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2월 13일 수요일[(홍)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메묵]2023년 12월 13일 수요일[(홍)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루치아 성녀는 로마 박해 시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데, 5세기의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순교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은 성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의 신변을 염려한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 청년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동정을 결심하고 있었기에 한사코 혼인하기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약혼자의 고발로 갇히게 되고 결국 300년 무렵에 순교하였다. 루치아(Lucia)라는 이름은 ‘빛’ 또는 ‘광명’을 뜻하는 라틴 말에서 유래되었다.

입당송

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
<또는>
복된 동정녀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져, 동정녀들의 신랑이며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주님을 본받았네.

본기도

주님, 거룩한 동정 순교자 루치아의 전구로
저희 안에 믿음의 불이 타오르게 하시어
오늘 그의 천상 탄일을 지내는 저희가 영원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0,25-31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3(102),1-2.3-4.8과 10(◎ 1ㄱ)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
◎ 알렐루야.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2코린 10,17―11,2)와 복음(마태 25,1-13)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일찍이 박해와 싸워 이긴 복된 루치아의 생명을
제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듯이
그를 기리며 드리는 이 예물도 어여삐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성인 감사송 1 : 성인들의 영광>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
또 성인들의 삶을 저희에게 모범으로 주시고
저희가 성인들과 하나 되게 하시며 그 기도의 도움을 받게 하시나이다.
저희는 이 위대한 증인에게서 힘을 얻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나아갈 길을 끝까지 달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묵시 7,17 참조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을 생명의 샘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성인들 가운데 복된 루치아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으니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모든 악을 용감히 이겨 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 나를 무겁게 하는 짐의 정체를 먼저 알아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안식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성당에 다니기 위해 오는 사람 대부분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당 다니면서도 마음의 평화인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내가 내려놓아야 하는 ‘무거운 짐’의 정체를 잘 모르는 게 아닐까요? 

 

    영화 ‘디스 파이널 아워스’(2013)의 줄거리입니다. 이야기는 호주 퍼스를 배경으로 하며, 지구를 멸망 시킬 재앙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12시간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는 생명을 잃은 운석이 북대서양을 강타하여 지구 전체를 천천히 휩쓸고 있는 세계적인 불 폭풍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제임스입니다. 제임스는 임신한 애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는 것도, 자신의 애인이 죽는 것도, 그 태중의 아기가 죽는 것도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술을 마시며 광란의 파티를 하다 죽고 싶어 그녀를 떠납니다. 종말의 혼란 속에서 제임스는 아버지와 헤어진 채 어른들에게 끌려가는 어린 로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도와줍니다. 그녀는 아버지 옆에서 종말을 맞고 싶다고 제임스에게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임스는 생의 마지막을 아이를 도와주다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광란의 파티에 갑니다. 거기에는 참다운 우정도 없고 거기에서도 어른들이 로즈를 마지막 노리갯감으로 쓰려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제임스는 로즈를 데리고 나와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합니다. 로즈가 말한 아버지 집으로 갔더니 온 가족이 두려움에 자살한 상태였습니다. 제임스가 로즈와 함께 떠나려 하자 로즈는 그것을 거부하고 아빠 곁에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제임스는 아이를 보며 마지막 시간에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와 머문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 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누구와 함께 죽음을 맞고 싶은가 생각하다 자신의 짐처럼 여겨 떠났던 임신한 애인을 찾아 나섭니다. 도중에 차도 고장이 나지만 뛰어서 그녀가 있는 해변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용서를 빌고 그녀와 꼭 껴안은 채 바다에서 밀려오는 불 폭풍을 맞습니다. 이때 여자가 말합니다. “아름다워!” 사랑하는 사람과 맞는 죽음은 더는 공포가 아니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안식입니다. 제임스는 자신의 무거운 짐이 임신한 애인, 자기가 책임져야만 하는 가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짐을 벗어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안식은 없었습니다. 자기가 짐이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 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제임스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랑의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이 즐기다 죽어도 된다고 말하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짐은 외적인 책임이 아닙니다. 바로 원죄에 물들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아니라 외적인 무언가를 내려놓으려 하기에 영원히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마음을 약속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새로운 마음을 넣어주러 오셨습니다. 그것도 짐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마음보다는 가볍습니다. 이전의 마음은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해 화가 나 있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 분노로 차 있습니다. 겸손하지 못해 감사하지 못하고 하느님과 나에게 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원망합니다. 제임스는 로즈라는 아이를 통해 이 새로운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 짐처럼 보였던 가족이 이젠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는 안식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가끔 자신 안에 마귀가 산다고 말하는 이들이 찾아옵니다. 안수로 그것들을 내쫓아 달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자신 안의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것 때문에 몸도 아프고 삶도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그 마귀들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짐은 ‘외로움’입니다. 하느님도 없고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믿는 척은 하지만, 실제로 자기를 믿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게 마귀 탓이라고 하며 진짜 무거운 짐을 부인입니다. 그 무거운 짐이란 자신을 외롭게 만든 하느님과 가족에게 화가 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부터 내려놓아야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장착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원한다면 사제가 시키는 것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성당에 매일 나와서 ‘하.사.시.’를 30분 읽고 성체조배 하며 그 내용을 묵상하라고 합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마귀가 나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귀와 자기를 그렇게 만든 환경이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만 없애 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식을 위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불만스럽고 화가 나 있는 마음을 먼저 내려놓읍시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세도나에 갔을 때입니다. 형제님 한분이 친절하게 안내 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600번 넘게 세도나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세도나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벨락(Bell Rock)’이라는 산에 갔을 때입니다. 형제님은 가파른 바위를 편안하게 올라갔습니다. 제게는 발을 놓을 자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안내 해 주는 대로 발을 놓으니 가파른 바위를 가뿐하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열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숲길을 갈 때였습니다. 형제님은 제게 나무 지팡이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나무 지팡이로 균형을 잡으니 물가에서도 균형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멋진 그림이 나오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자리를 잡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모두가 하나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2 3일의 짧은 일정이었는데도 형제님의 도움으로 꼭 봐야하는 곳을 보면서 알찬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친절한 형제님은 세도나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모두 보내 주었고, 사진을 보면서 세도나에서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70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열혈청년처럼 세도나의 이곳저곳을 다니시는 형제님이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저는 8년간 보좌신부를 하면서 4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은 제게 사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은 무척 자유로웠습니다. 제게 스키도 가르쳐 주었고, 매일 동네 산보를 같이 다녔습니다. 엄격함과 질서보다는 자유와 넉넉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자유와 넉넉함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부님은 사제 생활의 중심은 사제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매일 기도에 충실하였던 신부님은 자유를 즐길 줄 아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합리적이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수도자와 사목회장과 충분히 협의를 하였습니다. 제게도 자율권을 주었고, 충분히 저의 의견을 들어 주었습니다. 합리적인 신부님의 결정은 겸손함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부님은 겸손함으로 사제생활의 길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본당 신부님은 조직적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적재적소에 신자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습니다. 성전신축을 위해서 사목회와 성전신축위원회를 분리하였습니다. 본당사목과 성전신축이라는 두 업무를 빈틈없이 추진하였습니다. 전 신자가 함께하는 가족캠프를 기획하였습니다. 기획분과, 총무, 청소년분과에게 적절한 임무를 주었고, 제게는 가족캠프의 총괄책임을 맡겨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본당과 캠프장을 다니면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를 보면 하나를 알기도 벅찬데 신부님은 하나를 보면 열은 아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조직력은 다양한 독서에서 나왔습니다. 네 번째 본당 신부님은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처럼 영성은 깊고, 지식은 넓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셨던 신부님은 성서는 물론 문학, 예술, 건축, 경제에도 전문가 못지않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감히 제가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는 정중동(正中動)’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쉽게 변하는 시대에 큰 바위 얼굴과 같았던 신부님의 영성이 새삼 그립습니다.

 

본당신부로 8년을 지내면서 보좌신부님들과 지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과연 나는 제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본당 신부님들처럼 보좌신부님들을 대했는지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저는 기도에서 나오는 자유를 보여주지 못했고, 겸손에서 나오는 합리적 결정을 보여주지 못했고, 다양한 독서에서 나오는 조직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정중동에서 나오는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 모두 사목의 현장에서 잘 지내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제 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이사 40,11)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오늘의 말·샘 기도>

 

“아버지의 뜻”

(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잃은 사람을 찾는 하느님”

-늘 깨어 실천적 회개로 하느님께 화답(和答)하는 삶-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복음 환호송)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는 잘못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면 주님의 용서요 치유요 구원입니다. 정말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대죄입니다. 정말 자기를 포기하여 스스로 “잃은 양”이 되면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도 속수무책 어쩌지 못합니다.

 

아마 거의 20년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매월 두 딸 가정과 한 아들 가정, 그리고 부부가정을 위해 매달 꼭꼭 미사를 봉헌하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다 미혼의 자녀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결혼하여 손주들도 많습니다. 그중 “남궁우주”, 한 손녀의 이름을 잊지 못합니다. “우주”같이 크고 귀하다하여 “우주”라 작명한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 하나하나가 우주보(宇宙寶)요 세상이듯 하느님께도 우리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오늘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물으면서 비유를 시작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백마리 양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잃은 양 하나를 집요히, 끝까지, 마지막까지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마음을 피력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말씀중에 반드시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잃은 사람, 하나를 찾았을 때의 기쁨이요, 작은 이들 누구 하나라도 잃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라는 말마디는 오늘 복음 앞에도 분명히 언급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심판” 일화에서 주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관심사이자 기쁨은 “잃은 한 사람”에게 있음을 환기시킵니다. 우리 주변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임은 물론 자신을 돌아볼 것을 촉구합니다. 비유에서는 99마리 양중 길잃는 양은 하나인데, 실제 오늘의 인간 현실을 보면 100중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잃은 양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길 잃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길을, 희망을, 빛을, 자기를 잃고 방황합니다. 심각한 것은 아예 잃은 양같은 자기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존재 망각의 비극보다 큰 비극도 없습니다. 아예 주님을 찾지도 않고 자포자기 절망으로 주님 찾기를 포기하고 지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물음은 우리 하나하나의 독자를 향합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길잃은 존재입니까? 또는 주님의 공동체 안에, 주님 안에 몸담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까? 부단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과 더불어 더욱 열렬히, 항구히, 한결같이 희망이자 빛이자 길이신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단히 찾아 오시는 주님께만 맡기는 무책임한 자세가 아닌 우리 역시 주님께 화답하여 주님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이 잃은 양같은 우리를 찾아오셔도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대림시기의 주제는 온통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빛이자 길이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희망과 꿈을, 빛이자 길을 잃을 때 병든 사람, 병든 공동체, 병든 사회, 병든 나라는 필연입니다. 대림시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꿈을 주시고자, 빛이자 길이 되시고자 찾아 오십니다. 

 

그러니 대림시기야말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잃은 양들 같이 희망과 꿈, 빛과 길을 잃은 무기력한 무감각한, 무의욕적 삶이었다면 이 은총의 대림시기 심기일전, 회개와 더불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찾아 오시는 희망이자 꿈이요, 빛이자 길이신 주님을 마음 활짝 열고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도 강조했다시피 대림시기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은 우리 안에 희망과 꿈을 팍팍 심어주시고 친히 빛과 길이 되어 주십니다. 이사야서 다음 말씀이 우리를 더욱 하느님께 집중케 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모두가 사라져가는 덧없는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의 닻을 내리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빛과 생명이 충만한 영원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이사야서 말씀이 삶의 광야에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 적극적으로 화답할 것을 촉구합니다. 적극적 행동으로, 삶으로 회개의 실천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광야에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과 함께 내 삶의 광야 안팎을 부단히 갈고 닦고 가꾸고 돌보아 평정케 하여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찾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사람을 찾는 겸손한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다음 이사야서 말씀도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말고 소리를 높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끌고 오신다.”

 

우리 모두 시온이, 예루살렘이 되어 주님 오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착한목자 주님을 영접하는 대림시기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동안 참 많이 나눴던 “하늘을 담자”라는 제 자작 애송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바로 고요한 호수가 되어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늘이신 주님을 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아멘.

 


12/13(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새 마음을 약속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전삼용 신부)

 

2. 저는 기도에서 나오는 자유를 보여주지 못했고, 겸손에서 나오는 합리적 결정을 보여주지 못했고, 다양한 독서에서 나오는 조직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정중동에서 나오는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 모두 사목의 현장에서 잘 지내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아버지의 뜻”(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4. “하늘을 담자”라는 제 자작 애송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바로 고요한 호수가 되어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늘이신 주님을 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아멘.

(이수철 신부)

 

12/13(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354기도일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아버지의 뜻”(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2월13일(수)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