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5월 23일 목요일[(녹) 연중 제7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5,1-6
1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2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3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4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 말을 좋아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 그들은 양들처럼 저승에 버려져, 죽음이 그들의 목자 되리라. ◎
○ 아침에는 올곧은 이들에게 짓밟히고, 저마다 그 모습이 썩어, 머나먼 저승으로 사라지리라. 하느님은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아귀에서 기어이 빼내시리라. ◎
○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
○ “네가 잘한다고 사람들이 칭찬한다.” 사는 동안 스스로에게 말할지라도, 조상들이 모인 데로 내려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41-5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예전에 감명 깊게 읽은 글이 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배는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선장은 결정을 합니다. 배 안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배 밖으로 버립니다. 더러는 아깝기도 하고, 더러는 소중하기도 하지만, 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배를 가볍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욕심을 내서 자신의 물건을 배 밖으로 버리지 못하면 배는 험한 폭풍우 앞에 가라앉을지도 모릅니다. 본당 사도회에서 ‘바자회’를 준비하였습니다. 주보에 본당교우들의 협조를 공지하였습니다. 바자회에 필요한 물건들을 기증해 주도록 공지하였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좋은 물건을 기증해 주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아예 ‘포장’도 뜯지 않는 새것이었습니다. 사도회는 창고에 가득 쌓인 물건을 정리하였습니다. 기꺼이 좋은 물건을 기증해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좋은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 준 사도회 형제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야고보 사도는 재물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 이웃을 착취해서 얻은 재물은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재물을 사용한다면 그런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이웃의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이 탐욕을 찾는 데 쓰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귀는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귀가 감언이설에 놀아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손은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 손으로 이웃을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을 찬미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갖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고, 이웃에게 큰 상처를 주고, 가족까지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런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그 어리석음을 경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그만큼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종교인도, 성직자도 이런 유혹에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지만, 신앙은 결단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손님 중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손님, 손님들끼리 화목하고 친교를 나누는 손님, 손님들끼리 다투고 욕하는 손님, 직원을 하인처럼 대하는 손님, 말을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습니다. 손님들 중에는 배움이 많고, 재산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배움의 크기가, 재산의 많음이, 능력의 뛰어남이 손님의 친절과 예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종교인들 중에도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 서로 다투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마치 제가 그런 것처럼 미안했습니다. 직원은 다행히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처럼 친절하고 예의 바른 손님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9,41-50
혹시라도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인 동시에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이 연자매 관련 경고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죄와 관련해서 이런 걱정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미처 인지하지 못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악표양으로 인해,
우리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멀리 보지 않아도 그런 인물 중의 대표주자를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이 매일 여기 저기 수시로 등장하는데, 그분 얼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옵니다.
그분은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원흉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같은 사제 수도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참 많은 인생입니다.
많은 시선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호시탐탐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언행에 신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우들은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교우들이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마다 제일 먼저 우리 얼굴을 떠올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 얼굴만 봐도 갑자기 뒷골이 당기고 혈압이 급상승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펴보고 성찰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하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마르 9,42)
우리가 자주 빠지는 일이기에 가슴이 섬짓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죄짓게 하는 도구 세 가지, 곧 자신의 ‘손’과 ‘발’과 ‘눈’을 잘라버리고 빼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구더기와 지옥 불과 지옥 불 소금을 피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을 잘라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단초가 되는 ‘죄의 뿌리’를 잘라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죄를 불러들인 마음의 뿌리를 절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르 9,50)
곧 죄를 불러들이는 단초가 되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금’으로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소금’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산상설교에서 보여주듯이, “세상의 소금”(마태 5,13) 입니다.
곧 ‘소금’은 다른 이 혹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녹아서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에게 참여하는 모든 것, 곧 세상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과 함께 타인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라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언제나 소금으로 맛을 낸 것과 같아야 합니다.”
(콜로 4,6)
아멘.
* <참고> : 소금은 곡물(레위 2,13)이나 향료(탈출 30,35)에 뿌려져 성별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제물(민수 18,19)에 뿌려져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의 상징이 되기도 함.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22.연중 제7주간 수요일 야고4,13-17 마르9,38-40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관용과 겸손-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사제서품이후 35년 동안 거의 날마다 강론 쓰는 일이 습관이 되니 요즘은 많이 자유롭고 싶어
일기 쓰듯 강론을 씁니다.
어제 받은 메시지도 충격입니다.
연이어 부음을 듣습니다.
“김길수 사도요한 교수님 알고 계세요?
어제 새벽 주무시는 듯 본향으로 떠나셨어요.
교회의 한 어른, 한 별이 지구를 떠나신 듯...허전함을 남기고 떠나셨어요.
내일 10시 무태성당서 장례미사, 기도해주세요.”
38년전 대구가대 대학원에 편입할 때 대구가대의 교무과장으로 재직하던 교수님은
참 반듯하고 친절하고 설명도 명쾌했던 신사다운 분으로, 또 교회의 큰 일꾼으로 기억합니다.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을 다시 되새깁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많이 너그럽고 겸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신선합니다.
“친구는 또 하나의 나와 같다.
서로 기댈 수 있는 이와 함께라면 더 멀리 갈수 있다.”<다산>
너그럽고 겸손한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고 이런 이들이 이런 좋은 친구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좋은 도반 역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장인은 일에 나서기 전에 그 연장을 잘 손질한다. 어떤 나라에 살든지 현명한 사람을 섬기고
어진 사람과 벗해야 한다.”<논어>
현명하고 어진 사람 역시 너그럽고 겸손한 사람이겠습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이 관용과 겸손의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때 날로 너그러워지고
겸손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전 짧은 자작시 불암산도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때로 크고 깊게 와닿는 침묵중의 불암산입니다.
큰 산은 관대함을, 깊은 산은 겸손함을 상징합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역시 좋은 사람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깊은 겸손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크고 깊은 좋은 산처럼 관대하고 겸손한 사람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예수님입니다.
또 하나 제가 좋아하는 한자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정수유성, 심수무성靜水流深, 深水無聲)
이 또한 너그럽고 겸손한 사람의 인품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요 무지한 사람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관대한 마음이,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빛납니다.
불어로 ‘나와는 다른 타자의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는 너그럽고 겸손한 관용의 정신’을
‘똘레랑스(tolerance)’라 부르며 가톨릭교회의 영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요한의 물음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둘의 극명한 차이를 발견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요한을 대표한 제자들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폐쇄적인 완전히 닫혀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즘 양극화의 시대, 정서적 양극화, 이념의 양극화, 빈부의 양극화등 분열의 시대가
흡사 심리적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 현상입니다.
과연 역사는 진보하는지 묻게 됩니다.
참으로 대화와 통합의 정신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줍니다.
바로 이게 스승의 역할입니다.
편협한 자기 시야에 갇혀있던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께 크게 배웠을 것입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런 넉넉하고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건들이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도 관용의 정신이며,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는’ 것 역시 공존의 평화 공동체를 위한
관용의 자세입니다.
기도와 침묵, 인내를 요하는 관용의 정신입니다.
이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두개의 문의 비유입니다.
믿는 이들은 물론 교회나 수도원은 활짝 열린 두문을, 즉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의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는 두문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수도원의 자랑은 1987년 설립이후 37년 동안 수도원 정문도, 성전문도 늘 열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세상에 이런 늘 열려있는 수도원이나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관용의 정신을 가리킨다면 제1독서 야고보서는 겸손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Man proposes but God dispses).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나 죽음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깨달음이 저절로 침묵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요, 참으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무지와 교만에 대한 답은 겸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겸손은 그대로 지혜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도 널려 있습니다.
가장 쉬운 일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제일 어려운 일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합니다.
이런 겸손과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하루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나 교만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겸손과 지혜,
사랑과 평화, 기쁨과 행복을 삽니다.
말그대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되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이상적 현실주의자로 삽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그러니 과거의 어둠이나 상처에 아파하며 사는 것은, 내일을 앞당겨 걱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오늘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살아야 할 날은 오늘이지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선물에 감사하면서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천국의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관대하고 겸손한 주님을 닮은
참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5/23(목) [(녹)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조재형 신부)
2.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펴보고 성찰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런 넉넉하고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건들이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도 관용의 정신이며,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는’ 것 역시 공존의 평화 공동체를 위한
관용의 자세입니다. 기도와 침묵, 인내를 요하는 관용의 정신입니다.(이수철 신부)
5/23(목) [(녹) 연중 제7주간 목요일] , 516(146)일 기도
복음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5월23일(목) 7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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