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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2월 14일 목요일[(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5개

[매묵]2023년 12월 14일 목요일[(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무렵 에스파냐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였던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후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입당송

갈라 6,14 참조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본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에게
온전히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본받아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을 뵈옵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1,13-20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1과 9.10-11.12-13ㄱㄴ(◎ 8)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복음 환호송

이사 45,8
◎ 알렐루야.
○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2,1-10ㄱ)와 복음(루카 14,25-33)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요한을 기억하며 바치는 이 제물을 받아들이시고
저희가 거행하는 주님 수난의 신비를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성인 감사송 1 : 성인들의 영광>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
또 성인들의 삶을 저희에게 모범으로 주시고
저희가 성인들과 하나 되게 하시며 그 기도의 도움을 받게 하시나이다.
저희는 이 위대한 증인에게서 힘을 얻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나아갈 길을 끝까지 달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16,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에게 십자가의 신비를 오묘하게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이 제사로 힘을 얻고
언제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교회 안에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폭행하는 것을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죄라고 해서 독성죄라고 합니다. 독성죄는 세례자 요한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취하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것이 피조물인 인간에게까지 폭력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있을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있을법한 한 부부의 이이기입니다. 어떤 남자는 직장 일을 열심히 하며 아내를 굳게 믿는 순정파 남편입니다. 둘에게는 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능력이 없는 남편을 무시하며 남편을 만나기 전 남자와 다시 만나는 아내가 있습니다. 길면 꼬리가 밟히는 법. 남자는 조금씩 아내의 불륜 사실을 눈치챕니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 아내가 뉘우치고 돌아왔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점점 더 대범해져서 남편이 잠깐 집을 비워도 남자를 들입니다. 급기야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기의 분유에 수면제까지 탑니다. 이런 아내와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남자를 보며 남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더는 아내가 아기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들면 아내를 떠나고 어쩌면 둘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를 떠나야 하는 남편도 슬프겠지만, 더 고통스러운 복수는 불륜을 저지른 둘의 몫이 될 것입니다. 
    부부는 일단 혼인했다면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혼인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결하지 못한 배우자와 혼인했다면 아무리 그녀와 헤어져 살 능력이 되더라도 한 번은 물려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한순간에 모든 인간을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셔도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한 번은 폭행 당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독성죄까지 일어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설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면 결국 어떻게 할까요? 관계를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5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이 아들 벨사차르 왕은 큰 잔치를 벌이고 그와 그의 손님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신성한 그릇으로 포도주를 마십니다. 잔치 도중 신비한 손이 나타나 벽에 메시지를 씁니다. 벨사차르는 매우 놀라 그 글을 해석해 달라고 박사들과 마술사들을 불러왔지만, 그들은 글을 해석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왕비의 제안으로 다니엘을 데려옵니다. 
    지혜와 꿈과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유명한 다니엘은 글을 읽고 해석합니다. 다니엘은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이라는 메시지를 해석하여 하느님께서 벨사차르의 통치를 심판하시어 그의 나라를 메디아 인들과 페르시아 인들에게 주시겠다는 뜻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날 밤 벨사차르는 살해됩니다. 
    이 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다니 5,25-28)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분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지. 여기서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내가 죽고 내가 그분의 것이 되어 그분께 이용 당하는 것이 내가 살아서 그분을 나의 금송아지로 이용하는 것보다 더 행복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처음에 그들에게 폭행 당하십니다. 그러니 먼저 회개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파라오가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이때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홍해를 건넌 뒤로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목자, 곧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파라오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파라오는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 그와 대치되는 ‘나’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뱀과 같습니다. 뱀을 긍정하면서 하느님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독성죄가 벌어집니다. 하느님을 폭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아가 강하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독성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감사의 봉헌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감사하게 봉헌하는 이들은 결코 성체를 영하며 독성죄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충만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오늘 우리 교회는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성인, 십자가의 성 요한 학자(1542~1591) 기념일을 경축합니다. 그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한 가지 삶의 노선이 있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요한의 생애 전체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는 생애 내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평생토록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꼭 끌어안고,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은 십자가의 연속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그의 가문은 아버지 때에 이르러 몰락하여, 어린 시절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요한이 아직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활고에 쪼들린 어머니와 요한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어린 요한 역시 목수 보조, 양복점 점원, 조각가 조수,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다가오는 큰 십자가 앞에서 요한은 우리처럼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런 와중에도 하느님의 일꾼이 되기를 꿈꿨습니다. 일하면서 기도했고, 시간을 쪼개어 신학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요한의 착복식 때, 수도명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십자가의 요한!을 선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자신에게도 지워지기를, 그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짐을 통해 한없이 기울어져 가는 수도회와 교회와 세상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거룩한 결심을 합니다.

 

당시 가르멜 수도회는 퇴폐한 시대사조의 영향을 받아 많이 기강이 많이 느슨해져 있었습니다. 완덕에 대한 열정도 찾아볼 수 없었고, 수도원을 복잡하고 골치 아픈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도피처로 여겼습니다. 수도자들은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호의호식하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요한은 또 다른 개혁 동지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의기투합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수도자들과 결별하고 극단적 청빈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다리도 쭉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천장이 낮은 공동 침실에서 단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열악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요한과 동료들의 얼굴을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극단적 청빈과 고행을 즐겼습니다.

 

시기 질투심으로 가득한 동료 수도자들은 요한의 극단적 청빈생활과 원리 원칙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그를 독살시키려는 계획까지 세워 실행했지만, 마지막 순간 하느님의 은총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때로 동료 수도자들은 그를 독방에 감금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혹독한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요한은 항상 초긍정 마인드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으며, 십자가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은혜롭고 신비스러운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진설명: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139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목하는 사제는 151명입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는 111명이고, 미주지역 소속 사제는 40명입니다. 제가 신문홍보로 한인성당을 다녀보면 성당의 규모와 공동체의 모습이 다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숫자가 100명 이내인 본당도 많습니다. 보좌신부가 있는 본당도 있습니다. 미주 지역에서 한인 성당으로 인정받고, 독자적인 성당을 소유한 곳도 있지만 미주 지역에 있는 성당에 더부살이 하는 공동체도 많습니다. 제가 미사를 다니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도 부르클린 교구에 있는 성당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미사는 3개 공동체가 하고 있습니다.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미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당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령화입니다. 고령화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에서 오는 이민자의 수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민 2세들이 한인 공동체에 잘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함께 성당에 오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미국 성당으로 가거나, 아예 성당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교구에 본당이 200개가 넘습니다. 본당을 생각하는 기준을 보면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를 사용하곤 합니다. 땅은 얼마나 큰가, 성당은 또 얼마나 큰가, 신자 수는 몇 명인가, 보좌 신부님은 있는가, 수녀님은 있는가! 또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단체들은 다 있는가,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가! 사실 이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기준의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식당에서 보았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생의 날 수는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깊이와 넓이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습을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결정할 수 없지만

마음의 날씨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하기도 바쁜데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걱정하고 있습니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오늘 <말씀 전례>에서 도드라진 표현은 “주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9)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고 선언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이 벅찬 초대는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참된 안식’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시는 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분이 선사하는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안식”에로 초대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를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저희와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줍니다. 오히려 우리를 북돋아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모범을 보여주는 스승만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단지 “길”을 제시하는 인도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걸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양순하고 겸손하신 마음”(마태 11,29)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필립 2,5).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우리는 그 ‘참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입니다.
 
주님! 오늘도 짐으로 하여 길을 가오니, 제게는 짐이 은총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가야할 길을 짊어지고 가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주님!
나그네가 배낭을 짊어지듯, 당신은 저를 지고 나르고
저는 당신의 사랑을 지고 나릅니다.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제 자신일 뿐,
짐을 지고 가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일 뿐,
당신이 함께 걸으며 저를 짊어지고 갈 뿐,
사랑의 짐을 지고서야, 짐이 되어 업히고서야,
비로소 당신에게로 건너갑니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그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

                                                                                 이사35,1-4ㄷ.5-6.10 1코린1,26-31 루카11,33-36

 

                                   루멘 체치스!(Lumen Caecis;눈 먼이에게 빛을!)

                                           -개안開眼의 여정, 사랑의 여정-

 

 

“루멘 체치스!(Lumen Caecis;눈 먼이에게 빛을!)”

 

오늘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간 떠오른 우리 연합회의 모토입니다.

“루멘체치스” 라틴어 발음도 명쾌하고 “눈먼이에게 빛을!”이란 뜻도 기막히게 좋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무지에 눈 먼 맹인들입니다.

“눈먼이에게 빛을!” 말마디에 연이어 떠오른 말마디들입니다.

“길을 잃은 이에게 길을!”, “희망을 잃은 이에게 희망을!”, “꿈을 잃은 이에게 꿈을!”

바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절박한 소망이자 우리의 선교소명이기도 합니다. 

 

무지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빛을 잃고,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꿈을 잃고 병들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잃고 병들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두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주님과 만남의 은총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근원적 처방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 하나뿐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의 신바람 나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대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언젠가의 “그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이때”

일어나는 치유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루멘체치스, 눈먼이에게 빛을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런 은총의 빛과 더불어 날로 맑고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요 그대로 우리 삶의 여정은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오늘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에서는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을 지냅니다.

루멘체치스; 눈먼이에게 빛을! 이라는 선교소명을 뜻하는 연합회의 모토도 오딜리아 성녀로부터 유래합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성녀는 673년 레겐스부르크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기적적으로 눈이 열려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수녀원의 원장으로 소임을 다하다가 720년경 선종합니다.

이미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알자스 지방과 맹인들, 그리고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침내 교황 비오 7세는 공식적으로 오딜리아 성녀를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 및 눈병으로

고통받은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오늘은 성녀 오딜리아와 더불어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빛을 뜻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지닌 성녀 루치아는 313년경 순교합니다.

모진 고문으로 눈알이 뽑히는 형벌까지 받았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루시아 동정순교자는 어둠을 밝히는 성녀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으니 성녀 오딜리아와 너무 흡사합니다.

 

말그대로 두분 성녀 다 주님의 빛을 발하는 빛의 성녀들입니다. 

빛의 성녀인 오딜리아와 루치아 두분의 전구로 우리 역시 희망과 기쁨의 빛이 넘치는,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가는 개안의 여정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개안의 여정에 주님의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전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

 

주님의 등불이, 주님 은총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출 때 마음과 더불어 온몸도 환해질 것이고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참으로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 세상의 빛으로서 살 수 있게 되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눈먼 무지의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빛을 선사하시는 주님이요 우리는 날로 맑고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게 됩니다.

우리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동정 성녀들이 주님께 바쳤던 그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순수, 사랑의 초연함, 사랑의 정주 끝이 없습니다.

 

첫째, 사랑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에, 사랑의 빛에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살아야 할 이런 사랑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을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끝없는 즐거움이 너희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너희와 함께 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둘째, 사랑의 순수입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빛나는 동정 성녀들이 그 모범입니다.

사랑할수록 순수해지는 마음에, 날로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요 지혜의 눈 혜안입니다.

동정녀 축일 때 마다 부르는 저녁기도 후렴의 아름다움에, 은혜로움에 늘 감동합니다.

노래로 부르면 더욱 감동적인 첫째, 둘째 후렴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순결을 보존하여 찬란히 빛나는 등불을 들고 신랑인 당신을 마중나가나이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리다.”

 

주님을 기다리는, 개안의 여정중인 대림시기에 잘 어울리는 기쁨 가득 선사하는 사랑의 고백같은 가사입니다.

그대로 성녀 오딜리아, 성녀 루치아의 주님 향한 순수한 사랑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바로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사랑의 초연함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집착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이런 초연한 사랑, 깨끗한 사랑, 품위있는 사랑입니다.

덧없이 흐르는 세상이 아닌 영원하신 하느님께 사랑의 닻을 내린 동정 성녀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 공감합니다.

 

“형제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러해도 안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위선이 아니라 사랑의 지혜, 삶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수록 이런 초연한 사랑입니다.

 

넷째, 사랑의 정주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정주는 내적여정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역동적인 정주는 산속의 강같은 삶입니다.

제 좋아하는 산과 강이라는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산속의 강”

 

동정녀 축일 저녁기도 세 번째 후렴이 바로 사랑의 정주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예전 수도원을 자주 찾았던 떼제 마르코 수사님이 참으로 좋아하며 극찬했던 곡입니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았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정주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 날로 초연한 사랑의 여정이,

날로 마음의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먼이에게 빛을, 길잃은 이에게 길을, 희망과 꿈을 잃은 이에게 희망과 꿈을 끊임없이,

한결같이 선물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대림초, 대림 제3주간


12/14(목)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전삼용 신부) 

 

2. 혹독한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요한은 항상 초긍정 마인드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으며, 십자가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은혜롭고 신비스러운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식당에서 보았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생의 날 수는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깊이와 넓이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습을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결정할 수 없지만

마음의 날씨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하기도 바쁜데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걱정하고 있습니까?”(조재형 신부)

 

4.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모범을 보여주는 스승만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단지 “길”을 제시하는 인도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주님!
나그네가 배낭을 짊어지듯, 당신은 저를 지고 나르고
저는 당신의 사랑을 지고 나릅니다.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제 자신일 뿐,
짐을 지고 가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일 뿐,
당신이 함께 걸으며 저를 짊어지고 갈 뿐,
사랑의 짐을 지고서야, 짐이 되어 업히고서야,
비로소 당신에게로 건너갑니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그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5. 빛의 성녀인 오딜리아와 루치아 두분의 전구로 우리 역시 희망과 기쁨의 빛이 넘치는,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가는 개안의 여정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개안의 여정에 주님의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전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이수철 신부)

 

12/14(목)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 제355기도일

 

복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나를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하소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로 판단하게 하소서.

 

- 2023년 12월14일(목) 8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