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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3일 주일[(자) 사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3일 주일[(자) 사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첫째 수련식을 이 주일에 거행한다. 이 수련식에서는 고유 기도문과 고유 전구를 사용한다.>

입당송

시편 25(24),15-16
제 발을 그물에서 빼내 주시리니, 제 눈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나이다.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또는>
에제 36,23-2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어, 온 세상에서 너희를 모으리라.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모든 부정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리라.

본기도

하느님,
온갖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죄를 씻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저희를 언제나 자비로이 일으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20,1-17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3.7-8.12-17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8.9.10.11(◎ 요한 6,68ㄷ)
◎ 주님,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금보다 순금보다 더욱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다네. ◎

제2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22-25
형제 여러분,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3,16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도자이신 주님, 세계 각지에서 복음을 위하여 목숨 바치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어, 그들의 용기와 선교 열정으로 온 교회를 불타오르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외세의 침략과 억압에서도 민족혼을 지키려 애써 온 저희 선열들을 위로하시며, 저희가 그들을 본받고 남북의 평화로운 만남을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

3. 새 학년을 맞이한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스승이신 주님, 배움의 터전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는 이들을 보살펴 주시어, 지식을 넓히고 지혜를 키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주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창조주이신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에 희망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는 봄꽃처럼, 저희도 어려움을 굳건히 견디고 새 희망을 전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이 화해의 제사를 굽어보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도 형제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사순 감사송 2 : 참회>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마음을 다시 깨끗하게 하시려고
구원과 은총의 시기를 특별히 마련하시어
그릇된 욕망에서 벗어나 덧없는 일을 피하고
영원한 구원을 향하여 힘쓰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84(83),4-5 참조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영성체 후 묵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시며 어리석음이십니다. 그렇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지혜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과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깊이 묵상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이 세상에서 천상 양식을 받고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이 성사의 신비를 날마다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을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이끄시고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자비로이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계명을 완수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 주일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Failure is a part of life. If you don’t fail, you don’t learn. If you don’t learn, you will never change.(실패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당신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배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배울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에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은 제 삶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곤 했습니다. 33년 전에 저는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처음 본당으로 가서 보좌신부로 지내는 중에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당시 교구장이셨던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병원엘 찾아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병원에서 입원하고, 퇴원할 때까지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저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저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늘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늘 새롭습니다.

 

30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에서 사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그래야 했습니다. 저는 매일 송별식을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서는 미국으로 가는 것을 취소하였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주교님께 전한 사람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도 생겼습니다. 돌아보면 주교님의 따끔한 질책이 제게는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술에 대한 절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자리가 있어도 10시 전에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산보하고, 책을 읽으니 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습관을 하나 가지면, 그 습관이 나를 변화 시켜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25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적성성당으로 갈 수 있는지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고 본당신부로 잘 지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적성성당은 땅은 넓었지만 교우들의 수는 적었습니다. 평일미사에 나오는 교우는 10명 미만이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교우도 100명 미만이었습니다. 당연히 주일헌금도 적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33년에 3년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저는 그곳에서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농산물 직거래도 하였고, 서울에서 오는 학생들의 농촌봉사 활동도 받았습니다. 차가 없어서 성당에 못 나오는 분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단을 만들었습니다. 4대의 봉고차가 교우들의 집으로 가서 모셔왔습니다. 여름에는 전 신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큰 본당에 있는 동창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혈압도 있었는데 적성성당에 있으면서 모두 좋아졌습니다. 저의 건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3주일

복음: 요한 2,13-25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을 묵상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말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상거래는 하느님의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면서,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급격히 훼손되고 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사제는 유다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확고한 위치와

권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최고 의회는 사제 가문의 가족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일반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의 집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 물 좋은 장소, 막대한 목돈이 오고 가던 장소였던 성전에서의 상거래와 뒷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잔뜩 돈독이 올라있던 그들이 최상의 수입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으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더이상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작정하고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타락하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성전 정화 작업을 계속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성전이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장바닥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홀대받고, 음흉한 사람들의 주머니만 가득 채워주는 훼손된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3주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3월의 첫 주일입니다.

 

이제 봄이 오려나봅니다.

우리 영혼의 봄도 피어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멀지 않아 부활로 피어오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면서 살아가야 할 계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하느님의 힘과 지혜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지어지는 새 성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하느님,

저희 마음이 주님의 계명을 따르게 하시고,

저희가 십자가의 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주님 사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바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또 환전상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요한 2,15)
거룩한 성전이 형식적 예배와 인간의 탐욕으로 부패되고,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 함은 곧 당신께서 처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지셨음을 나타내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요한 2,18) 하고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새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먼저 당신의 몸이 허물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성전의 숨겨진 신령한 의미가 드러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상징이었던 성전을 파기하고 온전한 '새 성전'이 드러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이 세워질 참된 성전, '새 성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건물로써 신축될 ‘성전’이 아니라, 제2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워질 '새 성전',

곧 부활로 세워지는 참 성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새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헌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지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 말씀의 끈으로 만드신 '채찍'을 달게 받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편리와 이기를 채우기 위한 가축들과 돈을 쏟아버리고, 그릇된 마음의 '탁자'들을 뒤엎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2.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 루카15,1-3.11ㄴ-32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

                                                        -"나는 누구인가?"-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아침 성무일도 독서기도시 시편136장 26절까지 계속되는 후렴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말마디가

오늘 복음과 일치합니다. 

요즘은 홈페이를 열어 뉴스 확인하기가 겁납니다.

어디나 어둡고 불길한 뉴스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느낌도 듭니다.

다만 교황님 홈페이지는 가장 먼저 열어보는 살아 있는 영성의 보물 창고입니다.

늘 어둔 세상에 길을 열어주는 희망과 지혜의 빛 가득한 뉴스와 기사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한눈에 들어오는 여러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그리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라 불림받은 사람들”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믿고 선포해야 할 진리가 되었다.”

“‘성 이념(Gender ideology)’은 우리 시대의 가장 추한 위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와 여자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없애는 것은 인간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대신 ‘남자와 여자는 풍요로운 ‘긴장’가운데 존재한다(Man and woman exist in a fruitful ‘tension’).”

성 이념에 종지부를 찍는 얼마나 지혜로운 통찰인지요! 

 

오늘의 다산 어록과 맹자의 사단설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랑은 고차원의 덕목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일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다산

“가엾이 여기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이런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맹자

 

다산어록 3월의 모토인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뜻도 깊고 멋집니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뜻으로, “물들이고 싶거든 먼저 물들어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늘 들어도 늘 새로운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pure Gospel)’이라 칭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보다는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비유’라함이 적절할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이처럼 감동적인 예화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묻고 싶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이라 이 복음을 대하면 늘 넘치는 감동과 더불어

저절로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되며 오늘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습니다.

떠오르는 루가복음의 결론같은 가르침을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가6,36)

 

우리의 평생과제가 부여되니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갈파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인 우리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하면 정주와 환대의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 좋아하는 두편의 자작시입니다. 24년전 감동을 담은 “아버지 산처럼”이란 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자비의 품으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아버지 산처럼!”-2000.11.17.

 

늘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는 아버지를 닮은 불암산같은 요셉 수도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짧은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침묵의 저녁 불암산!”

 

한량없이 크고 깊고 고요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이 시를 썼을 때의 감동도

생생합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이런 산같은 분입니다.

제1독서 미카 예언자가 고백하는 하느님도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와 일치합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오늘 복음의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아버지입니다.

제 고백상담 집무실벽에 수십년 동안 걸려있는 바로 귀환한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렘브란트 그림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절정은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거지가 되어 생환한

작은 아들의 환대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일체의 책임 추궁은 말끔히 사라지고 잃었던 아들을 찾음에 너무나 기뻐 얼싸안고 환호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은총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종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존재감 없는 거지같은 신분에서 왕자같은,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의 신분을 회복한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상실한채 존재감 없이

무명의 거지처럼 세상 속에 살다가  불쌍하게 죽어가는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 외아드님을 통해 날마다 작은 아들같은 우리의 귀환을,

생환을 환영하시며 미사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불타오르는 질투에 제정신을 잃고 분노하는 큰 아들 역시

소위 잘 산다 자부하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우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산 큰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던,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 있던

아버지와의 신뢰 관계가 참으로 빈약했던 큰 아들입니다.

수십년간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정주가 아닌 생각없이 타성적으로 안주하다보면

우리 또한 이런 큰 아들이 될 위험성도 다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큰 아들의 속내가 환히 드러납니다.

너무 화가 나니 말에는 사실과 어긋난 과장과 왜곡도 심합니다.

아우가 아닌 저 아들이라 하며 아버지와 작은 아우를 하나로 몰아 붙입니다.

큰 아들의 태풍같은 분노를 미풍으로 바꿨을 다음 자비하신 아버지의 온유하고 진실한 말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복음사가는 큰 아들의 반응은 물음표로 남기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반응을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큰 아들, 작은 아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참으로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자녀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장 효성스런 아들인 예수님 당신을 삶의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복음을 묵상할 때 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효성스런 아들로서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효성스런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생명있는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시나니,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25). 아멘.


3/3(일) 사순제3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조재형 신부)

 

2.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큰 아들의 태풍같은 분노를 미풍으로 바꿨을 다음 자비하신 아버지의 온유하고 진실한 말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복음사가는 큰 아들의 반응은 물음표로 남기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반응을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큰 아들, 작은 아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참으로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자녀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장 효성스런 아들인 예수님 당신을 삶의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3/3(일) 사순제3주일, 435(제65)일 기도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니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나의 성전을 아버지의 성령으로 가득 채우소서.

옛 성전을 버리고 새 성전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 2024년 3월3일(일) 3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