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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2월 28일 목요일[(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2월 28일 목요일[(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보고 기억하여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더욱 성대한 축일로 지내고 있다. 아기 예수님을 대신하여 죄 없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입당송

그리스도 때문에 살해된 죄 없는 아기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따르며 영원히 외치네. 주님, 영광받으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오늘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1,5―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5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4(123),2-3.4-5.7ㄷㄹ-8(◎ 7ㄱㄴ)
◎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
○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
○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철모르는 아기들도 거룩하게 하신 그 신비로
이 종들이 정성껏 바치는 예물을 받으시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성탄 감사송 1 : 빛이신 그리스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묵시 14,4 참조
이들은 하느님과 어린양께 바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으니,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하신 성체로 저희를 기르시니
성자의 탄생으로
말도 못하는 죄 없는 아기들이 순교한 이 축일에
저희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신학생 때 처음 접한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은 태백산맥입니다. 대하소설이었고, 감동과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 조정래 선생님의 장편 한강과 아리랑을 읽었습니다. 세 작품의 권수는 32권입니다. 시대 순으로 하면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의 흐름이지만 저는 태백산맥, 아리랑 그리고 한강을 읽었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단편인 정글만리, 천년의 질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82세의 조정래 선생님은 신작 황금종이를 발표하였습니다. 지구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와 신은 점차 쇠태의 길을 가고 있는데 여전히 막강한 권능과 힘을 자랑하는 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에서  때문에 망가지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등단 60년이 되는 2030년에 인간의 존재와 영혼을 주제로 신화(神話)’의 세상을 전하며 은퇴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점에서 황금종이를 사오면서 제게 스스로 성탄선물을 했다고 여겼습니다. 연말연시입니다. 저무는 한해와 다가오는 한해를 책과 함께 보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리랑에서는 나라를 빼앗기고 먼 타국에서 살아야 하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서럽고, 아프고, 고난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배신과 모함으로 일본 형사에게 잡혀서 고문을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념의 갈등으로 갈라서야 했던 형제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념의 이름으로 죄 없는 이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군인에게 고통을 받고, 밤에는 빨치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서러운 민중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기대어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는 가난 때문에, 연좌제의 그물에 갇혀 꼼짝 못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져야 했던 슬픈 청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력과 능력이 있어도 꿈을 펼칠 수 없는 젊은이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우리 민족의 슬픔과 고난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한과 아픔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바라보며 모든 설움과 아픔을 견디어가는 민중의 힘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아이가 메시아가 되어 자신의 권력과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두려움이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를 만들어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마태오 2,13-18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헤로데 가문은 BC 55년부터 AD 93년까지 팔레스타인과 인근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여러 왕들 가운데 대(大)헤롯이라고 불리는 헤로데 대왕(재위 기간 BC 37~4)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임명되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수많은 성채와 수로, 극장과 공공건축물을 건설하며 유다를 발전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음모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중심 인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헤로데 대왕은 당연히 로마에 충성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로마의 눈밖에 벗어나면 폐위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언제난 눈치를 봐야했습니다.

 

외교 정책도 로마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기에, 온전한 왕이라기보다 제한된 권한을 지닌

군주 정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에게는 10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14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 아들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 아니라 세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골고루 상속해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세명의 아들들은 모두 이복(異腹) 형제들이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이 어린 시절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무자비한 살상이요 불륜,

방종과 타락한 생활이었기에, 헤로데 왕조는 오래 가지 않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헤로데 아켈라오는 십년도 지나지 않아 로마로부터 파면당합니다.

북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헤로데 필립보는 AD 34년에 죽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역시 AD 39년에 파면되어, 모든 영지는 로마 총독 관할로 귀속되고 말았습니다.

 

잔악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났던 헤로데 가문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만,

헤로데 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순교한 세례자 요한이

대표적입니다.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것이 두려워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헤로데 대왕은 인류 역사 안에서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했습니다.

 

당시 자행되었던 대 학살 사건의 정황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환히 그려집니다.

당시 남성중심의 부계사회였던 유다 문화 안에서 사내아이들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사내아이들은 가문의 혈통을 잇는 보배요 가정의 미래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동네 아기란 아기들이 모조리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집마다 흘러나오던 아기들의 울음소리 대신 아기 잃고 슬퍼하는 부모들의 통곡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혹시나 해서 아기의 볼을 꼬집어보고 가슴에 귀를 대어 봐도 이미 상황은 되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불행한 예언이 헤로데 시절에 이르러 정확하게 실현된 것입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정권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정신 나간 지도자들,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야수 같은 지도자들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더 요구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희생자들을 치료하기,

통제불능인 자동차를 멈추게 만들기.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보고 믿었다.”(요한 20,8) 

우리는 성탄 8부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식사를 하였고,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 아래에 있었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그분의 아들이 된 제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구약성경의 ‘새로운 벤야민’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곧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벤야민은 주님의 “사랑은 받는 이”(신명 33,12)였듯이,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요한 13,23;19,26;21,7;21,20)라 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동시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통과해서 지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아침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마태 28,2)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렇게 잘 단정된 ‘수의’와 ‘수건’은 제자들이 밤중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한 경비병들의 거짓 증언에 대한 반대 물증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주님이 계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합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베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마음 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생명을 가져다 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빈 무덤’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시에 만납니다. 이토록, 우리는 더없는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신 분을 기립니다.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비어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우리 모두가 주님의 애제자(愛弟子)이다-

 

“수사님, 여기 수도원에서 평생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간혹 들었던 질문입니다. 아마도 죽는 그날까지 여기 수도원에서 정주하다 때가 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歸家)할 것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점차 짧아지는 살 날입니다. 누가 다시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맛에 삽니다!”

 

이번 성탄을 지내면서 저를 사로잡은 고백은 둘입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싶은 희망 때문에 오래 살고 싶다.”

“마지막 임종시 단 하나의 아쉬움이 있다면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일 것 같다는 예감이다.”

 

하루하루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을 살고 싶음은 참으로 믿는 이들의 궁극의 갈망일 것입니다. 이미 예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자작시 두편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집니다. 바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에 대한 갈망을 노래한 시입니다. 무려 26년전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주님과 나의 사랑의 일치를 소망하며 고백한 “하늘과 산”이란 시입니다. 

 

“하늘있어 산이 좋고

 산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날로 깊어지는 상호보완의 사랑의 일치 관계를 노래한 시입니다. 아마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에 35년동안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하늘과 산이요 그때마다 자주 외웠던 자작 애송시입니다.

 

“밖으로는 山,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山

 안으로는 江,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山속의 江”-1998.1.27.

 

일편단심 산처럼, 강처럼, 산속의 강처럼, 주님 향한 사랑을 고백한 “산과 강”이라는 참 짧은 자작 애송시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영성을 상징하는 시이기도 합니다. 두편 모두가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일치를 소망하며 읽는 시입니다. 

 

이런 사랑의 대가(大家)이자 사랑의 달인(達人)들이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이야말로 성덕(聖德)의 잣대가 됩니다. 엊그제 주님 성탄 대축일 바로 다음날 어제는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천상탄일이었고, 오늘은 사랑의 사도, 주님의 애제자라 일컫는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애제자라 지칭하는 요한은 우리 모두의 소망을 반영하는 사도이기에 우리 역시 하나하나 모두가 주님의 애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애제자 답게 살아갑시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후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요한은 6년경 태어나 100년경 선종했다하니 무려 94년동안 장수를 누렸던,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성인입니다. 

 

요한의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 이름 뜻대로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은 사랑을 나누며 은혜로운 삶을 살았던 사도입니다. 예수님곁에서 늘 성모님과 함께 했던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께서 두분께 드린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딸)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애제자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그 애제자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 합니다. 주님의 애제자인 우리 역시 주님의 당부에 평생 성모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어머니 은혜” 노래를 “성모님 은혜”로 바꿔 부르곤 합니다. 한번 불러보셔요, 자꾸 부르고 싶을만큼 좋습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느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요한복음, 요한 서신, 요한 계시록을 쓰며 96세까지 장수했던 사도 요한은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의 부축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이 매일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반복하는 것에 대해 신도들이 불평을 하자 요한은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키면 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 대답하였다 합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랑의 사도”불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면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살아있는 동안 주님을,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고 차별하고 화내고 큰 소리치고 싸우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은 너무 억울하고 허망한 일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애제자 사도 요한의 뛰어난 사랑의 열정은 수제자 베드로를 능가합니다. 빈무덤을 향해 달릴 때도 베드로보다 앞섰고, 무덤에 도착해서도 겸손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수제자 베드로 다음에 무덤에 들어섭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고, 이런 장면을 일별하는 순간, 애제자는 전광석화 “보고 믿었다.”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순간 체험한 것입니다.

 

구유와 십자가, 그리고 이어지는 빈무덤, 잘 개켜져 있는 수건과 아마포, 퍼즐이 순간 완성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모세가 주님을 뵙고 나올 때 너무 눈부신 얼굴빛에 너울을 썻듯이 평생 인성(人性)의 너울을 쓰고 지냈을 주님은 이제 너울(수건)을 벗으시고 신성(神性) 그대로 아버지를 뵙게 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들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됩니다. 얼마나 심오하고 은혜로운 진리인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요한 사도가 구체적 주님 체험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는 사도적 교회요, 우리는 평생 미사전례를 통해 사도 요한의 주님 체험에 참여합니다. 오늘 요한1서 말씀은 그대로 사도 요한의 강론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의 내용들입니다. 아마도 96세 노령에도 생생했을 다음 고백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심금을 울리는 강론입니다. 영지주의 이원론자들의 이단들을 침묵케 한 참 장쾌하고 통쾌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생명을 증언하고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선포하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그 아드님이신 예수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과 나누는 친교의 사랑이, 충만한 기쁨이 우리를 더욱 주님의 애제자로 만들고, 주님을 사랑하는 참맛으로, 참기쁨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시편97,11-12). 아멘,


12/28(목)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아이가 메시아가 되어 자신의 권력과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두려움이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를 만들어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조재형 신부)

 

2.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정권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정신 나간 지도자들,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야수 같은 지도자들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4.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면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살아있는 동안 주님을,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고 차별하고 화내고 큰 소리치고 싸우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은 너무 억울하고 허망한 일이겠습니다. (이수철 신부)

 

12/28(목)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제369기도일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헤로데처럼 정권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정신 나간 지도자들,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야수 같은 지도자들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게 하소서.

 

  • 2023년 12월28일(목)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