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5월 18일 토요일[(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 또는
[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데 파치 동정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5,13-20
사랑하는 여러분,
13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14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15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8 그리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소출을 냈습니다.
19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진리를 벗어나 헤맬 때
누가 그 사람을 돌이켜 놓았다면, 20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의 기도 당신 앞의 분향으로 여기소서.
○ 주님,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오소서.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의 기도 당신 앞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두 손 올리오니 저녁 제사로 받으소서. ◎
○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두시고, 제 입술에 문지기를 세우소서. 주 하느님, 저는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제 영혼을 내버리지 마소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3-16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본당 어르신 부부가 고백성사와 봉성체를 원하였습니다. 봉사자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형제님은 집에 있었는데, 자매님은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고 합니다. 전화를 드리니,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면서 형제님이 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재매님이 돌아왔고, 봉성체 날짜를 착각했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하루 전날 확인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때로 착각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고백성사와 봉성체를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어르신 부부는 점심을 먹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어서 근처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한(恨)’이 맺힌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던 부부에게도 ‘한(恨)’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감을 믿으면서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한’이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픔을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가슴에도 ‘한(恨)’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이 2004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늘 밝고 화사했던 어머니도 가슴 한 쪽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한(恨)은 아니지만 몇 번의 아쉬움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의 임종을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2011년 5월 5일 목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함께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 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주교님께서도 오셔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들이 미사를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2020년 9월 10일 목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당시 뉴욕에 있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으로 갈 수 없었고, 뉴욕에서 다른 분을 위한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추기경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잘 마쳤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방송 사장 신부인 동창 신부님이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1995년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의 교포사목을 권하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느덧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열정은 넘쳤지만, 절제와 겸손의 덕이 부족했습니다. 부덕한 저의 탓으로 미국으로의 인사이동은 취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좀 더 여물게 하신 다음 미국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 한 후에 증상에 맞는 ‘처방전’을 만들어 줍니다.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으로 가면 약사는 처방전에 따른 약을 줍니다. 신앙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처방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기도’입니다. 즐거운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찬양 노래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교회의 원로들입니다. 원로들은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라줍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처방전은 기도와 찬양 그리고 교회와의 연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강론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 10,13-16: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놓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15절).
어린이들이 부모를 바라보듯이 제자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받아들이고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스승이 제자나 어린이를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아이들이 축복을 받도록 예수님께 데려왔던 것 같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짢아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맞아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14절)
그 어린이는 하느님을 거슬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갓 태어난 아이나,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수도 있다.
이 모든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는 은총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온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는 벌어먹지 않고 부모가 주는 대로 받는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든지 또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벌어들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과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자세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에 걸려 넘어진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세상의 지혜와 명예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알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묵상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3. 2024년 05월 25일 토요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절마다 “어린이”라는 낱말이 되풀이됩니다.
이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 ‘파이돈’은 세 살에서 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이 가지는 특징은 어른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따르며 믿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삶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고, 이렇게 하느님께 의존하는 삶의 자세가 역설적으로 인생을 무엇보다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독서의 내용이 이러한 역설을 확인하여 줍니다.
독서에서는 고통을 겪으면 하느님께 기도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찬양 노래를 부르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주어지는 상황을 수용하도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온전한 신뢰와 의존으로 단순하게 하느님께 다가가는 어린이들과,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를 막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보다도 힘들어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막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비록 그것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더라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면’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24.연중 제7주간 금요일 야고5,9-12 마르10,1-12
혼인과 이혼
하느님 중심의 미완(未完)의 부부가정공동체
존경과 신뢰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존경과 신뢰가 사라지면 사랑도 빛이 바래지고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습니다.
성모성월 5월은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가정의 달과 연관된 날도 참 많습니다.
5월5일 어린이 날, 5월8일 어버이날, 5월11일 입양의 날, 5월15일 스승의 날이자 가정의 날,
5월20일 성년의 날, 5월21일 부부의 날등 정말 가정의 달같습니다.
저의 경우도 매해 10년째 스승의 날 전후로 저를 찾는 60세된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이 있고,
어버이날 전후로 거의 30년째 저를 찾는 두 자매도 있습니다.
30대 중반의 젊었던 자매가 지금은 60대 중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힘든중에도 끝까지 가정을 지켜낸 분들입니다.
참 어려운 것이, 답이 없는 것이 공동생활입니다.
부부가정공동생활도, 수도가정공동생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늘 새롭게 시작하는 길뿐이 없습니다.
이혼율, 자살율, 노인빈곤율, 출산율이 세계 꼴찌인 한국이라 합니다.
요즘 결혼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하며 본당에서 결혼하는 경우도 1년 한둘 정도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이 주제입니다.
성서의 예수님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창조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 말씀 안에 부부일치의 비결이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부부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믿는 이들의 부부공동체뿐 아니라 수도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달라도 바라보는 방향이 같기에,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기에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의 신뢰와 우정과 더불어 부부간, 수도자간 신뢰와 우정이 깊어질 때
진정한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부부가 평생 함께 살아가는 것은 수도자가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힘들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들 보기도 힘들지만 함께 사이좋게 살아가는 부부도 보기 참 힘듭니다.
이들을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고 자주 눈길이 가곤합니다.
함께하는 부부에게 자주 드리는 격려 말씀도 생각납니다.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이렇게 함께 끝까지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혼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합하여 평균점수 60점이 넘어야
함께 천국입장이라고 말합니다.
때로 저절로 넋두리처럼 나오는 말도 있습니다.
“결혼은 아무나 하나?
부부는 아무나 하나?
부모는 아무나 하나?
결혼자격 시험, 부부자격시험, 부모자격시험좀 있었으면 좋겠다.
자격미달되는 경우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가 너무 많다.”
그러나 자격 갖춰하기로 하면 자격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평생 자격을 갖춰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부모가, 수도자가 되는 것 역시 평생 과정입니다.
참으로 평생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며, 경청과 겸손, 배움과 노력의 자세로 살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예전 자주 들었던 예화도 생각납니다.
“10대 부부는 신나게 살고, 20대 부부는 꿈속에 살고, 30대 부부는 사랑하며 살고,
40대 부부는 싸우며 살고, 50대 부부는 미워하며 살고, 60대 부부는 불쌍해서 살고,
70대 부부는 고마워서 산다.”
애정이 우정으로 바뀌어가는 부부간의 내적성장과정은 수도자들 역시 흡사합니다.
세월흘러가면서 불쌍해서 고마워서 살아가는 신뢰와 연민의 사랑, 우정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쉽사리 이혼할 것이 아니라 서로 때가 될 때까지 끝까지 기다려주는 지극한 인내와 관용이 필수입니다.
혼인 주례때 자주 인용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라는 책에서 “결혼에 대하여” 라는 잠언이
부부관계뿐 아니라 공동체내의 인간관계에도 깊은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참으로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자유롭게 할 때 더불어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일 것입니다.
반면 무례하고 불손하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거친 언행은 얼마나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며
관계를 파괴하는지요. ‘사랑’이란 제 옛 글도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사랑은 아무나 하나?”
“부부생활은 아무나 하나?”
“부모는 아무나 하나?”
“수도생활은 아무나 하나?” 예로 들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완성을 향해가는, 그러나 아직은 미완의 공동체라는 예술작품입니다.
부부공동체든 수도공동체든 평생 공동체 건설에 관용과 겸손과 인내와 지혜를 다해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도 참 적절합니다.
“원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대해 들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무엇보다는 맹세하지 마십시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말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는 이들은 원망도 절망도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끝까지 함께 사는 것이 이상이겠지만 이혼도 엄연한 현실이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법 교수 신부님이 로마에서 혼인법을 배운후 마지막 강의시 들은 결론 말씀이라 합니다.
"교회법을 총동원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은 살게 해주고, 못 살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이혼하여 혼자 살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공동체를 떠나선 안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끝까지 삶의 중심인 주님을 닮아 인내와 관용, 겸손과 진실, 배움의 자세로 신의를 지키며
공동체 삶을 살아가십시오.
죽어야 끝나는 공부요 영적전쟁입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주님을 따라 사랑의 학인,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순례자,
사랑의 수행자로 살아가십시오.
날마다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5/25(토)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조재형 신부)
2.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세상의 지혜와 명예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알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묵상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조욱현 신부)
3.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온전한 신뢰와 의존으로 단순하게 하느님께 다가가는 어린이들과,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를 막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보다도 힘들어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막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비록 그것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더라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면’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여정입니다.(김혜윤 수녀)
4.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끝까지 삶의 중심인 주님을 닮아 인내와 관용, 겸손과 진실, 배움의 자세로 신의를 지키며
공동체 삶을 살아가십시오.
죽어야 끝나는 공부요 영적전쟁입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주님을 따라 사랑의 학인,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순례자,
사랑의 수행자로 살아가십시오.
날마다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이수철 신부)
5/25(토)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518(148)일 기도
복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온전한 신뢰와 의존으로 단순하게 하느님께 다가가는 어린이들과,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를 막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보다도 힘들어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막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비록 그것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더라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면’...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주님!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게 하소서."
얼마남지 않는 나의 인생 여정
구원으로 가는 여정으로 인도하소서.
나를 끌어 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소서.
아멘.
- 2024년 5월25일(토) 1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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