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0월 30일 월요일[(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0월 30일 월요일[(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05(104),3-4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8,12-17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8(67),2와 4.6-7ㄱㄴ.20-21(◎ 21ㄱㄴ)
◎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 하느님이 일어나시니, 그분의 적들은 흩어지고, 원수들은 그 앞에서 도망치네. 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
○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
○ 주님은 날마다 찬미받으소서. 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 구원이시다.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 주 하느님께 있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7,1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께 올리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바치는 제사가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0(19),6 참조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
<또는>
에페 5,2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시어,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 설명: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의 묵상

1. 2023년 10월 30일 월요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오늘의 묵상 (사제 정진만 안젤로)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여정을 이어 가는 예수님과 회당장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로 고생하는 여인을 고쳐 주셨는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였다고 문제 삼고 있습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신명 5,12-15 참조).

회당장의 비판에 대한 예수님의 논거는 매우 명확하고 논리적이며논증의 방법은 점증적입니다.

율법에서 길 잃은 동물을 다시 돌아오게 하며 넘어진 소나 나귀를 다시 일으켜 주는 것이 허용되듯이(신명 22,1-4 참조),

안식일에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러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은 허용됩니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볼 때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을 고쳐 주는 행위가 율법을 위반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 준수와 같은 종교적 의무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시며(루카 6,9 참조안식일의 참다운 의미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해방과 휴식은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회당장은 위선자입니다.

그는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 율법 조문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담긴 정신곧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마르 2,27 참조).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회당장은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회당장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성지순례 중에 감곡 매괴 성모 순례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는 1914년부터 매년 성체현양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이 행사는 매년 10월 첫 목요일, 성대한 사제단의 행렬로 시작하여 미사와 함께 성체강복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전쟁으로 인해 몇 번 중단된 적이 있어서 올해는 105번째 성체현양대회가 지난 10 5일에 있었다고 합니다. 성체성사에 대한 중요한 신심행사는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성체신심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체 공경을 표현하는 신심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성당 중앙의 제대 위에는 성모상이 있는데 그 성모상에는 표징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입니다. 북한군은 언덕 위에 있는 성당을 접수하였고, 성당을 부대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성모상이 기분 나빴던 군인이 성모상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7발의 총알이 성모상을 관통했지만 성모상은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북한군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저는 성모상에 있는 일곱 개의 총알구멍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나는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입니다. 성모님은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남편 요셉과 함께 어린 예수님을 안고 이집트로 피난 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모님은 시메온에게 가슴이 칼로 찔리는 것 같은 아픔을 겪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다녀오던 중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성모님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품에 안았습니다. 성모님은 무덤에 묻히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입니다. 일곱 가지 죄의 뿌리는 교만, 분노, 시기, 음욕, 탐욕, 인색, 나태입니다. 성서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고, 넘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의 교만, 카인의 분노, 사울의 시기, 다윗의 음욕, 아합의 탐욕, 부자의 인색,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을 하느님께 의탁하였고, 죄의 뿌리는 이겨내셨습니다. 저도 고통은 하느님께 의탁하고, 죄의 뿌리는 이겨낼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였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깨닫기 전에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랐다면 깨달은 후에도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라야 합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깨달았으니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달았으니 일상의 삶에서 깨달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초월적인 삶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조건 없는 나눔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겸손으로 뿌리를 내리고, 조건 없이 나누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실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분의 신부님이 생각났습니다. 한분은 멀리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고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그분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의 숭고한 삶과 사랑은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분의 희생과 사랑은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깊은 의미를 생생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다른 한분은 꽃동네를 만드신 오웅진 신부님입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고 이야기하신 오 신부님은 가난한 이, 병든 이, 버려진 이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따뜻한 삶의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꽃동네를 후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작은 정성을 통하여 나눔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는 신랑과 신부가 축의금을 받으면서 그 축의금을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계의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장애인들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병자들이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029. 연중 제30주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가을이 익어가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 삶을 익어가게 하는 ‘사랑' 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우리 인간을 익어가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약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이방인, 과부, 고아 그리고 병든 자, 헐벗은 자 등이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먼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혹 누가 불구된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부모의 가슴이 더 아프고 더 쓰릴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에는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곧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자유와 해방」(1986)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을 신학의 기본입장과 기본정신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딸들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렇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과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자신과 형제를 사랑한다면, 자신과 형제를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귀함에서 오며, 자신에 대한 존귀함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실, 이러한 ‘참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문헌 <새 천년기>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교의 영성을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되고, 한 아버지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형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지니게 되고, 형제의 바람과 요구를 깊이 공유하며 깊고 참된 우정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서로 한 생명이 되고, 하느님은 사랑이 됩니다. 이웃이 곧 하느님이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요,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의 혁명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곧 사랑의 혁명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 강론(2014,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어진 사랑의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혁명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0주일.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오늘 입당송 시편도 은혜롭습니다. 방금 우리는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화답송을 노래했습니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 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수도사제 생활, 만34년 참 많이도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사랑’입니다. 사랑에도 간절해야 합니다. 사랑은 ‘감상하라’ 있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라’, ‘살라’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라고 ‘사람’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의 정의입니다. 언제 들어도 마음 설레게 하는 사랑이란 말마디입니다. 

 

하루하루 사랑하라 하느님께 주어지는 선물의 하루입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 미워하고,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아파하고, 걱정하고 지내기엔 너무 억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인생 허무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며 모두입니다. 마지막 심판도 사랑에 의한 심판입니다. 

 

인생 무지에 대한 답도,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에 답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 하느님 사랑에 배고파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의 선물이 저는 감히 사랑의 성체성사 미사라 말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미사없이, 하느님 없이, 예수님 없이, 이 삭막한 광야인생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무슨 재미로 어떻게 살아갈까 싶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사랑이야기는 끝이없습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1월은 위령성월 말그대로 기도의 계절입니다. 그러다 보면 한해도 훌쩍 떠나버립니다. 기도의 계절에 이어 수확의 계절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더 붙입니다. 산많은 대한민국 어디서나 황홀한 단풍사랑으로 불타오르니 “사랑의 계절”, 얼마나 멋집니까?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의 계절은 저절로 사랑의 계절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에는 시의 계절이라 할만큼 시도 유난히 많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두편의 시를 나눕니다.

 

“가을엔 이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이쁘다

 작은 풀잎, 나뭇잎들,...

 작은 것들 하나하나도 

 사랑으로 타오르는 단풍되니

 모두가 이쁘다”-2000.11.16.

 

 “이 좋은 가을날

  산에 갈 수도 없다

  산을 가져올 수도 없다

  아예 산되어 살기로 했다

  단풍물든 장엄한 가을산으로

  사랑하는 이여

  놀러오지 않으렴?

  넉넉하고 편안한 가을산

  내 사랑의 품으로”-1999.10.26.

 

20년 훨씬 지난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때로 빈손으로 왔다 미안해할 때 가장 많이 드리는 바로 다음 한마디입니다.

 

“형제님 자체가 참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무슨 선물이 필요합니까? 형제님 자체가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언젠가 꽃 한송이를 가져온 분에게는 다음 같이 짧은 시를 써드리며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실 마음 예쁜 사람은 꽃보다 더 예쁘고 빈손으로와도 반갑고 기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것도 사랑의 빛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하나의 사람을 통해 반사하는 하느님 사랑의 빛입니다. 이 미사분위기가 이처럼 밝은 것은 여러분이 주님의 반사체가 되어 주님의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날로 사랑 깊어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이요 우리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사랑의 학인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 보고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할 사랑공부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에 이어 평생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학교에 이어 사랑의 전쟁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 역시 죽어야 끝나는 사랑의 영적전쟁입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온힘을 다해 사랑의 전투를 해야 하는 평생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다음은 평생 형제로, 사랑의 형제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느님 가정내의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사랑의 여정앞에 반드시 놓아야 할 말마디가 “투게더together”, 즉 “더불어”입니다. 그러니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사랑의 여정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에 학우애學友愛가, 평생 사랑의 전사에 전우애戰友愛가, 평생 사랑의 형제에 형제애兄弟愛가 저절로 따라 오기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삼중신원입니다.

 

무슨 사랑입니까?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명쾌하게 밝혀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의무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는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한, 자유로운, 부요한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영혼 건강, 정신 건강, 마음 건강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입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자존감 높은 사람이요 존엄한 품위의 기품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역시 적극적 의지의 선택이요 실행입니다. 온 마음, 온 목숨, 온 정신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결같은, 끊임없는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입니다. 그러니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적도식이 선택-훈련-습관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영성훈련과 습관화를 위해 여기 수도자들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사랑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온 마음, 온 목숨, 온 정신으로 일상의 삶을, 수행들을 사랑합니다. 저도 주님 사랑하는 온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사랑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웃사랑은 물론 자기사랑, 자연사랑으로까지 연장됩니다. 하느님 사람의 진위를 검증하는 잣대가 이웃사랑, 자기사랑, 자연사랑입니다. 저는 이웃사랑에 반드시 자기사랑, 자연사랑을 추가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은 사랑의 사중계명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는 이웃 사랑의 실례를 보여주는 약자 보호법입니다. 

1.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된다.

2.너희는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된다.

3.너희가 내 백성에게,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주님은 못박듯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하다.”

주님은 친히 약자들의 보호자되심을 확언하십니다. 참으로 약하고 병든이들의 배경이 되어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대하듯 이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루가복음중 주님의 평지설교의 결론같은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평생 주님을 닮아갈수록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이 됩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자비의 얼굴인지 주님 거울에, 미사에 거울에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회개와 사랑입니다. 하느님 앞에 회개 없이는 겸손도, 사랑도 없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도, 늘 새로운 사랑도 회개를 통해 가능합니다. 사랑의 여정과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신도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신뢰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은 환란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여러분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또 여러분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상들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바로 참 좋은 회개입니다. 날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를 통해 오롯한 마음, 오롯한 눈길로 오시는 주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들이요, 이런 회개의 은총으로 날로 순화純化되고 성화聖化되고 심화深化되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평생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학인이, 주님의 형제가 되어 “더불어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 드높이시다.”(시편18,47). 아멘.


10/30(월)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돠새김 구절

 

1. 해방과 휴식은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회당장은 위선자입니다.

그는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 율법 조문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담긴 정신곧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마르 2,27 참조).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회당장은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회당장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정진만 신부)

 

2.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랑’의 ‘삶’을 살라고 ‘사람’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의 정의입니다. 언제 들어도 마음 설레게 하는 사랑이란 말마디입니다. 

 

하루하루 사랑하라 하느님께 주어지는 선물의 하루입니다. (이수철 신부)

 

10/30(월)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310일 기도

 

복음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안식일 규정에 담긴 정신

곧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법과 규정으로 사람을 옭아매지 않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 2023년 10월30일(월)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