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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1월 9일 목요일[(백)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1월 9일 목요일[(백)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 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12세기부터 11월 9일에 지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로마에서만 지내다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이 기록한 대로 “사랑의 모든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 교좌에 대한 사랑과 일치의 표지로서 로마 예법의 모든 교회로 확대되었다.

입당송

묵시 21,2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나는 보았네.<대영광송>
<또는>
묵시 21,3 참조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리라.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몸소 뽑으신 살아 있는 돌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하느님의 교회에 은총의 영을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또는>
하느님,하느님의 교회를 배필이라 이르시니하느님의 이름을 섬기는 백성이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따르도록 이끌어 주시어약속하신 천상 행복에 이르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따름 노래 “성전 오른쪽에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3,9ㄴ-11.16-17
형제 여러분, 9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6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7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6(45),2-3.5-6.8-9(◎ 5)
◎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이 빠진다 해도. ◎
○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이 세상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

복음 환호송

2역대 7,1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 집을 선택하여 성별하고 이곳에 내 이름을 영원히 있게 하리라.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예물을 받으시고
이 성사의 힘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의 축일과 신비 감사송 10-2 : 그리스도의 배필이며 성령의 성전인 교회의 신비(성당 봉헌)>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1베드 2,5 참조
너희는 영적인 집을 짓는 살아 있는 돌이니,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라테라노 대성전 내부.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오늘은 베드로 대성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성전에 들어가면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되었던 식탁이 대표적인 유물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한 식탁은 그 위에서 성찬례가 제정된 숭고한 유물입니다.

 

저는 그 유물을 보며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성찬례가 교회의 중심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곤 합니다.

 

교회의 성찬례는 바로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 잔치를 상징합니다.

한 아버지를 둔 교회 가족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식탁 주위에 진정 ‘가족’으로 모여야 합니다.

분명 성당도 그런 분위기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가족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꼭 성공해야만,

혹은 성공을 위해서만 가야 하는 곳이라면 참 가족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업자금을 챙기기 위해, 혹은 다른 형제들보다 성공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면 그런 가족은 가족의 참 의미를 잃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거대한 라테라노 대성전을 보면 그 거대함 속에 약간은

성만찬 식탁의 의미가 묻혀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성당이 너무 크고 화려해서 전통시장처럼 편안한 것이 아니라

백화점처럼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백화점이 크고 화려한 이유는 그 크고 화려함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

느끼게 만들어서 새 옷을 사게 만들고 새 구두를 신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성당이 백화점과 같아서 그곳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주눅 들게 된다면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채찍을 들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저도 본당신부를 할 때, 어떤 분의 “신부님은 돈 있는 사람들과만 어울리세요!”

라는 충고의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따로 돈 있는 사람들을 만나려 한 적은 없었지만 사실 사목회나 본당에서

굵직한 여러 봉사를 하시는 분들은 비교적 넉넉한 분들이었기에

가난한 분에겐 그렇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교회 시스템 자체가 가난한 이들은 바빠서 봉사할 수 없는 처지이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봉사하며 사제와 어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성전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연극 ‘금관의 예수’에서 거지는 신자들이 성탄 미사를 마치고 갈 때까지

밖에서 떨고 있어야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이들은 자녀들 대학 걱정, 새로운 사업에 대한 걱정들을

아기 예수님께 쏟아붓고 갔습니다.

내년에 잘 되게 해 주면 비단 이불과 금관을 씌워주겠다고 아기 예수님께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거지는 그들 틈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부자들이 자녀들에게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손가락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돌아가고 아기 예수님께 자기 누더기를 벗어 덮어준 사람은

바로 그 거지였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 사람은 거지 한 명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하는 교회를 말한다면 부자들로서는 역차별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교회에 부자들도 부담 없이 올 수는 있지만,

부자인 교회에 가난한 이들이 편안하게 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난한 지역보다도 부자 동네에 가톨릭 신자 비율이 높다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들도 부담 없이 성당에 나와 주님을 찬미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백화점의 모습이 아니라 전통시장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로마로 들어오는 돈 수레들을 보며

“‘이제 나는 은도 금도 없소!’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도 “맞습니다. ‘자 일어나 가시오!’라고 말하던 시대도 지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라테라노 성전의 최후의 만찬 식탁은 황금 장식품으로 거의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으로 화려하다!”라는 감탄이 나오는 성전이 아니라

‘내가 꾸미고 싶다!’라는 마음이 드는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지라도 자기 누더기를 덮어드리고 싶은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아기 예수님과 같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지도 부담 없이 성전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 유튜브에 「자신을 끔찍이 학대한 주인을 법정에서 다시 만난 반려견」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행인이 쓰레기통 안에서 개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여행 가방 안에 넣어져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주인은 동물 학대죄로 7년이나 이어지는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개가 죽었는지 알고 가방에 넣어 버렸다고 말했지만

실상 학대를 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재판관은 그럼 마지막으로 개를 만나보게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7년 만에 주인을 만난 개는 멋쩍어하는 주인과는 다르게 바로 달려가 꼬리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자신을 가방에 넣어 버릴 때부터 개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그전에는 개의 그런 반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반응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난한 이가 필요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한겨울 마구간에서 벌거벗고 추위에 떨고 계셨습니다.

어른이 된 예수님은 세상에서 박해받고 옷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헛간이라도 있다면 좀 쉬고 가시라고 내어드리고 싶고,

수건 한 장이라도 있으면 그분의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게 만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되찾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참 성전의 모범이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 모습이어야 함을 깨우쳐주려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성당이 온전한 성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십자가의 예수님 모습을 닮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대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짓는 성당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가난함으로 지어진 성전이라면 가난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성당이 되려면

가난한 이들보다 더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가난한 이들이 필요한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제가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은 성당은 전주에 있는 전동성당입니다. 전주의 한옥마을 가까이에 위치한 전동성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가 순교한 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은 중앙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뀐 봉천동성당에 다녔습니다. 그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첫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교우들은 성당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건물로 이해할 것입니다. 성당의 기능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고,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예배의 가장 큰 형태는 성체성사로 미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밖에 다양한 전례를 통해서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혼배, 장례미사가 있고, 성모의 밤과 같은 전례가 있습니다. 학생 때 성당은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성당에서 예술제가 있었고, 성당에서 교리가 있었습니다. 유럽의 도시는 먼저 성당이 세워지고 성당을 중심으로 다른 건물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성당은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회론을 배우면서 성당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건물로서의 성당은 제도로서의 교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매일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을 위로하는 미사가 광화문에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영혼을 기억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전방에서 군인들을 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책으로 둘러싸인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사람들은 삭막한 광야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묵상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위령의 날에 교구는 용산 성직자 묘지와 용인 성직자 묘지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주일미사 참례자들이 많이 줄었다고 걱정합니다. 교우들이 다시금 주일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배와 친교의 장소인 성당도 필요합니다. 경건함과 엄숙함이 드러나는 성당도 필요합니다. 많은 예술 작품이 영적인 충만함을 드러내는 성당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우려고 했던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는 성당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우려고 했던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로 드러나는 성당입니다. 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제도로서의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로서의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가 활력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의 독선과 교만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십자가와 나눔을 외면하는 신앙생활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성직자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 데 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가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버림, 따름,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로 전하리라."(시편89,2)

 

“삶은 선물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Life is a gift! God loves us! We are all brothers and sisters!“

 

지난 12월6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세계 84개국에서 7500명 어린이들이 모인 가운데 청소년들을 향해 외친 오늘날 주님의 참 제자, 88세 노령의 영원한 젊음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간명하면서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본질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사랑의 메시지인지요!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는 말씀도 멋집니다.

 

“젊은이들이여! 언제나 기억하라! 삶은 아름다운 선물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함께하고, 소통하고, 나누고, 주는 놀라운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기도하자. 우리 성모님은 여러분을 도우실 것이다. 언제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하자!”

 

참으로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교황님인지 깨닫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 만나고 일하는 분이 세계의 영적 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님일 것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교황님 모습이 늘 감동입니다. 

 

요즘 강풍이 불고 간간히 비가 오고 나니 단풍잎들은 다 떨어지고 나뭇가지들 본질로 남아 있는 겨울나무들을 통해 푸른 하늘이, 불암산이 훤히 드러나니 참 좋습니다. 문득 예전 써놨던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1.21.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겨울나무들입니다. 가난한 듯 하나 참으로 주님을 배경한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주님만을 따르는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과 독서가 답을 줍니다. 버리고 따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 내용을 나눕니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말그대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보다 누구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용법상 이렇게 번역하지만 제대로의 뜻은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 자신까지도 주님보다 선호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심지어 자신에게 까지 집착에서의 이탈을 강조합니다. 

 

참으로 이처럼 삶의 중심인 주님을 사랑할 때 사람들에 대한 아가페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초연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눈밝은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우선적인 주님 사랑없이 눈먼 맹목적 집착의 사랑이라면 모두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을 늘 기억하는 위령성월 11월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참으로 죽음을 늘 기억한다면,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산다면, 비로소 겨울나무처럼 모든 인간 집착을 떨쳐버리고 주님만 따르는 본질적 깊이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어지는 망대의 비유와 전쟁의 비유입니다. 무모하게 주님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잘 점검하며 자기 정도에 맞게 순리대로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람 숫자만큼 십자가 양상도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호오好惡나 우열愚劣을 이야기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무지의 소치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끝까지 골인 지점까지 한결같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보다는 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자기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 묵묵히, 한결같이, 죽을 때까지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運命愛의 정신으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참으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참사람이요 구원입니다. 다 버려도 제 십자가만은 끝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셋째,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루하루 날마다 안팎으로 버리고 비우면서 참으로 소유하되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 바로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투명한 삶입니다. 

 

세명령 앞에는 “누구든지” 말마디가 붙습니다. 예외없이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 본질적 세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명령은 단번이 아니 평생현재진행형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늘 주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자발적 사랑으로 노력해야 할 기본적 수행입니다.

 

참으로 온전히 자유로운 삶이 주님의 제자의 삶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 있으면 불완전합니다.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까?”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한 자유입니다. 순수한 이웃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참된 이웃사랑을 통해 주님의 참 제자임이 입증됩니다. 참제자의 검증 잣대가 이웃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아무에게도 빚을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을 빚지고 있는 사랑의 빚쟁이들입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 해도 이 사랑의 빚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의 자유는 이런 사랑을 위한 자유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예닮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이자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로울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자유로워집니다. 참사랑과 참자유는 함께 갑니다. 물론 무집착과 무욕의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1.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2.아몰 파티(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

3,카르페 디엠(Carpe Diem);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다시 한 번 라틴어 세 격언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로서, 버림-따름-사랑의 삶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복되어라, 거룩히 기뻐할 줄 아는 백성은,

 주여, 당신 얼굴의 빛속에 걸으리이다."(시편89,16). 아멘.


11/9(목)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 되새김 구절

 

1. 백화점이 크고 화려한 이유는 그 크고 화려함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

느끼게 만들어서 새 옷을 사게 만들고 새 구두를 신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성당이 백화점과 같아서 그곳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주눅 들게 된다면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채찍을 들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한겨울 마구간에서 벌거벗고 추위에 떨고 계셨습니다.

어른이 된 예수님은 세상에서 박해받고 옷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헛간이라도 있다면 좀 쉬고 가시라고 내어드리고 싶고,

수건 한 장이라도 있으면 그분의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게 만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되찾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참 성전의 모범이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 모습이어야 함을 깨우쳐주려 하실 것입니다.(전삼용 신부)

 

2.  성직자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가 되어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삶은 선물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Life is a gift! God loves us! We are all brothers and sisters!“

 

지난 12월6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세계 84개국에서 7500명 어린이들이 모인 가운데 청소년들을 향해 외친 오늘날 주님의 참 제자, 88세 노령의 영원한 젊음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간명하면서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본질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사랑의 메시지인지요!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는 말씀도 멋집니다.

 

“젊은이들이여! 언제나 기억하라! 삶은 아름다운 선물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함께하고, 소통하고, 나누고, 주는 놀라운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기도하자. 우리 성모님은 여러분을 도우실 것이다. 언제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하자!”(이수철 신부)

 

11/9(목)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제320일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삶은 선물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Life is a gift! God loves us! We are all brothers and sisters!“

 

 함께하고, 소통하고, 나누고, 주는 놀라운 체험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 2023년 11월9일(목) 7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