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3월 1일 금요일[(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본기도
저희를 거룩한 참회 생활로 깨끗하게 하시어
다가오는 축제를 성실한 마음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7,3-4.12-13ㄷ.17ㄹ-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 그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켜, 양식을 모두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라네. ◎
○ 사람들이 그의 발에 족쇄 채우고, 목에는 쇠사슬 옭아매었네. 마침내 그의 말이 들어맞아서, 주님 말씀이 그를 보증하셨네. ◎
○ 임금이 사람을 보내 그를 풀어 주고, 민족들의 통치자가 그를 놓아주었네. 그를 왕궁의 주인으로 내세워, 모든 재산을 다스리게 하였네. ◎
복음 환호송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의 종들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거룩한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고
그 신비를 믿음과 선행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영원한 구원의 보증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주님의 뜻을 성실히 실천하여
약속하신 구원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선행에 힘쓰고
언제나 주님의 보호를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노총각이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고, 노총각은 의사인 친구에게 찾아가서 아이와 자신이 닮은 곳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인 친구는 아이와 아빠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이야기 해 줍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얼굴도 닮았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노총각은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알면서도 아내가 자신의 아이를 출산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요즘이야 유전자 검사라는 간단한 방법이 있지만 예전에는 닮은 곳을 찾으면서 나의 자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체질과 성격을 닮았습니다. 아버님은 일찍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고, 혈압이 높았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아서 40이 되면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질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혈압이 있어서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유순한 성격입니다.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남을 이끄는 편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아도 저는 부모님의 자식이 확실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들이 있을까요? 첫째,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형들이 요셉을 질투하고, 시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둘째, 은전에 팔렸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은전 스무 닢을 받고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에게 팔았습니다. 셋째, 요셉은 이집트 관리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물리쳤지만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넷째,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풀이하였고,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가족들은 이집트로 와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섯째,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나의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지 않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있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탐욕으로 이웃을 괴롭힌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삶이 우울하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탐욕 때문에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죽이고, 주인의 외아들까지 죽인 소작인들은 분명 예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인내로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이웃에게 봉사한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긍정의 마인드와 희망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은혜로운 회개의 때인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21,33-43.45-46
우리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입니다!
소작(小作)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의 일정량을 바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형태의 농사입니다.
일년내내 죽을 고생만 하고 손에 쥐는 것은 쥐꼬리만큼인 소작농들의 애환은 오랜 역사 소설의
주된 테마였습니다.
돈보스코를 연구하다보니 그분의 부모님 역시 소작농이었습니다.
구호대상인 극빈자 계급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프란치스코 보스코와 맘마 마르가리타는 남의 땅을 빌려
하루 온종일 뙤약볕에서 죽기살기로 일만 하던 소작농이었습니다.
부양해야 할 식구는 많은데, 농업이 기계화가 되기 훨씬 전이지, 돈보스코의 부모님들은
그야말로 하루 온종일 뼈빠지게 일만 하셨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유명인사가 된 이후, 알베르 뒤 보이라는 전기 작가가 근사하게 돈보스코 전기를 집필했었는데,
최종적으로 돈보스코에게 검열을 부탁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제일 먼저 수정한 대목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가족은 꽤 넉넉한 농부였다.”라는 구절을 확인한 돈보스코는 빨간 펜으로 찍찍 긋고,
이렇게 고쳤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였다.”
그만큼 소작농들의 삶은 고달팠고 힘겨웠습니다.
사실 소작인들 입장에서 지주들이 땅을 빌려준 것,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 가운데서 악한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대풍년, 다시 말해서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으면서도, 주인에게는 올해 농사가 흉년이라며
쥐꼬리만큼의 소출만을 보내는 악덕 소작인도 있습니다.
빨리 소출을 보내주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알았다 해놓고는, 죽어도 안 보내는 진상 소작인도 있습니다.
더 지독한 소작인이 있습니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지주는 자신의 종을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소출을 받아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악한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매질하고 죽인 후 포도밭 밖으로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 악한 소작인들은 바로 유다인들이요, 동시에 우리들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잘 좀 가꾸어보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보라고 임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대 기간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고, 길어야 90년 100년입니다.
악한 소작인들처럼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종이면서 주인인 양 큰 소리 뻥뻥 치고 행세하다가 큰코 다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한 소작농처럼 처신하다가는 하느님의 강력한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늘 신중하게, 늘 종이나 소작농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 하루 살아갈 일입니다.
나를 내 삶의 주인이요 주인공으로 여기고, 가슴을 딱 펴고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2.29.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17,5-10 루카16,19-31
“삶도 행복도 선택이다!”
-회개의 일상화-
삶은 선택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천국도 지옥도, 회개도 사랑도 선택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장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연옥이, 지옥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선택에 따라 전개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행복을 선택해 살아야 죽어서도 천국의 행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타고난, 바꿀수 없는 부정적 요소도 많지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을, 희망을, 사랑을, 행복을, 감사를, 기쁨을,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하루에 감사하며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선택하여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다산의 어록중 다음 내용도 우리에게 선택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더 가고 싶을 때 절제하고, 두려울 때 한걸음 나아간다.
탁월함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고요할 때 텅 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움직일 때 곧으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다.
이러한 상태는 탁월함에 가깝다”
얼마전에는 군에서 전역후 귀농하여 새로운 삶을 선택해 힘차게, 희망차게,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저를 삶의 멘토라 부르며 따르는 60대 중반의 ‘이용민 요아킴’형제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2005년 봄에 만났으니 무려 20년째 교류를 계속중인 분입니다.
이분이 선물한 “신중년의 비상(飛上)”이라는 책 제목도 멋졌고, 날마다 비상의 삶을 선택하여 사는 모습도,
또 서문의 감사로 끝나는 끝말도 아름다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응원해주고 지지해 준 아내 임영자 여사, 나의 인생 노트에 적어 놓은 글을 잘 정리해 준
아들 형록이와 딸 민지에게 감사하고 이 책을 바친다.”
작년 8월15일부터 시작한 선택-훈련-습관화의 도식에 따라 기상하자마자 예수님의 십자가와 태극기 앞에서
시작한 만세육창 기도-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주님도 천국도 행복도 선택임을 확인하는 다음 제 ‘예닮기도’ 일부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희망,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의도적 선택이,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는 말그대로 깨어 회개하며 사는 시기입니다.
회개를 통해 가아(假我)가 아닌 진아(眞我)의 참나를 사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뿐 아니라 매일미사중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 후반부 말씀 역시 우리를 뒤돌아 보게하는, 또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적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이 말씀을 보면 구제불능의 사람이요,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에 가깝습니다.
사실 오늘날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 현실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이렇게 인간이 사악하고 잔인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도 들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판불변의 법칙’이니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말도 회자되나 봅니다.
이런 부정적 숙명론에 도저히 주저앉을 수는 없기에 이래서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참 절박합니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창세기 노아 홍수후에도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8,21)
바로 이런 부정적 인간상의 전형이 오늘 복음의 이름없는 무명의 부자입니다.
이름이 없는 부자, 존재감 없는 아무것도 아닌 무와 같은 존재를 상징합니다.
오늘날도 복음의 부자처럼 부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무지의 헛된 유령같은 삶을 살다가
제대로 살아보지고 못하고 죽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참 충격적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는 오직 자기만 알고 라자로라는 존재는 관심도 없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짐승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라자로야 말로 부자에겐 구원의 문이요, 회개의 표지로 부자를 심판하지만 무지한 부자는 전혀 알길이 없습니다.
이름없는 무명의 존재감 없는 어떤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는 이름이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 앞에 살아 있는 존재임을 알리듯 라자로는 이름도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흡사 제1독서의 예레미야서가 부자와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땅에서 살리라.”
생각없이, 영혼없이 몸의 욕망따라 살아 온, 주님 탓이 아닌 스스로 자초한 업보의 화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부자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내 중심”인지 “주님 중심”인지 우리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후자의 주님 중심의 모습은 그대로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의 내면의 실상은 어느쪽입니까?
외관상 가난하고 초라해 보여도 이런 내면을 지닌자가, 하느님께 날로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려가는 자가
정말 그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자유인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향기로운 사람입니다.
새삼 이 두 부류의 인간상, 우리의 회개를, 선택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는 사후 그 처지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가 가로놓여 있는 데, 이것은 살아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고정된 단절의 구렁이입니다.
내 중심의 삶들을 살기에 각자는 고립된 섬처럼 되고, 참으로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삶들을 살 때
하나로 연결됨으로 서로간 단절의 구렁도 사랑으로 메꿔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래서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단한 회개의 선택, 회개의 일상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찬미와 감사, 희망과 기쁨,
자유와 평화의 참행복한 하늘 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지상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3/1(목) 사순제2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욕심과 탐욕 때문에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죽이고, 주인의 외아들까지 죽인 소작인들은 분명 예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인내로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이웃에게 봉사한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긍정의 마인드와 희망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은혜로운 회개의 때인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2.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잘 좀 가꾸어보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보라고 임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대 기간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고, 길어야 90년 100년입니다.
악한 소작인들처럼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복음의 부자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내 중심”인지 “주님 중심”인지 우리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후자의 주님 중심의 모습은 그대로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의 내면의 실상은 어느쪽입니까?
외관상 가난하고 초라해 보여도 이런 내면을 지닌자가, 하느님께 날로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려가는 자가
정말 그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자유인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향기로운 사람입니다.
새삼 이 두 부류의 인간상, 우리의 회개를, 선택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이수철 신부)
3/1(목) 사순제2주간 금요일, 433(제63)일 기도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잘 좀 가꾸어보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보라고 임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대 기간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고, 길어야 90년 100년입니다.
악한 소작인들처럼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대로 삶을 살게 하소서.
- 2024년 3월1일(금) 6시4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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