하고 더 즐기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소유욕, 식욕과 성욕, 그리고 지배욕이 강해지며 집착에 대한 고통과 이웃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돈 좋아하고 절제 없는 삶을 살고 자기만 아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반면 어떤 사람은 죽음을 삶과 별개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을 구하러 왔던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라이언에게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못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들이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받아들인 척하며 실제로는 그 결정을 죽음 직전까지 미룹니다. 그러면서도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죽음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접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 보면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가 말기 암으로 투병 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신앙을 가지게 된 간증이 있습니다. 자기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한 환자는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고 신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눈의 실 핏줄이 다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 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라며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습니다. 무언가를 본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수가 30 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도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지은 씨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 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에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이나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 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 품 안에’]
이태석 신부님은 암 선고를 받고 먼저 돌보던 사람들을 돌볼 수 없게 된 것에 너무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죽음 뒤에 당연히 부활이 있으니 죽음은 그분의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지 못했습니다.금문교를 지을 때 인부들이 두려움 때문에 물에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쳤더니 아무도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내일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남에게 도움이 되는 죽음으로 살 때 그 사랑의 실천으로 부활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을 거부하던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선택은 우리 것입니다. 그 선택으로 지금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금의 삶이 죽음이 될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일
운전하면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려면 스마트 폰을 자동차의 USB 단자에 연결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자동차의 스크린에 스마트 폰의 스크린이 옮겨집니다. 마치 스마트 폰의 내용들이 자동차의 힘에 의해서 조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USB 단자에 연결된 케이블을 뽑으면 스마트 폰은 다시금 제 자리를 찾습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카톡’도 그렇습니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던 카톡을 숙소에서 사용하게 되면 사무실의 카톡은 정지가 됩니다. 카톡을 설치할 수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카톡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래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최면치료’에서도 보았습니다. 최면 상태에 들어가면 마치 영혼이 최면을 건 사람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최면을 건 사람이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우는 것을 봅니다. 평소에 잊고 있던 일들,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간직했던 기억들이 최면에 의해서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담자는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마음이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중국 무협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이렇습니다. “운기조식이나 영약을 섭취하고 기운을 갈무리 할 때 외부에서 충격을 받거나, 심마 같은 마음에 큰 동요가 있을 때, 혹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과하게 영약을 복용했을 때 몸 안에 도는 기를 통제하지 못하여 내공이 역류하거나 폭주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쉽게 설명하면 마가 내 몸을 치고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본인은 대부분 그 상태를 잘 모르고 있으나 차츰 평소의 내 의지와는 다른 행동이나 몸의 변화가 오게 되는데 대게 건강이 악화되고 정신적인 장애가 생기며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주화입마의 대표적인 상황은 ‘마귀’에 들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라는 마귀들을 쫓아버렸습니다. 마귀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알아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귀에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버리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에게 조정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하지만 무엇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지, 무엇이 마귀로부터 오는지 식별하지 못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일곱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일곱 마귀는 ‘칠죄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칠죄종에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음욕’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반석이다. 내가 너를 통하여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 우쭐해있던 베드로 사도는 ‘교만’의 마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교만에 빠져있던 베드로 사도는 감히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사제복이 우리를 마귀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마귀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의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명’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선물은 말씀처럼 ‘씨앗’(마태 13,1-23)으로, 곧 ‘종자돈’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할 때는 그 선물을 활용하여 맺은 열매에 따라 대가를 지불합니다.
결국, ‘선물에 따른 응답 실행’이 바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경기의 규칙인 셈입니다.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23)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25,26)
사실 은총의 선물은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주는 대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만큼만 받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임은 비워진 만큼만 받을 수 있고,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기에, 결국 베풀수록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충실하게 열매 맺는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깨어 준비하는 삶'은 맡겨진 일에 충실함이요, 맡겨진 일에 충실함은 일을 맡긴 분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충실함’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셨습니다.
바로 이 ‘은총’과 ‘십자가’야말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규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은총 그 자체보다도, 은총을 실현하는 데 따르는 십자가 그 자체보다도,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렌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진정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하느님 중심의 삶
-하느님 알기, 나를 알기, 최선을 다하기-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오늘 역시 집무실 벽에 붙어있는 십자고상과 태극기를 바라보며 십자성호와 영광송후 만세오창후 시작한 하루입니다. 나라가 백척간두, 풍전등화, 누란의 위기에 처한 작금의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또 한반도의 평화와 국내의 안정이 이뤄질때까지 계속될 만세오창입니다. 일기쓰듯 하는 강론이요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희망을 찾는 마음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희망을, 빛을, 길을, 눈을, 중심을 잃은 세상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방황이요 병도 죄도 많습니다. 참으로 궁극의 희망은, 빛은, 길은, 눈은, 중심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나라의 희망이, 빛이, 길이, 눈이, 중심이 되어야 할 시대가 도래한 듯 합니다.
“+부고; 친애하는 수사님들, 2023년9월1일 한낮에 우리의 친애하는 형제, 로마누스 수사님이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평화롭게 선종하셨습니다. 로마누스 수사님은 1938년9월10일 란트하우젠에서 태어났고 1961년 5월 12일 서원했습니다. 장례미사는 9월5일 화요일 10:30에 열립니다.”
게시판에 소개된 저보다 11살 연상이니 만85세에 복된 죽음을 맞이한 독일의 수도형제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도 축제일수 있습니다. 산날보다 죽을날이 점차 가까워지니 하루하루 날마다 본질적 깊이의 선물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희망의 순례자 교황님의 홈페이지 1면 기사 제목,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대한 문화의 민족, 몽골에 도착하다”에 이어 화려한 의상을 한 우리와 흡사한 아름답고 순박한 모습의 몽골인들이 친근하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일어나자 만난 밝은 뉴스들입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아름다운 영혼들을 가득 만났던, 참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아침식사후 매일미사에 참석하는 참 좋은 자매님이 직접 수녀원까지 차량봉사를 해줬고, 수녀님들의 친절한 환대에 이어 9;30-12시까지 여러 수녀님들에게 면담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만났던 모든 수녀님들의 영혼이 참 아름다웠고 모두가 진지했고 한분한분이 참 귀한 고유의 성소자임을 발견하고 확인했습니다.
새삼 고백성사는 벌이 아니라 화해와 일치, 치유와 위로의 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지옥같은 험난하고 힘겨운 세상 안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위로와 치유, 격려의 따뜻하고 힘있는 주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주방소임이 행복하다던, 공동체를 참으로 사랑하고 주방일을 좋아한다는 주방장 수녀는 무남독녀 외동딸이고 홀로 계신 노모는 전화할 때 마다 “착하게 살라!”는 마지막 말이라 했습니다. 면담성사시 수녀님들의 아름다운 영혼,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배우고 위로받고 치유받고 격려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원장수녀님도 얼마나 밝고 환한 모습인지 열정과 순수를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좌우간 모든 수녀님들이 웃는 밝은 모습으로 성사를 봤습니다.
5월부터 시작된 대규모 리모델링 수녀원 공사는 10월 중순쯤 끝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런 일련의 공사가 어수선한 중에도 공동체의 평화의 일치도 견고해짐을 감지했습니다. 더구나 어제는 9월 순교성월 첫날이었고, 수녀원 리모델링 공사중 종탑을 완성한 날이라 수녀원 중심에 위치한 가장 높은 종탑에 위치한 동으로된 새벽을 깨우는 수탉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마음 중심에 자리 잡으면서 순간 위로와 평화, 치유를 느꼈습니다.
“수녀님, 마음 중심에 종탑을 지니고 사세요!”
덕담도 드렸습니다. 마침 엊그제와 어제의 복음 주제도 “깨어 있어라!” 였는데 종탑 꼭대기의 수탉은 그대로 깨어있음의 상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떠날 때 노동에 지친 창백하고 마른 병색이 짙은 두 일꾼들의 휴식하던 모습도 계속 눈에 밟혔습니다.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라는 어느 정치지도자의 비전이 꼭 실현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더불어 그립게 떠오르는 세 얼굴, 참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과 정조의 성군(聖君)과 다산 정약용 학자입니다.
역시 참 좋은 두분의 수녀님들이 수도원까지 차량봉사해 주었고, 배즙과 제 아끼는 시집, “하늘과 산”을 선물했고, 고백성사를 받기전 고백신부님에게도 선물했고 고백성사를 받은후, 서로 강복도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시국에 대한 걱정도 나눴습니다. 모두가 공감하는바 현 시국에 갖는 위기의식입니다. 답은 기도뿐이요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저녁식사전 언뜻 봉사차 온 자매님의 일에 전념하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참 아름답고 사랑스런 세 장면은 1.고백성사를 보기위해 겸손히 기다리는 모습, 2.기도에 전념하는 모습, 3.맡은바 일에 전념하는 모습이요, 이런 장면을 대할 때 마다 삶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어제 수녀원 중심부에 세워진 수녀원 종탑을 보는 순간 깊이 각인된 영원한 바라봄의 대상, 삶의 중심인 하느님입니다. 새삼 강조하는바,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요 빛이요 길이요 희망이요 눈이라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하느님 중심의 삶뿐입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 중심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복한 구원의 삶이겠는지요?
첫째, 하느님을 아는, 하느님 공부입니다.
예수님을 공부하여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바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예수님 공부가 바로 하느님 공부요, 날마다의 복음을 통해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다섯 탈렌트를 받았다가 다섯 탈렌트를 남긴 이, 두 탈렌트를 받았다가 두 탈렌트를 남긴 이, 바로 주님을 알았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을 깊이 사랑했고 신뢰했기에 최선을 다했고 똑같이 “착하고 성실한 종아!” 칭찬을 받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업적의 양이 아니라 삶의 성실도입니다. 각자의 주신 몫에 충실하면 됩니다. 이래야 자존감 높은 삶입니다. 주님을 아는 평생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둘째, 자기를 아는, 자기 공부입니다.
평생 주님 공부와 함께가는 평생 자기공부입니다. 정말 지혜롭고 겸손한 자는 자기를 아는 사람입니다. 다섯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남긴이 정말 자신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비교할 것도 없이 자기 받은 몫에 충실했습니다. 비교로 인한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제받은 몫에 충실하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자존감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셋째,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바로 진인사대천명의 삶이요 지성이면 감천의 삶입니다. 삶은 모험이요,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평생과제입니다. 다섯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남긴이, 모험적 인생을 결코 자포자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용감히 자기 몫에 최선을 다함으로 평생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이에 감동한 주인은 이들을 격찬합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오늘의 비유도 하늘 나라의 비유요, “깨어 있어라”에 연장되는 복음입니다. 지옥같은 세상에 천국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줍니다. 언제 어디서든 깨어 제자리에서 제몫에 충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바로 거기가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 일행 역시 이런 삶을 격려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더욱더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시종여일, 하느님을 아는 공부, 자기를 아는 공부, 제몫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얼마나 결정적 구원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 받은 이는 완전히 실패인생이 되었으니, 그는 하느님을 몰랐고, 자기도 몰랐고, 그리하여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선물이자 과제인 삶을 완전히 방치했습니다.
그는 현상유지를 택해 모험하지 않았고 무책임했고 태만했고 좌고우면 우유부단 소심했고 자기를 닫은 삶이었습니다. 그가 정녕 주님을 믿어 알고 자기를 알고 자기를 열어 최선을 다했다면 한 탈렌트 받아 한 탈렌트를 남겼어야 했습니다. 업적의 양보다는 과정의 충실도를 보시는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적든 많든 받은 은사에 태만하면 지닌것조차 잃습니다. 주님의 선언이 참 엄중합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제 삶의 자리에서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고, 하느님을 아는 평생 공부, 자기를 아는 평생 자기 공부와 더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제몫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9/3(일) 연중 제22주일, 되새김 구절]]
1. 두려워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내일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남에게 도움이 되는 죽음으로 살 때 그 사랑의 실천으로 부활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을 거부하던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선택은 우리 것입니다. 그 선택으로 지금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2. 세례를 받는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조재형 신부)
3.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렌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진정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업적의 양보다는 과정의 충실도를 보시는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적든 많든 받은 은사에 태만하면 지닌것조차 잃습니다. 주님의 선언이 참 엄중합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제 삶의 자리에서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고, 하느님을 아는 평생 공부, 자기를 아는 평생 자기 공부와 더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제몫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이수철 신부)
9/3(일) 연중 제22주일, 제253일 기도]
복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고,
하느님을 아는 평생 공부, 자기를 아는 평생 자기 공부...
더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제몫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9월3일(일) 5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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