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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6월 5일 수요일[(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6월 5일 수요일[(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보니파시오 성인은 673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엑시터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성인은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교로 축성되어 마인츠 교회를 다스리며, 동료들과 함께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우고 재건하였다. 성인은 프리슬란트(오늘날 네덜란드) 지방에서 전교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입당송

이 성인은 하느님의 법을 위해 죽기까지 싸웠으며, 악인들의 말도 두려워하지 않았네. 그는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지었네.
<또는>
지혜 10,12 참조
주님은 격렬한 싸움에서 그에게 승리를 주시어 지혜가 그 무엇보다 강함을 깨닫게 하셨네.

본기도

주님,
거룩한 순교자 보니파시오의 전구를 들으시어
그가 입으로 가르치고 피로 지킨 신앙을 저희도 굳게 보존하며
행동으로 충실히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입니다.1,1-3.6-12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3(122),1-2ㄱ.2ㄴㄷㄹ(◎ 1ㄴ 참조)
◎ 주님, 저는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 하늘에 좌정하신 분이시여, 저는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보소서, 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
○ 몸종이 제 안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1,25.2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사도 26,19-23)와 복음(요한 10,11-1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보니파시오가 주님 사랑으로 갖은 육신의 박해를 이겨 내게 하셨으니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에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 마음도 그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또는>
주님, 복된 순교자 보니파시오를 기리며 이 예물을 바치오니
일찍이 주님을 위하여 흘린 그 고귀한 피와 같이
이 예물도 기꺼이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16,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또는>
마태 10,3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저희에게 굳센 정신을 심어 주시어
저희가 복된 보니파시오처럼 언제나 주님을 충실히 섬기며
온갖 고난을 꿋꿋이 이겨 내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십시일반(十匙一飯),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도와주기는 쉽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쉬운 일일지라도 함께하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저는 십시일반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본당에 청년 성가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주임 신부님이 오면서 청년들 모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한주는 성경 공부, 한주는 친교를 하면서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청년 성가대가 출범했습니다. 청년 성가대에서 단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마침 본당에서는 한국에 성가책 300권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택배를 부치려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말처럼 택배비용이 성가책 구매비용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10 미사 성가 단장이 한 가지 제안했습니다. 올여름에 성가대원들 중에 한국 가는 단원들이 있는데 미국 오는 길에 한 박스씩 가져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택배비용을 줄이고, 그 비용으로 청년 성가대 단복을 사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10박스면 부피도 크고, 무게도 150킬로로 부담되지만, 1박스는 큰 부담 없이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청년 성가대를 아껴주는 어른 성가대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맡아 주시는 성가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멀리 한국에서 일을 도와주시는 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복음서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지붕을 들어내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먹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이 많아서 어렵겠다고 하였습니다. 돈도 많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먹을 것이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중물의 위력을 알고 있습니다. 펌프에 물 한 바가지를 넣고 힘껏 펌프를 움직이면 한 바가지의 물로 5천 바가지의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하에는 많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 다음, 보리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십시일반과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만나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전에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동의 문제였습니다. 천국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지 않고, 이웃에게 음식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흘리지 않고,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옥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으려 하니 아주 불편하였습니다. 음식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십시일반으로, 백지장도 서로 맞드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 천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애벌레는 땅 위를 기어 다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만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나비와 애벌레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하나의 천사가 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도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과 탐욕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날개 잃어버린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시일반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마르코 12,18-27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형제들이 있습니다.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땅으로 건너가서, 한두 해가 아니라 십 년, 이십 년,

아니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헌신하는 선교사 형제들입니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닙니다. 마치도 수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지리산이나 금강산 능선 타듯이

극복해야 할 도전들이 줄지어 기다립니다.

평생 노력해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언어 문제, 문화 차이, 식습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그저 직진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보니파시오 주교님이 딱 그랬습니다.

주교님의 어록을 묵상하다 보니, 세상 모든 선교사들의 이정표요 모델이 따로 없습니다.

 

“비록 흔들리는 배인 우리 교회이지만, 그 안에 선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고 진두지휘하시니

우리 교회는 안전합니다.

비록 전후좌우로 쉼 없이 흔들리지만 굳건한 안전장치인 주님의 현존에 힘입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꾸준히 전합시다!”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는 구원의 문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던 이교도들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외쳤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던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던 보니파시오 주교님은

우리나라로 치면 당산(堂山) 나무처럼 여기는 그들의 참나무 신목(神木)을 과감하게 베어버렸습니다.

그 나무로 소 성당을 지었습니다. 이교도들은 그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의 목숨 걸고 선교활동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선교 사업이 언제나 탄탄대로만을 걸은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때로 혹독한 실패도 맛보았고 눈물을 머금고 철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란 없었습니다.

 

일단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고, 지난 상황을 복기하면서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또 다시 선교활동의 성공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었습니다.

효과적인 전략을 세운 후, 또 다시 시도하고, 그래서 큰 성공을 거두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보니파시오 주교님도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평생토록 수많은 이방인들을 개종시켰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존경받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하면서 편안히 노후를 보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과 구원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교도들의 영혼이

늘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연로한 몸을 추스르고 고단한 선교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앙심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전도 여행 중에 머리에 칼을 맞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보니파시오 주교님께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언제나 한결같이 지니고 계셨던 영혼 구원을 향한

활화산 같은 열정이 오늘 우리 마음 안에서도 솟아나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늑대가 가까이 올 때 도망쳐 버리는 삯꾼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됩시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의 강론> :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마르 12,24)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곡된 신앙’(잘못된 신앙)이 가져온 불신, 곧 ‘잘못된 생각’에 구속되어 버린 ‘영적무지’와 믿음이 가져온 ‘신적지혜’의 자유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성경’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밝힙니다.

‘성경’ 대해,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기에,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집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이를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3,6)를 인용하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느님 능력’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곧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소서.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6.4.연중 제9주간 화요일                                                     2베드3,12-15ㄱ.17-18 마르12,13-17

                                                         하닮의 여정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 버리나이다.”(시편90,10)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은은한 밤꽃 향기에 젖어드는 마음입니다. 

근래 보기드문 아름다운 날들의 연속입니다.

 

어머니의 달, 5월 성모성월은 물론이고 아드님의 달, 6월 예수성심성월중 어제의 날씨도 참 좋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수도원을 사랑하여 결성된 모임인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의 달이기도 하네요.

또 이번주 금요일은 요즘 계속된 대축일을 마감짓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날씨가 참 예뻐요!”

어제 수도원을 방문하여 성사를 보던 수녀님의 표현이 흡사 하느님이 예쁘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저절로 시편 성구를 연상하게 하는 아름다운 하늘에 초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산과 들이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얘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하신 일을 알려주도다.”(시편19.2)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라고 눈들면 한눈 가득 들어오는 하늘입니다.

누가 저보고 취미가 뭐냐고 묻는 다면, 저는 지체없이 “하늘보며 하느님 사랑을 관상하는 것”이라

대답하겠습니다.

 

다음 시편의 고백은 제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6월은 예수성심성월입니다.

6월 들어 고백성사를 본 분들에게 보속의 ‘처방전 말씀’으로는 한결같이 다음 시편말씀을 써드리고

어린이를 안고 있는 그림에 “사랑해요”라는 말마디가 새겨진 붉은 스탬프를 찍어 드렸습니다.

“저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시편18,2)

 

문화영성대학원에서 전례를 강의하는 원장수사의 강의 소재가 참 재미있고 호기심을 갖게 합니다.

궁금해서 물어 봤더니 한번은 “개두포, 장백의, 띠, 중백의, 영대”였고,

다음에는 “주교관, 반지, 지팡이, 가슴 십자가”였고,

어제 물었더니 “전례 색깔”이라 했고 이에 대한 제 답글입니다.

“색깔의 신비도 무궁하군요!

모든 색깔의 깊이에는 신비의 하느님이 계시겠군요.

색깔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네요.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싶네요. 좌우간 수고많습니다.”

 

이런 시간과 공간을, 우리를 성화하는 전례 상징들에 대한 아름다운 강의들 또한 하느님 사랑,

교회 사랑의 표현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요,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 예수님 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굿뉴스 인터넷을 여는 순간 한눈에 들어오는 성구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7)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하느님 사랑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하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산다면 저절로 찬미와 감사요

기쁨과 평화요 행복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참 난해한 질문입니다만 예수님은 천상지혜로 참 자유롭게 통과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말마디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정말 이런 예수 스승님의 진가(眞價)를, 명불허전(名不虛傳)을 입증하는 다음 문답입니다.

예수님의 천상지혜로 빛나는 통쾌한 장면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양자택일의 문제요, 어떻게 대답하든 이들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치라 하면 민족반역자로, 또 바치지 말라하면 국사범으로 몰릴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예수님의 역공의 질문으로 답변합니다.

이어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을 달라하여 받은후 답변이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김안에 있는 참 자유(the true freedom in services)'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모든 것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셈이 되었습니다.

 

이제 판단은 각자가 해야 합니다.

하느님 중심만 확고하다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유롭게 결정할 일입니다.

황제는 물론 세상 모두가 하느님께 속해있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느님 앞에 모두는 상대적 가치만 지닐뿐입니다.

그러니 세금을 낸다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렇게 말할 수는 없고 각자 판단할 수 뿐이 없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바둑용어가 생각납니다.

명분에 집착하다 큰 것을 잃는다면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병자호란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인조의 어리석음도 주전파들의 주장에 휩쓸린 탓입니다.

후에 만고의 충신, 주화파의 최명길의 분별의 지혜와 용기덕분에 살아난 인조요 조선입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지론인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절묘한 조화와 균형의 지혜가 필수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충실할 때 올바른 분별의 지혜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다음 옛 어른의 지혜에 따른 삶이라면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세상을 지키는 존재는 특별한 소수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소중히 일상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이다.”<다산>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속이지 않으며, 실패했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진정한 영웅이다.”<채근담>

 

오늘로서 제1독서 베드로 후서는 끝납니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 귀한 위로와 격려의 가르침이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서 나설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2베드3,15ㄱ.17-18참조)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께 대한 앎을 날로 키워주시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잘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이제와 영원히 주님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4,17). 아멘.


6/5(수)  [(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되새김 구절

 

1. 우리가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도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과 탐욕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날개 잃어버린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시일반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조재형 신부)

 

2.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는 구원의 문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던 이교도들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외쳤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던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던 보니파시오 주교님은

우리나라로 치면 당산(堂山) 나무처럼 여기는 그들의 참나무 신목(神木)을 과감하게 베어버렸습니다.

그 나무로 소 성당을 지었습니다. 이교도들은 그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의 목숨 걸고 선교활동에 전념했던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소서.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예수 스승님의 진가(眞價)를, 명불허전(名不虛傳)을 입증하는 다음 문답입니다.

예수님의 천상지혜로 빛나는 통쾌한 장면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양자택일의 문제요, 어떻게 대답하든 이들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치라 하면 민족반역자로, 또 바치지 말라하면 국사범으로 몰릴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예수님의 역공의 질문으로 답변합니다.

이어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을 달라하여 받은후 답변이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김안에 있는 참 자유(the true freedom in services)'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모든 것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셈이 되었습니다.(이수철 신부)

 

6/5(수)  [(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529(159)일 기도

 

복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소서.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6월5일(수) 9시...수산나 -