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15일 금요일[(백)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시메온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네. 보라,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리니, 당신의 영혼이 칼에 찔리리라.
본기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 제게 당신 귀를 기울이시고, 어서 저를 구하소서. ◎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
○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
○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
○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 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 ◎
부속가
1. 아들예수 높이달린 십자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2. 섧고설운 슬픔고통 성모성심 칼에찔려 참혹하게 뚫렸네.
3. 독생성자 수난하니 여인중에 복된성모 애간장이 다녹네.
4. 아들수난 보는성모 맘저미는 아픔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5. 예수모친 이런고통 지켜보는 우리죄인 누가울지 않으리?
6. 십자가의 아들보며 함께받는 성모고통 누가슬퍼 않으리?
7. 우리죄로 채찍모욕 당하시는 아들예수 성모슬피 보시네.
8. 기진하여 버려진채 죽어가는 아들보고 애처로이 우시네.
9. 사랑의샘 동정성모 저희들도 슬퍼하며 함께울게 하소서.
10. 그리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마음에 불이타게 하소서.
11.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12. 저를위해 상처입고 수난하신 주님고통 제게나눠 주소서.
13. 사는동안 십자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울게 하소서.
14. 십자곁에 저도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15. 동정중의 동정이신 성모님의 크신슬픔 저도울게 하소서.
16. 주님상처 깊이새겨 그리스도 수난죽음 지고가게 하소서.
17. 저희들도 아들상처 십자가위 흘린피로 흠뻑젖게 하소서.
18. 동정성모 심판날에 영원형벌 불속에서 저를지켜 주소서.
19. 그리스도 수난공로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호하여 주소서.
20. 이몸죽어 제영혼이 천국영광 주예수님 만나뵙게 하소서.
복음 환호송
○ 동정 성모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3-35
그때에 예수님의 33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신 동정 마리아를 저희 어머니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리며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과 기도를
기꺼이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하고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 ( ) 축일에
아버지를 찬송하고 찬양하고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외아들을 잉태하시고
동정의 영광을 간직한 채
영원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이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고
주품천사들이 흠숭하며 권품천사들이 두려워하고
하늘 위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복된 세라핌이
다 함께 예배하며 환호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소리를 모아 삼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감사송 2 : 마리아의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
거룩하신 아버지,
모든 성인을 훌륭히 이끌어 주신 주님을 찬미하고
특히 저희가 기념하고 공경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노래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주님께서는 땅끝에 이르기까지 큰일을 하시고
대대로 자비를 너그러이 베푸셨나이다.
비천한 종 마리아를 돌보시어
마리아를 통하여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원자로 보내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받으며 기뻐하여라.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기뻐 춤을 추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영원한 구원의 성사에 참여하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며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9월 15일 금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그 누구보다 깊이 동참하셨던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러 성전에 오신 성모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예언에 성모님께서는 어리둥절하셨을 것입니다.
‘분명 가브리엘 천사는 이 아기가 큰 인물이 되고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릴 분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불리리라 말하였는데(1,31-35 참조),
이 사람은 어째서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시메온의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맙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셨고,
그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아들을 바라보셔야 하였던 성모님께서는
마치 ‘칼에 꿰찔리는’ 듯한 아픔을 겪으셔야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시며 그 고통에 깊이 동참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길에서 넘어지실 때마다 비통하게 우셨고,
그분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는 마치 자신의 몸에 못이 박히듯 아파하셨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성모님,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 그 어머니에게 아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곁에 있던 제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모님께서 제자들의 어머니, 곧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순간입니다.
아드님의 수난 여정에 동참하신 성모님께서 이제 그분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할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는 그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여정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스승을 따르는 여정입니다(9,23 참조).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그 여정에 늘 함께하십니다.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께서 직접 보고 느끼신 아드님의 상처를 우리 제자들 마음속에도 깊이 새겨 주십사 성모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11절).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나 휴양지는 그곳을 대표하는 ‘랜드마크(Landmark)’가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는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뉴욕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북경에는 ‘자금성’이 있습니다. 서울에는 ‘경복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무덤 성당’이 있습니다. 로마에는 ‘바티칸’이 있습니다.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습니다. 물론 랜드마크 이외에도 볼 곳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랜드마크가 있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먼저 찾게 됩니다. 신문 홍보를 하려고 LA에 갔다가 ‘맘모스 산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맘모스 산에도 랜드마크가 있었습니다. ‘데블스 포인트파일(Devils Postpile)과 레인보우 폴(Rainbow Falls)’입니다. 시간이 부족한 저는 레인보우 폴은 다음을 기약하고 데블스 포인트파일을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았을 것 같은 높은 절벽에 기암괴석이 있었습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는 ‘브라이덜 폭포(Bridalveil Falls)와 글래셔 포인트(Glacier Point)’가 있습니다. 폭포도 좋았지만 빙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프 돔(Half Dome)은 아름다웠습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자비와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고통’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가지는 4가지 고통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처럼 미워하는 사람을 매일 보는 것은 칼에 찔리는 것 같은 아픔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좌절입니다. 거짓된 자아에 빠져드는 고통입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것은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착을 버리면 고요함이 오고,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나의 세계에서 찾기도 하고, 깨달음을 삼라만상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바른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스며들어있습니다.
교회의 핵심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라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불교의 고통은 인간의 집착에서 시작되었다면 교회의 고통은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불교에서 고통은 우리의 노력으로 버려야할 대상이지만 교회에서 고통은 나의 구원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원리와 기초에서 교회의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다.” 불교와 교회에서 바라보는 고통의 현상은 비슷하지만 불교와 교회에서 바라보는 고통의 본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처님과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부처님 상은 자비롭고, 너그럽고, 풍채가 좋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예수님 상은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처절한 모습입니다. 불교의 고통이 버려야 할 것이라면 교회의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지고가야 할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고통은 아드님, 예수님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고통에 함께하시면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성모님은 모든 고통을 받으셨지만, 좌절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고 하지만,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지만 성모님의 고통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드렸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여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신앙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요한 3,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렇습니다. 이 큰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형벌’은 손과 발이 못박인 채 철저히 무력해진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참함의 끝이요, 노예 죄수에게나 행해지는 참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음이요, 그야말로 완전한 패배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갈라 3,13)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1코린 1,23 참조). 그러나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오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는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십자가는 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고 도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존재’이기에 앞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나아가서는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죄 없음에도 죄를 뒤집어쓸 줄을 아는 일’입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고 곡해 받고 누명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곧 죽이는 일이 아니라 죽음 당하는 일이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앞서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입니다. 동시에, 나아가는 틀려서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힘 있으면서도 눌리는 일입니다.
<셋째>는 ‘타인을 위하여 건네주는 곳’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것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며, 패배이지만 사랑의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며,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우리 삶의 의미가 되었고, 역사의 역전이며 혁명이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며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합시다”
십자가 예찬
-한반도의 십자가-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시 사제와 회중이 주고 받는 아름다운 곡이 생각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9월부터의 가을은 수확의 계절임과 동시에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로사리오 성월, 11월 위령성월에 이은 대림시기, 그러다보니 1년이 성큼 지난듯 합니다. 참으로 깨어 간절히 기도해야할 총체적 난국, 총체적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한국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반갑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기도중 가장 짧으며 가장 좋은 기도가 <가톨릭 기도서> 맨처음에 나오는 성호경일 것입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 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게 되었고,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합니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축일은 9월 14일로 고정됩니다. 오늘 역시 집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그리스도의 십자고상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성호경과 영광송 기도후 만세육창을 하고 성가처럼 애국가 1절을 부른후 하루를 시작했고 이어 쓰는 매일 묵상글 강론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참 절박한 기도입니다. 어제 모일간지에서 미국 캔자스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에이드리언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공감했습니다.
“한국은 다극주의 강대국에 둘러쌓여 있다. 미국이 한쪽 편을 들라고 강요하더라도 이를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기억할 것은 한국은 주권국이란 사실이다. 균형을 갖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안다.
자국의 안보를 동맹에 의존하는 것은 최근 세계 각국의 외교안보 전략 접근법이 아니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지켜준다고 약속하고선, 나중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철수했다. 미래에 한국에서 미군 철군과 같은 상황이 오는 것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에 모든 걸 의존하는 것은 온당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미국을 온전히 믿지 마라. 심각한 실수가 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문도 열어놓아야 한다. 초강대국이 개별 국가의 안보를 대리해주는 시대는 1950년대가 마지막이었다. 자국의 안보를 다른 나라에 맡길 수는 없다.
미국은 전쟁하는 나라다. 지난 200년간 역사에서 단 16년만 전쟁을 하지 않았다. 최대 무기 생산국이자 최대 무기 수출국이다. 미국의 연간 군사비는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나머지 2-10위 군사비 합한 것보다 훨씬 많다. 미국에게 전쟁은 비즈니스이다. 미국 외교-국방 기조로 볼 때, 앞으로도 절대 ‘평화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래서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도우심뿐이 답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참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십자가 주님의 지혜와 보호 은총이 각별히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답은 기도뿐이요 고맙게도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가을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며 기도할 대상인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한반도의 무거운 십자가를 주님께서 함께 지고 가심이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며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신의 벌로 불뱀들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는 기도했고, 이어 그들은 모세가 만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이 상징하는 바,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한결같이 일편단심 사랑하고 바라봐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은 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좌표가, 삶의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겠는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십자가의 도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이자 도반이 되십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표지가 되고, 희망의 표지가 되고, 영적승리의 표지가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다시 용기백배 힘을 내어 살게 됩니다.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샘솟습니다. 백절불굴의 믿음도 십자가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 하늘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니코데모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천명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평생 사랑해야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 화해와 평화의 상징도 됩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중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중 마지막 대목이 생각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19-20)
이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표현이요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시야를, 이해 지평을 하느님 수준으로 넓혀야 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행복이 선택이듯, 믿음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늘 사랑하고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믿음의 선택으로 누구나 갈 수 있는 구원의 문, 구원의 길,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중의 복음이 더욱 십자가의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새삼 십자가의 예수님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온 세상, 온 인류에 주신 구원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더불어 이 거룩한 “미사” 역시 온 세상,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늘 바쳐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9/15(금)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되새김 구절]
1.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께서 직접 보고 느끼신 아드님의 상처를 우리 제자들 마음속에도 깊이 새겨 주십사 성모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11절).(정천 신부)
2, 성모님의 고통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드렸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여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신앙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조재형 신부)
3.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이영근 신부)
4. “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이수철 신부)
[9/15(금)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제265일 기도]
복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성모님은 그 모든 아픔을 받아드렸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여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나도 또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의지하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신앙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 2023년 9월15일(금) 7시5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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