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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0월 6일 금요일[(녹) 연중 제2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0월 6일 금요일[(녹) 연중 제2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브루노 사제

입당송

다니 3,29.30.31.43.42 참조
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였습니다.>
▥ 바룩서의 말씀입니다.1,15ㄴ-22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
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9(78),1-2.3-5.8.9(◎ 9ㄴㄹ 참조)
◎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 유산의 땅에 쳐들어와,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나이다. 당신 종들의 주검을 하늘의 새들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살을 땅 위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내주었나이다. ◎
○ 그들의 피를 물처럼, 예루살렘 둘레에 쏟아부었건만, 묻어 줄 이 아무도 없나이다. 저희는 이웃에 우셋거리가 되고, 주위에 비웃음과 놀림감이 되었나이다. 주님, 언제까지 마냥 진노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의 격정을 불태우시렵니까? ◎
○ 선조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 어서 빨리 당신 자비를 저희에게 내리소서. 저희는 너무나 불쌍하게 되었나이다. ◎
○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

복음 환호송

시편 95(94),7.8
◎ 알렐루야.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알렐루야.

복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이 제사로 저희에게 온갖 복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19(118),49-50 참조
주님, 당신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저는 그 말씀에 희망을 두었나이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
<또는>
1요한 3,16 참조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시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신비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며 그 수난에 참여하고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 파견 받은 자 안에는 파견한 이의 조각이 들어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복음의 흐름에 따라 이는 당신이 파견하신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바로 위의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고 파견하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인정하는 자를 파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여 파견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그분의 인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곧 그분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암행어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임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파견하신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 열쇠를 주시며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데,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됩니다. 성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그 교회를 파견하신 분을 모독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연인과의 사랑,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그리고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뉩니다. 이 세 사랑이 각기 그 이유가 다릅니다. 연인과의 사랑은 내가 필요한 것을 상대가 주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피가 자녀에게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형제 간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파견 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안에 부모의 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형제는 부모에게 더는 사랑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도 이 현상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만약 부부간의 사랑에서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남편은 돈을 벌지 않고 놀기만 하며 아내는 아기를 낳지 않으려 하고 받은 돈을 낭비하기만 한다면 그 사랑이 오래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관계는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가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때문인 것은 맞습니다. 자녀가 자기를 부모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갓 잉태되었을 때는 낙태를 해도 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자랐을 때 낙태 하면 그 죄책감은 그만큼 커집니다. 자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준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 그만큼 자기 피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그만큼 자신의 조각이 되는 것이고 자녀를 사랑하지 않음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됨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서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피가 그만큼 섞여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자라서 형제가 되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파견 받습니다. 피 안에는 부모가 원하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부모가 주었으니 필요한 것을 받으려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형제 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지팡이의 힘이 자신만이 아닌 형제를 위해 쓰여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만약 형제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이는 자녀가 부모가 자신에게 준 피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의 피를 사랑하지 않는 자녀는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합니다. 결국 부모는 자기 자신은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형제가 자신을 사랑해주는데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부모는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거부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녀는 파견된 자이고 파견된 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녀는 거부 당한 부모에게 거부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조각을 품고 파견된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를 파견한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죄의 용서의 힘을 가지고 파견된 교회를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펜하이머가 과연 미국의 과학자인지, 아니면 소련의 스파이인지에 대한 갈등을 그렸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을 위해 일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가 소련의 스파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합니다. 
내가 누구에게서 파견 받았는지가 너무 중요합니다. 만약 미국 만을 위해 일한 오펜하이머가 소련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려 했다면 그 사람이 반역자가 됩니다.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결론지어집니다. 미국은 자기를 위해 일한 오펜하이머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 사람에게 오히려 책임을 묻습니다. 
    파견된 자는 파견한 자의 조각인 피를 지니고 있고 그에 대한 거부가 그를 파견한 자에 대한 거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결국 교회의 딸이어야만 합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사목정보 10월호에 곽승룡 신부님의 부정한 생각 간파하기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성찰과 식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의식 성찰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양심 성찰, 영의 식별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성찰과 식별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자세히 살피면 성찰은 내가 하는 것이고, 식별은 주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곧 의식 성찰의 감사, 은총을 청함, 성찰 반성, 개선할 결심들은 내가 합니다. 식별에는 기준이 있는데, 주님의 눈인 성경 말씀으로 자신과 사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에 이끌려서 말씀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 식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식별을 통해서 문제의 깊은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 그렇게 하기는 힘들지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는 깊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적 식별에서 문제의 깊은 의미를 간파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악이란 무엇인가? 원수는 누구인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고백성사의 다섯 가지 단계가 생각났습니다. 고백성사는 성찰, 통회, 결심, 고백, 보속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묵시록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에게 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성찰, 통회, 결심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찰, 통회, 결심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을 할 때 고백성사의 은사가 온전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찰, 통회, 결심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유배지에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찰과 통회를 보시고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지에서 돌아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우리가 진심으로 성찰하고, 회개한다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결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성찰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봅니다. 지도에는 한결같이 현 위치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반성과 회개를 하는 신앙인들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성과 회개를 하지 않아서 그릇된 길로 가곤합니다. 사다리를 오를 때도 올바른 방향으로 사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매일 드리는 저녁기도에도 반성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이 한 죄를 사를 뉘우치오니 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행복하여라! 밤낮으로 주님의 가르침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 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탈출 24,1;민수 11,25).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 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 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4. 주님 중심의 말씀의 전례 교회 공동체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친교와 파견-

  

어제 제 영명축일에는 참 많은 분들로부터 카톡을 통해 축하 메시지를 받고 즉시 감사와 축복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또 새벽 멀리 네팔에서 8월초부터 3개월쯤 머물고 있는 자매로부터 반가운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거의 10여년 이상을 매일 제 강론을 수백분에게 발송해주는 복음 선포의 일꾼입니다. 자매님의 시종여일 한결같은 삶에 주님의 축복을 비는 마음입니다.

 

“신부님, 영명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곁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시는 신부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저는 네팔 포카라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내면서 행복해 합니다. 신부님이 이른 새벽에 저희들을 위하여 묵상글을 준비하시는 것을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어제에 이어 답신 내용은 동일했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수님 성심상을 배경으로 서서 찍은 제 사진에다 축복기도 바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정성 가득 담아 보낸 대동소이한 메시지입니다. 위 네팔의 자매에게는 다음과 같은 답글을 보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여전히 언제 어디에서나 말씀의 봉사자로 최선을 다하시네요. 수도원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신부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러고 보니 세상 신자분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는 제 강론글들을 통해 예수님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 공동체가 형성됨을 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생명의 말씀을 섭취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보이지 않는 교회 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이는 가시적 교회 전례 공동체에 참여할 때 비로소 온전한 신앙생활이겠습니다.

 

전례중의 전례가 미사전례와 시편 시간경 전례입니다. 이 두 공동전례가 교회 수도공동체를 이루어줍니다. 수도원 피정온 분들이나 방문한 분들도 전례기도에 함께 참여함으로 주님 중심의 전례 공동체에 속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전례기도의 은총으로 주님 중심의 온전한 일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그 회당전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에 벅차 거행하는 말씀의 전례입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모세의 율법서를 펴자 온 백성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 다음 무릎을 꿇고 주님께 경배합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에 벅차 우는 온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참 아름다운 전례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쳐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미사때 마다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참 은혜롭겠습니다. 이런 공동전례가 아니곤 어디서 공동체 일치의 은혜로운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전례의 은총과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과 힘입니다. 참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한 광야 인생,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은 이런 전례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온 백성은 선포된 말씀을 알아듣고 함께 먹고 마시며 크게 기뻐했다 합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힘이다.”

라는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공동전례를 통해,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기쁨이 바로 우리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쁨의 힘으로 광야인생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자기만족, 자기폐쇠의 전례 공동체가 아닙니다. 곧이어 파견이 뒤따를 때 온전한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친교와 파견은, 복음 선포자로서의 파견은 공동체 생명의 리듬입니다. 파견의 선교가 없는 교회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당신 제자공동체의 친교의 일치를 위해 나름대로 말씀의 전례를 거행했음이 분명합니다. 마치 주님은 일치의 중심이자 공동체의 총사령관처럼 당신에 앞서 일흔 두명을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마치 당신의 일꾼을, 당신 복음의 전사를 파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꾼이자 주님의 전사로 파견되는 이치는 예나 이제나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여전히 오늘날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전사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나눕니다. 

 

첫째, 예나 이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습니다. 그러니 수확할 세상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니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기에 앞서 나부터 주님의 성실한 일꾼이, 주님의 용감한 전사가 되어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이리떼 세상에 무방비의 양들로 파견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말그대로 자기를 비운 비폭력적 삶의 모습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본질적 무욕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힘이 아닌 존재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파견받은 복음 선포자의 신분입니다. 이리떼 가득한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대책은 없습니다. 참으로 온전히 비울 때 주님의 성령이, 주님의 능력이 빈자리를 채울 것이니 바로 텅빈충만의 기쁨과 행복이요, 주님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의 힘임을 체험할 것입니다. 

 

셋째, 주님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속으로든 겉으로든 진심으로 “평화를 빕니다.” 축복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존재 전체 자체가 주님의 평화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참 좋은 기도는 주님의 평화를 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평화의 선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환대에 감사하면서 번잡하거나 가볍게 처신하지 말고 이런저런 좋은 자리를 찾아 다니는 욕심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주어지는 접대에 자족하면서 일정한 자리에 정주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의 선교사들에게도 참고할 내용입니다. 이런 무욕과 겸손, 분별과 절제, 예의의 선교사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다섯째, 언제 어디에 자리하던 병자를 치유해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죄도 병도 아픔도 많습니다. 대부분 영육으로 치유받고 구원받아야 할 병자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기 전 내 존재 자체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되어 살 때 우리를 만나는 이들은 저절로 치유될 것입니다. 얼마전 하늘병원에 진료차 갔을 때 젊은 착한 간호원 둘이 자발적으로 강복을 청해 주었습니다. 강복을 청하는 그 마음이 하늘나라의 실현이요 동시에 영육의 힐링도 일어날 것입니다.

 

여섯째,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냉대와 박대로 아니다 싶을 때는 지체없이 단호히, 결연히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충격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무지의 사람들에게 주는 좀 과장된 충격요법의 경고입니다. 참으로 이런 심판은 주님이 아닌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요 재앙임을 봅니다. 이어지는 복음을 보면 파견받는 일흔 두 제자들은그들이 속한 제자공동체의 주님께 돌아가 그 성과를 보고합니다. 새삼 파견자들과 복음 선포자들이 지쳐 고갈된 자신들의 영육을 충전시켜야 할 중심자리이자 정주처, 안식처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임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친교 공동체 안에서는 “당신의 제자”로, 세상에서는 하늘나라의 전사이자 일꾼인 “평화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10/6(금) [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 되새김 구절

 

1.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전삼용 신부)

 

2.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반성과 회개를 하는 신앙인들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성과 회개를 하지 않아서 그릇된 길로 가곤합니다. (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속으로든 겉으로든 진심으로 “평화를 빕니다.” 축복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존재 전체 자체가 주님의 평화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10/6(금) [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 제286일 기도

 

복음<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주님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로 살게 하소서.

주님의 평화가 되어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0월6일(금) 7시...수산나 -

 

 

 

 

10월 6일  성 브루노 Bruno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는 자에게 가져다주는,
그 유용함과 숭고한 기쁨은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다네.”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브루노는 높은 식견, 거룩한 생활로 많은 이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고위 성직자, 귀족의 결탁으로 모함받았지만, 제자들과 작은 기도소를 세워
은수 생활하면서 카르투시오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수도회원은 하루 한 끼만 먹고 기도, 관상, 노동으로 살아갔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자문 역할을 하면서도 독방에서 엄격한 생활을 하고
어떤 명예, 권력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글씨 :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수원교구)

그림 : 홍승례 아스테리아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